Friday, April 19, 2024

엄마의 치마 속


“Hi, I remember you.”

“미안.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가에게 ‘I am from my mother’s belly.’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꽤 인상적이어서 너를 기억해요.”

“어! 그랬어요. 크루즈에 몇몇 없는 동양인인 나를 기억하나? 했는데.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크루즈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남자와 나눈 대화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들의 첫 질문은 

“Where are you from?”이다. 나는 대답한다. 

“I am from my mother’s belly.”

미국에 오래 살면서 수없이 받아 온 질문이 귀찮기도 하고 그냥 심심풀이 땅콩 까먹는 식으로 대꾸한다. 그러면 웃으면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집요하게 내가 태어난 곳이 더 궁금한지 질문은 이어진다. 

“What is your nationality? Japanese?”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Chinese? Korean?”

“I am from Korea.”

라고 대답했건만 질긴 사람들은 나에게 다시 묻는다.

“North Korea? South Korea?”

나는 대답한다.

“I am from East Korea, hahaha. West Korea.”

외국인 대부분은 북한과 남한은 어디서 들어서 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들에게 나는 웃으며 다시 말한다.

“Actually, I am from Best Korea. Haha ha.”


한국이 드라마와 가수 방탄 덕에 많이 알려졌다. 내가 수없이 내뱉던 ‘Best Korea’가 정말 된 것이다. 나의 두 아이는 

“엄마, 고마워요. 한국인으로, 가장 큰 도시 뉴욕에서 남자로 태어나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며 살게 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줘서.”


큰아이가 오래전, 몽골에 여행 간 적이 있다. 어두운 밤에 별을 보며 들판에서 헤매던 중 멀리 몽골인이 사는 집, 게르를 보고 반가웠다. 

“길을 잃었습니다. 길 좀 가르쳐 줄 수 없을까요?”

“잠깐만 기다려야 해요. 지금 코리안 드라마를 보는 중인데 드라마가 끝나면.”

“나 코리언이에요.” 

“아! 반가워요. 그럼 함께 드라마 보고 끝나면 안내해 줄게요.” 


내가 태어난 한국이 ‘잘 살아보세.’ 외침으로 부강국이 되었다. 게다가 드라마와 가수 방탄 등 많은 활동가의 노력으로 세상 곳곳에 널리 알려졌다. 아이들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난 왠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우주에 홀로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은 느낌이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 자리 잡아 보겠다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발버둥 치다 상처받고 피곤해진 작은 짱돌 같은 느낌이랄까?


“정신 차려. 애가 소금에 푹 절인 파김치 같네. 그 못된 성질 다 어디 갔어? 미국 가기 전에는 제 성질대로 안 되면 방바닥을 뒹굴며 난리 치던 애가, 미국 가더니 성질 다 죽고 사람 됐네! 뉴욕 물이 세기는 센가 보다. 미국 가기 잘했지. 공부해서 좋고, 못된 성질 고쳐 좋지, 결혼 비용 안 들었으니, 일석삼조다. 너 한국에서 결혼했으면 돈 엄청나게 깨졌다. 모르긴 해도 유학 비용보다 훨씬 더 들었을걸.” 

오래전, 한국을 방문하니 친정아버지가 기뻐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나의 미국 생활 시작부터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종사촌 언니가 한국 음식이 가득 든 커다란 박스를 뉴욕 가는 나에게 시카고에 사는 시누이에게 전해 달라며 공항에 가져왔다. 

“언니, 시카고가 어디야.”

“뉴욕과 가까운 곳이야. 내 시누이가 가지러 올 거니까 걱정 말고 가져가.” 

JFK공항에 학교에서 마중 나온 말레이시아 여학생이 내 이름이 쓰인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박스에서 한국 음식 냄새가 솔솔 새는 것이 아닌가! 가뜩이나 못 하는 영어가 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등록을 마치고 박스를 가지러 오라고 시카고에 전화했다. 

“시카고에서 뉴욕이 얼마나 뭔 곳인 줄 몰랐어요. 가지러 갈 수 없어요. 우편으로 부치세요.”

차도 없고, 우체국도 모를뿐더러 어떻게 붙일 줄도 모르는 나에게 ‘왜 가져 왔느냐?’며 귀찮다는 듯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었다.


미국에 유학 간다니까 교수님이 미국에 사는 지인의 전화번호를 줬다. 몇 개월을 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 보기만 하고 망설이다 용기 내 조심스럽게 전화했다.  

“저 서울에서 온 이수임인데요.” 

“난 한국 사람 안 만납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 밀어냈다. 쇠몽둥이로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몸이 굳어져 한동안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붙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연히 한국 아줌마를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나는 서울에서 방금 온 약아 빠진 서울 아가씨는 무서워서 상대 안 해요.” 

깊은 늪으로 빠져들며 허우적거렸다.


외로움에 절은 내가 한국 남자와 차 마실 일이 생길 줄이야! 잘 보이려고 작은 눈을 반짝거리며 열심히 그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이러고 노닥거릴 시간에 돈을 벌면 벌써 꽤 벌었겠네, 미국에서는 시간이 돈이지요.” 

절벽 아래로 등 떠밀려 떨어지는 느낌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미국에 와서 받는 설움에 지쳐 서울에 갈 때마다 친정아버지는

‘너 왜 이렇게 사람이 쪼잔해졌니?’

어려운 결혼과 이민 생활이 나를 쪼잔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힘들 때마다 친정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쉬다가 용돈 두둑이 받아오는 재미로 툭하면 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몇 불에 벌벌 떠는데 그들은 펑펑 써대니, 대조적인 삶이 서러워 더는 갈 곳이 아니라며 발길이 뜸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친정은 새로운 식구인 올케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 친구가 주인 행세를 하며 엄마가 알뜰히 모아놓은 재산을 축내며 나를 반갑지 않은 나그네로 취급했다. 친정은 더는 끼어들 수 없는 타인들의 무대로 바뀌며 씁쓸한 기억으로 멀어졌다. 


