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7, 2026

서로 다른 선로 위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습관처럼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공원을 걷고 있었다. 친구가 뉴욕의 제철 음식이라며 게장을 맛있게 먹는 인스타그램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게장 안 좋아해? 요즘 나는 게가 당기는데.”
친구의 게장 타령을 듣던 중, 친정아버지의 게장 사건이 떠올랐다.
서울 친정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냉장고 문을 열고,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다. “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 맞춰봐라.” “뭔데요? 김치통이잖아요.” 통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싱싱한 게들이 검은 간장을 비집고 흰 배와 집게다리를 내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와! 이렇게나 많이 담그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 오면 먹으려고 했는데.” “네가 무척이나 좋아했잖니. 미국에서는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만들어 놨다. 실컷 먹고 가라. 그런데 일하는 아줌마가 없을 때 먹어라. 알면 죄다 먹어 치운다. 맛있는 건 냉장고에 넣기가 무섭게 사라지거든. 치사하게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줌마 모르게 아버지가 게장을 만드신 거예요?”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네가 먹고 싶은 것 다 해줬을 텐데……. 게 장수 아주머니가 지나가길래, 게장을 담가주는 조건으로 가져온 게를 몽땅 떨이하고 하루 일당까지 쥐여주며 담가달라고 했다. 너 혼자서만 먹어라. 알았지? 일하는 아줌마에게는 비밀이다.” “아줌마가 냉장고 청소할 때 이미 알았을 텐데 어떻게 숨기고 혼자 먹어요. 그리고 저 많은 것을 다 어떻게 해요.” “글쎄,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니까. 지난번에 네가 서울에 왔을 때도 내가 너에게 개고기를 먹이려고 애썼는데, 네가 먹지 않자 아줌마가 다 먹어 치웠다. 너 이따가 아줌마 청소하러 오면 놀랄 거다. 얼마나 살이 쪘는지. 너를 살찌우려는데 아줌마가 다 먹어 치우니 이번엔 나도 머리 좀 굴렸다. 너 미국에 들어갈 때까지 살 좀 찌워서 보내려고. 그렇게 말라서야 어떻게 험한 뉴욕에서 공부할 수 있겠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었다가 가라.”

유학 시절 서울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가는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나뭇가지에 작은 여자용 핸드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있다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그냥 갈까, 말까 고민하려던 찰나, 중고등학교 친구 남선희가 들려준 경험담이 떠올라 나도 그녀와 똑같이 해보기로 했다.

핸드백 주인을 기다리면서 친정아버지와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차라리 아버지가 게장 잘하는 식당으로 데려가 서너 번 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게장을 이토록 많이 담가놓고 아줌마 몰래 먹으라니, 오히려 내가 아줌마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눈치 빠른 아줌마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뉴욕으로 돌아가면 간장에 푹 절여진 채 남은 게장을 독차지하려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버지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야 하는데 예전만큼 먹히지 않았다. 마침 아버지가 여자친구와 함께 시골집에 간 사이, 아줌마도 쉬겠다고 집을 비웠다. 그 순간 나에게 핸드백 이야기를 해주던 친구 선희가 게장을 참 좋아했다는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선희와 나는 중고등학교 동기이기도 하지만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할머니와 나의 친할머니는 쌍둥이였다. 그녀의 할머니는 남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나의 할머니는 이씨 집안과 결혼한 것이다. 가깝다면 꽤 가까운 사이다. 그녀가 나와 함께 게장을 먹었다고 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터였다.

커다란 게장 통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게장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냉큼 달려왔다. “와, 게장이 이렇게나 많아?” 우리는 흰쌀밥을 곁들여 게장을 쪽쪽 빨아 먹느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먹기에 바빴다. 희고 고운 얼굴에 간장이 튀어도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는 선희를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사심 없는 애를 밀어내며 친해지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향했던 나의 엇나간 묘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평상시의 우아한 자태와는 달리 배를 가득 채운 선희는 방바닥에 벌렁 눕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얼마 전에 집에 가다가 동네 벤치에서 작은 백을 발견했잖아. 어떡할지 망설이다가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고. 혹시 연락처라도 있나 싶어 안을 뒤져봤더니 열쇠와 돈만 나오는 거야. 집에 갔다가 열쇠가 없다는 걸 알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계속 기다렸지.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라고. 직감적으로 가방 주인이라는 걸 알았지. 백을 들고 흔들며 아는 척을 하려다가, 혹시 모르니까 그 여자가 와서 백을 찾을 때까지 가만히 있어 봤어.” “혹시 작은 백 보지 않으셨어요?” “이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찾으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아, 고마워라! 정말 고마워요.”

‘선희는 마음씨도 곱고 머리도 좋구나. 그러니 반장을 6년씩이나 했지.’ 나는 그런 선희를 제대로 알고 친해지기도 전에 그녀의 엄마를 먼저 싫어했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엄마는 학교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치맛바람을 휘날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업 간부였지만, 나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같은 기차선로 위에 있는 줄 알았던 우리의 운명은, 서로를 깊이 알아가기도 전에 이미 다른 선로로 갈아타고 각자의 길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장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말고는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며, 내가 먼저 그녀를 밀어냈었다.

선희는 나와 반대로 키가 크고 귀티가 나는 고운 흰 얼굴을 가졌다.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꼭 엄마의 치맛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아이들을 이끄는 통솔력이 있었고 다들 선희를 잘 따랐다. 반면 나는 단 한 번도 학교에서 ‘장’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다. 미화부에서 회계를 맡았다가 돈을 몽땅 잃어버려 아버지가 대신 물어주었던 쓰라린 기억만 있을 뿐이다. 집안 모임에서도 친척들은 선희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나는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당했다. 그녀는 명문 여자 대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전기 입시에서 떨어져 후기인 남녀공학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 궤도는 더욱 멀찍이 갈라졌다.

선희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모의 영향력 덕분에 사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장사꾼인 나의 아버지는 그런 힘이 없었기에 나는 취직을 못 하고 한동안 방황했다.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으로 1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운 좋게도 집에서 가까운 동부이촌동의 공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무렵 선희가 엄마의 연줄로 집안 좋은 남자와 데이트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선희처럼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오종종한 외모 때문인지 선뜻 다가오는 남자가 없었다. 중매를 통해 만난 한 의사는 내가 아파트 한 채는 얹어 와야 저울추가 평행하다며 노골적으로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 “너 아파트 한 채 얹어서 의사랑 결혼할래? 아니면 그 돈으로 유학을 갈래?” 아버지는 내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심각한 얼굴로 물으셨다. “유학 갈래요.”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키 큰 미국 사람들은 키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해. 미국에서 네 짝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아냐. 결혼을 못 한들 어떠냐, 자유롭게 살아라.”

그녀와 게장을 먹고 난 얼마 후, 선희가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집안 좋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왜 선희는 나와 함께 게장을 먹으면서 곧 있을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백을 찾아준 이야기만 나누다 헤어진 것일까. 물론 나 역시 뉴욕에서 보낸 첫 학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추측해 보건대 서로 다른 길로 치닫는 일치하지 못할 대화는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친척 모임에 가기 꺼려하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결혼식만큼은 꼭 가야 한다며 나를 앞장세우셨다. 호텔에서 열린 성대한 결혼식에서 나는 친척들의 눈치를 살피며 맨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말 선남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화려한 결혼식이었다. “아버지, 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피로연 식당에는 가지 않