오랜 이민 생활, 수없이 절벽으로 떨어졌다가는 기어 올라오고, 친정과도 멀어지며 서서히 파김치가 되어갔다. 드디어는 건포도처럼 말라 굳어지고 쪼그라들다가 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그 돌멩이가 닳고 닳아 먼지가 되었다. 나는 이따금 먼지로 누군가의 발밑에 깔려 설 수 없는 느낌이다. 답답하다. ‘내가 왜 이곳에 웅크리고 있는 걸까?’ 자신에게 반문한다.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배나 더 긴데도 미국에 살면 살수록 끝 간 데 없이 넓은 미국이란 나라를 통 모르겠다. 부모 돌아가시고 난 후 한국은 설움의 땅으로 내가 알던 곳이 더는 아니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가는 곳이라던데? 엄마 품 안이 나의 집이다. 


어린 시절 항상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엄마는 나를 시골집에 보내곤 했다. 곧 뒤따라오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차를 타고 내려서는 십 리 길을 꼬부랑거리고 가면 시골집이 보였다. 걸어가는 강가 벼랑은 끝없이 깊고 강물은 나를 삼킬 듯 출렁였다.


고모는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번쩍 안아 냇가로 데려가 냇물을 끼얹어 주며 목욕 시켜줬다.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물에 말아 오이지에 고추나물 그리고 조개젓으로 밥을 먹으면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엄마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서울서 온 나를 반기는 친구들과 뛰어놀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산등성이 무덤가에 서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혹시나 엄마가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엄마는 없다. 꿈에서 본 엄마는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 나를 찾아올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가겠다고 며칠을 울곤 했다. 나를 찾아오다가 엄마가 강가 벼랑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상상이 더욱 울게 한듯하다. 며칠을 울고 나면 엄마 곁에 갈 수 있었다. 엄마의 치마폭에 들어가  좋아서 흘리는 눈물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치마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곁에 있는 나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온종일 울지 않고 뛰어놀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엄마는 없다. 나도 모르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의 엄마가 살아왔듯이 그녀를 닮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Friday, January 26, 2024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다. 서희는 가을 청색 코트 속에 다운 조끼를 입고 검은 머플러로 목을 감았다. 그녀 몸에서 내세울 것이라고는 튼실한 다리다. 제일 잘하는 것도 걷는 것이다. 서희는 ‘강을 끼고 걷다가 대서양을 만나 해안선을 낀 작은 도로로 계속 걸어가면 플로리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검은 개가 갑자기 짖으며 달려왔다. 그 바람에 서희는 기겁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며 개 주인을 찾았다. 개 주인은 떨어진 곳에서 개 줄을 들고 ‘개야 물어라.’는 태도로 놀라는 서희를 보며 즐기는 듯 느긋했다. 당장이라도 물것 같은 개를 노려보며 파랗게 질린 서희는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네 개가 나를 물려고 하는데 개를 부르지 않고 뭐하니? 아홉 시가 지나면 개 줄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오히려 개 주인은 개새끼를 걱정하는 투의 뻔뻔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지껄였다. 

“선글라스에 마스크와 모자를 쓴 너의 이상한 모습을 보고 개가 놀라서 짓는 거잖아.” 

개들은 개 주인을 똑 닮아 못된 주인이 키운 개는 사납게 짖으며 달려든다. 개가 가까이 와서 인사하듯 동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착한 개 주인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다. 우울증 주인 개 또한 우울증인지 다른 개하고는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배회한다. ‘개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주머니에 먹을 것을 넣고 다니다가 달려들려는 개를 멀리 쫓기 위해 던져줄까?’ 궁리와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개 줄을 해야만 하는 오전 9시 이후로 산책 시간을 바꾸었는데도 못된 개 주인들은 개를 풀어놓는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듯이 서희에게는 개를 무서워하며 싫어하는 사정이 있다.

“개새끼” 서희가 태어나 처음 내뱉은 욕이다. ‘엄마, 아빠’라는 말만 간신히 할 줄 알던 나이의 서희가 등에 주사 놓는 의사를 향해 욕인지도 모르고 했던 말이다. 아마 서희가 개한테 물리고 나서 ‘이놈의 개새끼가.’ 화가 나서 내뱉은 어른들의 말을 듣고 따라 한 듯하다. 아버지는 본인을 빼닮은 서희를 무척 예뻐했다. 번쩍 들어 올려 깎아도 수염이 금세 올라오는 까칠한 뺨에 비벼대곤 하셨다. 서희는 따가워 발버둥 치며 아버지의 껄껄 웃는 소리를 듣곤 했다. 사랑을 독차지한 서희에 대한 시기심 때문인지 키우던 개가 어른들이 잠시 한눈판 사이 잠자는 서희를 으슥한 곳으로 물고 가서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 개에게서 떼어 낸 화가 몹시 난 아버지에게 개는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졌다. 아직도 서희의 다리에 흔적이 서너 군데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개만 보면 살살 기듯이 걷는다. 아무리 개 주인이 ‘우리 개는 물지 않는다. 착하다.’는 말을 해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개는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기에 어느 때, 어디에서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달려들어 성추행당했다는 뉴스도 종종 듣지도 않는가.

서희가 개를 멀리하는 사정이 있듯이 승미는 개라면 끔벅 죽듯이 사랑하는 사정이 있다. 

승미는 여덟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억척스러운 엄마가 반찬 장사해서 큰 언니를 대학 졸업시켜 약사로 만들었다. 엄마가 반찬 장사하는 시장통 골목 들어서는 길가에 약국을 차렸다. 맏딸인 큰언니는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언니가 약국에서 번 돈이 승미에게 오기까지는 목 빼고 기다려도 인절미는 구경도 못 하고 콩고물이나 할 틀 정도로 오빠와 언니들의 학비 대기에도 벅찼다. 항상 언니들이 물려준 옷과 신발을 그리고 반찬 장사하는 엄마와 바쁜 언니들 틈바구니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희와 승미는 그 넓은 미국에서도 뉴욕 그리고 같은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다. 승미는 개를 끌고 배회하고 서희는 산책 중이었다. 무릎 뚫린 빛바랜 청바지에 주황색 오리털 재킷을 입은 승미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다른 개와 달리 승미 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사색하는 표정이었다. 개를 한국억양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서희는 승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둘은 서로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어느 날 깊은 생각으로 사색하던 개가 서희에게 다가와 빤히 바라봤다. 개를 끔찍이 싫어하는 서희지만 이 개만은 특이해서 물어봤다.

“개가 생각이 많은가 봐요?”

서희의 물음에 귀찮다는 듯 승미는 개를 부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 후로 개는 서희를 볼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아는체했다. 승미가 개를 불러도 개가 서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자 개 줄을 묶으려고 다가왔다.

“개 이름이 뭐예요?”

“나이키예요.”

승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 사람이 이 동네에 사는 줄 몰랐어요. 반가워요. 개가 조용하네요. 사색하는 철학자 같아요.”

둘의 인연은 개 끈으로 연결되었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승미가 상냥한 미소로 다가와 커피를 내밀며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친절을 받으며 서희는 기뻤다. 커피로 시작한 승미는 만날 때마다 인절미, 만두, 김치, 등등 그녀가 손수 만들었다며 가져다줬다. 둘은 가까워졌다.

서희가 생각하기에 승미의 개 사랑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유난스러웠다. 세상에 승미 자신과 나이키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이키에게 인사하고 가세요. 우리 아들이 섭섭한 눈으로 쳐다보잖아요.”

돌아서 가는 서희를 승미가 불러세워 커다란 눈을 부릅뜨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야단치듯 말하곤 했다. 서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어질 때 인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 ‘나이키에게 인사하고 가라니!’ 산책하며 개에게 시달리던 서희가 이제는 인간에게도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승미와의 인연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나이키를 ‘우리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키의 존재가 그녀의 남편과 딸의 존재 이상인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도 없이 나이키를 끌고 서희 집 문을 두들기지를 않나.

‘우리 아들이 서희씨 집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버텨서요.”

“그럼, 나이키를 뒤뜰에 풀어 놓고 차 마시고 가세요.”

“나이키는 내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를 찾으며 울어요. 여기에 함께 있고 싶어요.”

승미는 식탁에 두발을 올린 나이키를 쓰다듬으며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며 차와 함께 내놓은 과자와 넛을 입에 넣어줬다. 서희는 상전이 따로 없는 풍경을 보고 뭐라지도 못하고 참으며 오래전 한국에서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광버스 뒤에 앉은 젊은 여자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전화 해댔다. 

“우리 딸 잘 있지? 밥 먹였어? 엄마 보고 싶어 할 텐데? 아이고 우리 딸 보고 싶어라. 쭛쭛쭛” 

딸을 바꾸라더니 전화기에 대고 뽀뽀를 해대며 난리를 떨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딸이라는 게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아이 업는 포대기로 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네를 태우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이라고 부르는 강아지 주인에게 참다못한 한 할머니가 

“사람이 어쩌다가 개를 낳았소?” 

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승미가 나이키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쇼핑이다. 쇼핑 갈 일이 있으면 함께 가자고 전화했다. 서희는 바람도 쐴 겸 운전하는 승미가 가자는 데로 따라다녔다. 

"예쁜 옷을 잘 고르네요."

서희가 말하자

“언니 친구 중 부잣집 딸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항상 예쁜 옷을 입고 집에 놀러 오면 곁눈질하며 부러워했어요. 살면서 그 언니가 입었던 블라우스가 항상 눈에 아른거려서 쇼핑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옷을 잘 고르는 경지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한 줄 알아요? 남편 눈치 보며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거 예쁘지 않아요? 서희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사요. 입던 옷들은 모두 버려요. 그리고 새로 다 바꿔요. 내가 도와줄게요."

"전부 다요!" 

서희는 놀랐지만, 너무도 강경한 그녀의 말투에 알았다고 했다.

“아주 단순한 디자인과 색상으로 검정, 회색, 베이지색이나 흰색 바지와 치마 그리고 카디건 스웨터, 청바지와 발목부츠, 검은 뿔테 안경은 기본으로 있어야 해요. 좋은 옷을 입고 싶어도 그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잖아요." 

서희는 전문가 다운 승미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의 부실한 가슴을 가리는 Tug neckline 셔츠, 작은 키를 커버하는 Boot cut 바지, 아예 세탁소에 함께 가서 바지 기장을 줄이는 도움까지 받았다. 서희는 늘어나는 카드 빚으로 속이 쓰렸지만, 발바닥이 불나도록 승미를 따라다녔다. 승미는 손재주가 많고 눈썰미도 예리했다. 윈도에 걸린 옷을 지나치며 힐끗 보기만 해도 만들어 입을 정도다. 음식도 먹어보기만 하면 그대로 만들어 초대하곤 했다. 

서희는 승미가 쇼핑 중독과 지나친 개 사랑으로 남편과 갈등이 많다는 것을 들었다. 승미가 남편과 싸운 후에는 가출해서 화가 풀릴 때까지 쇼핑하다가 호텔에 머무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호텔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행 갈까 봐요. 우리 함께 여행하지 않을래요?”

서희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잘해주는 승미 말을 모른척할 수 없었다. 

“서희씨가 여행을 많이 했으니까, 일정을 한번 짜 보세요.” 

서희는 집 나온 여자와 여행 간다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여행계획을 짜는 것도 귀찮았다. 그냥 한국 여행사에 전화했다. VIP 용 패키지가 좋다며 권하기에 여러 말 섞기 싫어 그러라고 했다. 플러싱 가는 길에 둘은 여행사에 들렀다. 크레딧 카드로 결제하려고 했더니 캐시나 체크로 내란다. 직원과 몇 마디 실랑이하다 밖으로 나왔다. 몹시 실망한 승미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쳐다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희는 가기 싫은 여행 잘 됐다고 생각하며 담배 한 대 달라고 했다. 둘은 어둡고 스산한 주차장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상반된 생각으로 심드렁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 대다가 집으로 왔다. 

“그냥 여행을 취소하기는 너무 섭섭해요.”

승미가 여행을 가자고 다시 전화했다. 승미의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그냥 여행을 가야 할 것도 같았다. 서희는 실랑이했던 여행사에 전화해 매니저를 바꾸라고 했다. ‘왜 카드를 받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받는단다. 

여행을 많이 다닌 서희에게는 유럽 여행이라는 것이 몇 번 하다 보면 이 나라 저 나라 거의 비슷한 것이 성당 순례인 듯 새로운 느낌이 없었다. 여행사에서 자라는 곳에서 자고, 보라는 것을 보고, 먹으라는 식당에서 먹으며 끌려다닌다. 게다가 낮이 짧은 겨울에 동유럽 여행이다 보니 그냥저냥 모든 것이 시큰둥했다. 하지만 나이키와 쇼핑에 세월을 보냈던 승미는 흥분했다. 옷과 신발을 사서 쟁였다. 여분의 가방을 새로 샀다. 저녁마다 바에서 사람들과 한잔하며 즐기고 싶어 했다. 반대로 서희는 여행할 때는 일찍 자고 일어나는 습관이 그냥 언제부턴가 생겼다. 객지에서 피곤해 몸이 아파지는 것이 늘 두렵기 때문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만 빼고는 집 떠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 자체에 심각성을 두지 않는 ‘그냥’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희는 승미의 물음에 시종 ‘알았어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해요.’로 일관하며 성의 없이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쇼핑만을 즐기는 승미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말해야 할 이유도 굳이 없었다. 여행할 때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거나 동네 시장통을 기웃거리고 동네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것을 즐겼다. 패키지여행은 그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니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취향이 다른 승미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이 두려워서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능성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가 흔히 그렇듯 시간이 지나자,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다. 승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그냥, 알아서 해요. 혼자 하는 일은 딱 부러지듯 하면서 나와 함께하는 여행엔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태도를 왜 반복하는 거예요?”

승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서희는 승미가 화가 나 이성을 잃을 때 나오는 짙은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들으며 놀랐다기보다는 승미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승미가 결혼 전 룸메이트와 다투다 발로 차며 두들겨 팼다는 것을.’ 

잘못하다가는 자기도 발로 차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상상하며 입을 다물었다. 승미는 주위 사람들이 나이키처럼 자기에게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따르지 않으면 화를 벌컥벌컥 냈다. 서희 또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만만치 않았다. 속으로 승미를 비웃었다.

‘세상에서 너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며 통제할 수 있는 나이키나 너를 반기고 따르지 내가 왜 너에게 꼬리를 흔들며 순종해야 하느냐고~‘​​ 

​​

‘서희처럼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모르는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을 만났다니! 게다가 동물을 싫어하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너 같은 인간과는 절대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 속 터져서.’ 

여행 이후 승미는 동물인 나이키는 잘해준 자기의 은공을 알고 말 잘 듣는데 인간에게 공들이고 잘해줘봤자 소용이 없다며 씩씩거렸다. 나이키와 있으면 마음이 편한데 인간들과 있으면 기분이 더럽다. 특히나 서희와 있으면 뭔가 갑갑하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서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공원에서 나이키와 산책했다.

어느 날 길에서 서희와 승미가 마주쳤다. 서희가 손을 흔들며 나이키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화끈한 승미는 쌩하니 그냥 지나쳤다. 나이키는 서희에게 오려고 낑낑거렸고 승미는 나이키를 질질 끌고 갔다. 서희는 멀어져 가는 승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던가?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다.’며. 결혼 전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 결혼 안 하니? 어떤 사람 찾는데?” 

서희는 친구의 질문에 잘못 대답했다가는 

“눈은 높아서 시집도 못 가고 쯧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뒤 잘 보는 남자!” 

“그건 사람이 아니고 개잖아. 얘는 별소리를 다 한다.”

친구가 눈을 흘기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희를 쳐다봤다. 

“개만도 못한 사람도 많잖아. 개만 한 사람이면 다행이지 뭐”

서희는 승미가 나이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이키는 이따금 생각나지만, 승미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지난 과거를 잘못 살았다는 후회를 되씹는 일이라서 승미에 대한 기억을 밀어냈다. 마침내 승미와 서희는 그녀들의 기억에 한동안 묵혀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타인으로 지워졌다.

Saturday, December 2, 2023

여름 안개 저편에


“서미,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혹시 복학생 기영씨?”

“맞아.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학교 다닐 때 뒤에서 들려오던 익숙한 소리라서요. 반가워요. 어디예요?”

“나 뉴저지 여동생 집에 놀러 왔어.”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 해줄게.”

“그럼, 내일 3시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30여 년 만에 기영의 전화를 받다니! 왜 전화상으로는 말할 수 없다는지? 그와 오래 더 이야기 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서미의 가슴이 뛸 만큼 희미한 기억 저편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래전, 그와 첫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날은, 추위가 지루하게 이어지다 갑자기 따뜻해진 화창한 5월 초였다. 방과 후, 집에 일찍 가기 싫어서 캠퍼스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기영이 멈췄다. 서미 옆에 앉으며 물었다.

“누구 기다려?”

“아! 네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오랜만에 좋은 날씨야.”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체취를 바람이 실어 날랐다. 싫지 않은 잘 익은 사과 향이다. 숱 많은 곱슬머리, 진 듯 만 듯한 쌍꺼풀, 움푹 팬 볼, 광대뼈 위에 살짝 뿌려진 주근깨와 각진 턱의 작은 얼굴을 자세히 봤다. 매력적이다. 그는 긴 다리를 쭉 펴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신통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서미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그윽한 눈이 촉촉하다. 

“이제 길고 지루한 겨울은 끝난 것 같아.” 

낮으면서도 깊고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서미의 감성을 자극했다.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가 복학한 지 일 년이나 지났건만 그동안 그의 매력을 알아채지 못했다니! 서미는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한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들어선 듯 오감이 활짝 열렸다. 나이 많던 복학생인 그가 어려워 멀리한 탓도 있다. 수업 시간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매력적인 소리라고 생각하며 서너 번 뒤돌아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의 외모가 근사하다고는 생각한 적은 없었다. 


“뒤에 타. 정류장까지 태워다줄게.”

기영은 나무에 기대놓은 자전거에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타래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귀여운 아가씨를 태우고 달리고 싶어서야. 꽉 잡아,”

서미는 그의 허리를 잡고 등에 머리를 묻었다. 푹 익은 사과주를 단숨에 들이킨 듯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전거는 정류장 쪽으로 가다가 서지 않고 한강 쪽으로 달렸다. 서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등에 파묻혀 오랫동안 그렇게 멀리 아주 먼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는 한강 다리 밑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더니 철퍼덕 누웠다.

“서미 이리 와서 누워봐. 시원해.”

얼떨결에 서미도 그 옆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서미, 사귀는 사람 있어?”

“아니요.”

사귀는 남자가 있냐고 물어본 후 그는 말이 없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하던 남자 옆에 누워 있다니! 그것도 어색함 없이 참 기이한 일이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람과 시작하는가 보다.’


그 5월 초 화창한 날이 빚어낸 갑작스러운 만남 이후 서미는 그가 말 걸어주기만을 기다리며 조바심치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무척 바쁜지 서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6월 마지막 주 방학이 시작되기 전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잘 지냈어. 여름방학에 무슨 계획 있어?”

“글쎄, 별로.”

“전화번호 줄래. 연락할게.”


서미는 그가 전화해서 데이트하자고 말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콧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방 청소를 했다. 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두문불출하고 전화기 옆에서 서성댔다. 전화벨이 울렸다. 

“너구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실망하며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빨리 전화를 끊었다. 나흘째 되던 날,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전화기가 고장 났나를 확인했다. 다섯째 날, 혹시 하도 당황해서 전화번호를 잘못 불러 준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가 잘못 받아 적은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섯째 날, 전화기를 드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전화기가 정말 고장 난 것이다. 아버지를 닦달해서 고치고 나니 그에게 전화번호 준 날로부터 구 일째 되는 날이었다.


서미는 기영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보내던 어느 날, 일하는 아줌마가 왠 남자가 문밖에 있다고 했다. 창문을 열고 위층에서 내려다보니 기영이 집 앞 가로등에 기대어 있었다. 

“어머, 말도 안 돼.”

서미는 놀라서 내다보던 머리를 안으로 들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수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 엉망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창피했다. 

대충 머리를 빗고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어요? 나 세수도 하지 않았어요. 돌아가세요.”

“잠깐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잠깐이면 돼?”

“안 돼요. 전화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그는 알았다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아니 시간을 줄 테니 준비하란 말도 없이 돌아서다니!’ 서미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가려고 옷을 꺼내 입다가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만 잡생각을 했다. 잠이 들었는가 하면 잔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몽롱한 상태에서 멀리서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전화 왔어요?” 

“아니.” 

"분명히 전화벨 소리가 났는데!" 

그에게서 곧 올 줄 알았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리며 끼니를 걸렀다. 


7월 마지막 주 금요일, 갑자기 기영이 다음 날 만나자고 전화했다. 토요일 아침,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냐는 전화가 다시 왔다. 그와 마주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며칠을 굶은 손이 떨려 커피를 쏟을 뻔했다. 간신히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다시 커피잔을 들었으나 빨라진 심장 박동으로 손이 떨려 도저히 잔을 입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찻잔은 덜거덕 소리를 내며 찻잔 받침 위에 무사히 얹혔으나 그가 보고, 들은 듯했다. 서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찻잔에 그려진 꽃무늬만 멍청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서미는 밥맛이 없었다. 거의 남기고 술기운으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술 마시고 싶어요.”

스탠드바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기영은 맥주를 마시며 강아지를 쓰다듬듯 서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카락이 부드럽네.”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의 손이 목덜미를 만졌다. 

“긴장했군. 내가 긴장 풀어줄게.”

서미는 그의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주무르자, 얼굴이 붉어지며 더욱 긴장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홀에서 블루스를 추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춤춰요.” 

서미가 기영의 손을 잡고 블루스를 추려고 발을 앞으로 들이미는데 그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듯 서미를 끌어안고 윗몸만 약간 움직였다. 서미도 그를 따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기영은 서미에게 손을 내밀며 히죽 웃었다. 서미는 그의 손을 잡고 둘은 말없이 어두움을 걸었다.


‘그럼 우리는 사귀는 건가? 아닌가?’ 서미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기영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너 실연 당했냐? 말해봐. 이러다 애 잡겠다. 일어나~.” 

아무 말 못 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서미에게 엄마는 

“어떤 놈이 우리 귀한 딸을 나무에 오르라더니 오르고 나니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려 놔! 머리 꼴이 이게 뭐니. 이대 앞에 가서 머리도 하고 옷도 사 입고 놀다 오렴.”

“머리 어떻게 할까요?”

미용사가 물었다. 

“뽀글뽀글 막 볶아주세요. 그것이 서미가 자신을 최대로 학대하는 방법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때까지 서미는 기영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서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집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쓸쓸한 가로등을 수시로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9월 첫째 주 서미가 마지막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하고 유학 갈 준비를 위해 안국동에 있는 유학 정보센터에 가려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기영이었다. 둘은 안국동 돌담길을 걷다가 비원에 들어가 궁 안을 어슬렁거렸다. 돌층계에 앉아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치기 쉽지 않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가까이하기엔 먼 사이? 좋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사이?’라고 서미는 생각하다가 영기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지지 않아.”

“아 그렇군요.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싸우고 끝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미는 비원을 나와 어둑해지는 한적한 길을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고 조용히 걸었다 

‘기영에게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눈에 띄는 여자를 보면 멈춰서 이야기를 걸고 길 가다 끌리는 여자가 있으면 전화번호를 받아내 만나다가 싫증 나면 또 다른 만남을 찾는 상대 중의 한 명인가 보다. 그와 잠자리까지 한 선배들도 두어 명 있다던데.’

뭔가 마무리 지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집에 가겠다고 손을 흔들었다.


서미는 기영의 ‘친구 사이’라는 말에 그의 전화를 반신반의 기대하지 않고 유학 준비에 전념했다. 그러던 11월 말경에 기영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서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물었다.

“서미, 나를 어떻게 생각해?” 

“친구 사이라고 먼젓번에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그는 서미의 야무지게 내뱉은 소리를 더듬듯이 말이 없었다. 둘은 다시 침묵 속에서 목적 없이 걸었다. ​​​​​​​​추웠다. 그가 잔기침했다. 어둠 속 저 멀리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붉은 글씨로 ‘모텔’ 사인이 빛났다.

“우리 잠깐 저기 들어가서 쉬었다가 갈까?”

“아니, 그냥 집에 갈래요.”

“단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두려워서 그래.

“그런 게 아니라 집에 9시까지는 들어가야 해요.”

“우리 그럼 지금부터 연애할까?”

“친구 사이든 연인 사이든 어차피 헤어질 건데요. ‘만남은 동시에 이별을 향해 달려간다’잖아요. 

기영은 서미의 집 길목에서 손을 흔들며 들어가라고 했다. 둘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다. 


서미는 기영의 사랑을 구애하며 시간을 죽이다가는 상처받을 수 있겠다고 단정했다. 서둘러 유학을 떠났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때 매달려 시간을 보낼 만큼 그는 서미의 전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잊힌 것이 아니라 서미 가슴 한편에 흠집으로 남았다. 이따금 고국에 대한 향수병처럼 그의 일그러진 미소가 훅하고 떠올라 그녀를 뒤흔들었다.


‘기영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연락했을까?’ 서미는 기운이 솟구쳤다. 먼 곳에 있던 것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이것저것 술안주를 준비했다. 시간이 다 되어 커튼을 젖히고 내다봐도 그는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문밖에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서너 번, 4시가 다 되어 검은 차가 멈추더니 기영이 내렸다. 싱거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서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았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 못 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공손히 인사하며 피자 한 상자를 

내밀었다. 

“브루클린에 유명한 피자집에서 사 왔어요, 줄이 길어서 기다리다 늦었어요.” 

‘아! 기영이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이 여자 저 여자를 찔러봤구나.’ 내가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이 여자는 줬나 보다.


대학 시절, 인생에서 너무도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고도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서로의 형편을 다 알기라도 하는 듯 반가웠다. 식탁에 앉기가 무섭게 서울에 사는 동기 소식을 물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했어. 기억이 희미해져 우리 과 애들 이름도 가물가물해. 오히려 뉴욕에 사는 서미가 더 많이 알지 않아?”

서미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기영의 부인이 서미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서미가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서미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문득 그가 ‘알아는 들은 건지?’ 의심이 가며 맥이 풀려 조용해졌다. 기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지금도 서미가 귀엽지만, 예전에도 귀여워서 인기가 많았는데,”

서미는 그의 시력도 시원치 않아 자기 모습이 안개 속의 여인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왠지 서글펐다. 벌써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늙었단 말인가! 


서미는 기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셔요. 생각나요. 우리 과 모두 철도 길가 아줌마 소줏집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술 내기했던 것 그때 기영씨도 있었잖아요. 여자팀이 이겼는데.”

“아! 생각나지. 그때 서미가 끝까지 취하지 않고 마지막 잔을 비워서 여자팀이 승리했지. 서미 쾌 술이 샜지. 지금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술도 못 마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그리 늙은 나이도 아닌데요.”

“이이 말이 맞아요. 이가 성치 않아 깍두기를 먹고 싶다면 찌개로 만들어 물렁물렁한 무를 씹을 정도로 치아도 좋지 않아요. 몸이 좋지 않아 일찍 은퇴하고 쉴 겸 미국에 여행 왔어요. 서울에 있다가는 간암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간병차 시누이 집에 머무르고 있어요.”

옆에 앉은 참한 부인이 간호사라도 되는 듯 거들었다.


서미는 혹시나 그가 자신처럼 싱글로 미국에 온 것은 아닌가 기대했었다. 그런데 간호사 같은 와이프를 데리고 나타나 귀가 들리지 않아 옛 친구들의 소식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시야가 흐려 내일모레 60인 서미를 귀엽다고 하지를 않나. 간이 좋지 않아 술을 못 마신다. 이가 성치 않아 깍두기를 씹지 못한다니.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추가 멈춘 듯 기영과의 시간이 뚝 멈췄다. 

술판이 무르익을 초저녁 8시, 그는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싱거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서미는 그를 더는 잡지 않았다. 그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무는 해를 보며 배웅했다. 붉은색이 푸른색으로 그리고 검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 창가에 앉아 잔을 비웠다. 

“친구는 헤어지지 않아”

예전에 기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쳐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 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씁쓸했다.

Saturday, September 30, 2023

놀마의 주황색 백팩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행동은 잊어버리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민주는 이 인용문을 입증하려는 듯 정희를 떠올리곤 한다. 요즈음도 정희는 그 무거운 주황색 백팩을 메고 다닐까? 정희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는 희미하지만, 그녀의 등에 얹혀 그녀를 짓눌렀던 주황색 백팩의 암울한 덩어리는 개 양귀비 핏빛으로 뇌리에 문득문득 떠오르며 민주를 따라다닌다. 

민주는 누군가가 다가와 손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터널 끝의 희미한 빛을 향해 어두움에서 헤매는 노처녀였다. 아이스크림 가게와 옷 가게를 전전하며 불안한 삶을 하루하루 버티며 예비 선거와 총선거 당일 직원으로 한 해에 두 번 여러 해 동안 일했다.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이지만, 적지 않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두 날 만큼은 빼먹지 않고 일했다. 


오래전 11월 초, 화요일 총선거 날이었다. 퀸스 초대 교회 근처 어느 고등학교 투표소로 기억한다. 민주는 그날 그곳에서 선거 당일 직원으로 나온 정희를 만났다. 둘의 나이가 비슷해서였는지 선거 오전 중 이미 통성명을 트고 친해졌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러 나갔다. 바윗돌 같은 주황색 가방이 정희의 몸을 누르고 뒤로 밑으로 당기며 그녀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정희는 무너지지 않을 자세로 어깨를 구부리고 백팩을 끌어당기며 보폭을 넓게 내디뎠다. 민주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뭔가 이상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정희는 가방이 자기의 분신인 양 옆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새벽부터 찬 공기를 씐 둘은 몸을 녹이려는 듯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동시에 짬뽕을 외쳤다. 민주는 양이 너무 많아 반도 못 먹고 남겼다. 정희는 며칠을 굶은 듯 국물 한방을 남기지 않고 베큠처럼 흡입하듯 단숨에 먹어 치웠다. 정희의 시선이 민주의 남겨진 붉은 짬뽕에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꽂혀 있었다. 민주는 정희의 식욕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다. 먹기 전에 덜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정희는 잘 먹지 못하는 민주가 안타까운 것인지 남겨진 짬뽕이 아까운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짬뽕을 순식간에 해치운 정희의 손이 가방끈을 꽉 잡고 있었다. 민주는 궁금해서 묻지 않을수록 없었다.

“왜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녀요?”

“이 가방 안에는 나의 중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요.”

“중요한 물건이라면 더욱더 집에 둬야지. 들고 다니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무겁지 않아요?”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데 내 물건을 뒤지고 손대는 것 같아요. 무겁지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민주는 ‘주황색 백팩이 당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며 육신을 변형시킬 텐데.’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주황색 백팩을 당연히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로 굳어진 정희의 비쩍 마른 몸과 어두운 표정은 그녀를 만난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는 백팩의 무게에 짓눌린 정희의 모습이 안쓰러운 반면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워 전화번호를 서로 교환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가는 화창한 어느 봄날, 민주는 정희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웠다. 한편으론 ‘여전히 주황색 백팩을 또 매고 나올까?’ 궁금했다. NYU 캠퍼스 워싱턴 스퀘어에서 만났다. 민주는 봄볕에 달구어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멀리서 주황색이 세월의 때가 묻어 갈색이 된 백팩을 메고 구부정하게 걸어오는 정희를 금방 알아봤다. 정희는 가방이 편하도록 벤치에 기대놓고 자신은 의자 끝에 히프를 얹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쑥스러운 표정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둘은 별 변화가 없는 그렇고 그런 희망 없는 지난 삶을 주고받았다. 정희는 민주와 친해지고 싶은지 이야기에 열중했다. 반면에 민주는 계속 정희의 백팩에 눈을 주고 있었다.

“백팩이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아요.”

민주가 용기 내어 정희에게 물었다. 

“남편과 이혼한 서류를 가방에 넣었더니. 무게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별반 없는데.”

“결혼했었어요? 나는 싱글인 줄 알았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그냥 결혼했었어요. 이혼을 해주지 않아 미루다가 드디어 얼마 전에 서류 정리가 끝났어요. 내 삶은 그야말로 드라마보다 더 파란만장해요.”

민주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듣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지난 삶의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서 먼 곳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척했다. 말 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희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전라도 산골의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어요, 아래로 다섯 명의 동생이 밥 달라고 아우성들이었지요. 중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일을 거들다 내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공장 다니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친구 따라 평택 미군기지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미군을 만나 결혼하고 조지아로 왔어요. 미국 하면 화려하고 좋은 줄만 알았지 그렇게 깡시골에서 많은 식구와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줄은 몰랐어요. 시집 식구들이 득시글 모여 으르렁거리며 사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내 팔자려니 생각하고 부지런히 살려고 했는데 그만. 남편은 술만 마시면 화냥년이라며 저를 때렸어요. 보시다시피 제 얼굴이 조금 반반하지 않나요?”


민주가 이야기를 듣고 정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드문드문 있긴 하지만 시골 처자치고는 흰 피부, 짙은 쌍꺼풀의 큰 눈, 적당히 솟아오른 코, 뚜렷한 인중아래 입술은 얇아서 말할 때 떨리는 듯했다. 꾸미지 않고 질끈 뒤로 묶은 머리털은 거칠었다. 짊어진 가방에서 시선만 떼고 자세히 관찰했다며 예쁜 얼굴임을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몸매 또한 옷만 제대로 걸치고 주황색 백팩 없이 똑바로 섰더라면 팔다리가 길고 균형 잡힌 체형이다. 조상 대에서 외국인과 섞인 혈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중학교 중퇴라는 학벌치고는 앞뒤가 들어맞게 말했다. 허스키 목소리는 쾌활하게 톤을 높였다가 금방 축 처지는 공허한 낮은 목소리로 일관성 없이 수시로 변했다. 그녀의 기분 또한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말을 멈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는가 하면 불안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다든지 뭔가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민주와 눈이 마주치면  씁쓸한 미소를 짓고 깜빡했다는 얼빠진 표정으로 허리를 펴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아마 자신의 지난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한번 열린 정희의 입은 한을 풀듯 이어졌다.


“깡촌에 모두가 얼굴이 검은데 딱 한 사람 나와 얼굴색이 같은 한국인이 20분 정도 걸어가면 동네 번화가에서 태권도장 하는 작은 남자가 있었어요. 키는 작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을 가진 남자였죠. 두들겨 맞고 외로울 때마다 그 태권도장 창문을 통해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기웃거리는 게 그나마 낙이었어요. 그 남자와 한국말 한마디만이라도 섞고 싶다는 희망으로 서성이다가 석양으로 붉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쉬운 듯 자리를 떴어요. 터벅터벅 옥수수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그러고는 매 맞는 생활을 반복했지요. 그 남자도 멍든 얼굴로 그리움을 향한 외로운 몸짓으로 방황하는 나를 눈여겨봤나 봐요. 어느 날 그 남자와 남편 말대로 화냥년이 되었지요. 더 그곳에서 버티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뉴욕으로 도망 왔어요. 계절도 분간 못 하고 하필이면 겨울에 도망칠 생각을 했는지. 뉴욕에 도착하니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는 거예요. ‘저 수많은 빌딩 속에 내 한 몸 누일 곳이 없다.’는 서러움이 복받쳐 많이 울었어요. 


우리 처음 만난 퀸스 잭슨하잇 그 동네, 자매가 사는 아파트에 작은 방 한 칸을 얻었어요. 내가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였겠어요. 술집에서 일했어요. 술대접받는 남자들이 죄다 폭군으로 보였지만, 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어요. 남자들의 손을 보면 남편에게 두들겨 맞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쳐지고 저 손으로 맞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접근하는 남자들이 무서웠어요. 저는 세상 여자는 다 행복하고 나만 불행한 줄 알았어요. 룸메이트를 전전하며 다른 여자들의 삶도 그다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며 위안을 받았지요.


쌀쌀한 초겨울 밤, 일하고 집에 와서 물에 밥을 말아 단무지를 열심히 씹고 있었어요.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자매 중 동생이

“씹는 소리가 왜 이리 요란해요? 조용히 좀 먹을 수 없어요? 남자 친구가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는 데는 너무 민망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기가 막혀서.”

소리 빽 지르고는 문을 꽝 닫는 거예요. 나야말로 너무 놀라 황당했어요. 먹던 밥을 쓰레기통에 조용히 버리고 방에 들어와 숨죽이고 있었지요. 인기척 소리에 문틈으로 내다보니 덩치가 큰 남자가 아파트 문을 나서더군요. 결국 남자 부인이 찾아와 툭하면 나를 구박하던 그녀의 머리끄덩이가 잡히고 울고불고 난리가 몇 날 며칠 이어지다 막을 내렸지요.


자매 중 언니와 함께 7 트레인을 타고 술집으로 출근하는 어느 화창한 저녁이었어요, 그 언니는 식당에서 서버로 밤일했어요. 초저녁, 달리는 트레인 안에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쳐다보던 언니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어요. 

“괜찮아요?” 

내가 물었을 때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으며

“딸아이가 보고 싶어. 아이도 이렇게 해지는 저녁엔 나를 찾을까?” 

“언니 딸 있어요?” 

“웨이트리스를 하며 남편 박사 학위 뒷바라지를 했어. 학위를 받은 남편은 함께 공부하던 여자와 눈이 맞아 이혼을 요구했지. 그리고 딸을 데려갔어. 내 몸에서 냄새나지?”

“무슨 냄새요?”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하니까 몸에 냄새가 배서 아무리 목욕해도 빠지지 않아. 남편이 음식 냄새 나는 내가 싫대.”

눈물이 와락 쏟아져 둘은 손잡고 울었어요. 그 언니는 동생과 다르게 나에게 잘해줬는데.


돈이 조금 모이자, 근처에 아파트를 얻었어요.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파트타임으로 랭귀지스쿨을 다녔어요. 말은 그럭저럭했지만, 읽고 쓸 줄은 잘 못해요. 룸메이트에게 방을 내주고 나는 거실에서 지내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어요. 나만 불행 한 팔자라며 한탄했는데 들어오는 룸메이트마다 어찌나 사연이 많던지. 룸메이트와 살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니라 그들도 어려운 삶을 사는구나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을 터득했지요.


남편과 싸우고 집 나온, 틀어 올린 숱 많은 머리 아래에 뽀얀 얼굴을 우아하게 치켜들고 거울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던 룸메이트가 있었어요. 정말 거짓말 보태지 않고 자기 얼굴에 자기가 반한 표정으로 온종일 거울 앞에 앉아 있었어요. 내 얼굴에 은하수 길처럼 쫙 깔린 기미의 크기가 줄어들었나 확인하고 싶어 그녀가 거울 앞을 뜨기를 기다리곤 했었지요. 인물이 반반해서인지 저녁마다 왼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데려갔던가? 그녀의 내연남이 데리고 갔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녀가 떠나고 야채 가게에서 일하는 룸메이트가 들어왔어요. 일 끝나고 집에 올 때마다 상추를 잔뜩 가져왔어요. 상추에 밥을 얹고 그 위에 된장을 발라 우적우적 소리 나게 씹곤 했지요. 상추 씹는 소리에 부엌을 들여다보면 

“언니, 나는 세상에서 상추가 제일 맛있어요.” 

하며 미안한 듯 웃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소리 내서 먹어도 괜찮아.” 

상추 씹는 소리가 그녀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호소하듯 어찌나 슬프게 들리던지. 내 백팩에는 나의 이런저런 기억들도 들어있어요. 그래서 무겁지 않아요. 습관이 되어 별 불편함도 없어요. 이 백팩을 잊어버리면 제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끌고 다니는 거예요.”


정희가 시민권을 받기 전, 민주에게 미국 이름 짓는 것을 도와달라며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노아 어때?” 

정희의 말에 민주는 

“노아의 방주가 생각나네. 글쎄 종교적 색채가 있어서 좀. 혹시 교회 다녀?”

“아니. 그럼, 놀마는 어때?”

“노아보다는 놀마가 괜찮은 것 같은데. 놀마(Norma) 뜻은 찾아봤어?”

“확실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어로 ​​standard, pattern, rule이라는데. 나 과거는 다 잊고 미국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

민주는 정희의 정상적이라 말을 듣는 순간 주황색 백팩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주황색 백팩은 편한 자세로 침대 곁에 누워있었다. 


정희가 놀마로 이름을 바꾸고 시민권 받은 날 민주에게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축하주를 마시자며 놀러 오라고 했다. 민주가 찾아간 곳은 차이나타운 근처 술집이었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주춤했다. 창문을 통해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에서 놀마가 짧은 검은 치마와 가슴이 거의 드러나는 검은 레이스 배꼽티를 입고 바삐 움직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놀마의 검은 실루엣과 함께 주황색 백팩이 오버랩되어 아른거렸다. 놀마의 등에 업혀 바래고 피곤해진 무기물인 주황색 백팩이 생명체를 띄며 이제는 그만 등에서 내려서 쉬고 싶다고 진지하고 묵직한 표정으로 민주에게 하소연하는 듯했다. 쿵 하고 머리를 치고 뭔가가 빠져나가는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민주도 주황색 백팩처럼 놀마로부터 도망쳐 멀리 가고 싶었다. 문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술집을 뒤로한 채 그림자처럼 골목을 뛰쳐나왔다.

엄마의 치마 속

“Hi, I remember you.” “미안.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가에게 ‘I am from my mother’s belly.’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꽤 인상적이어서 너를 기억해요.” “어! 그랬어요. 크루즈에 몇몇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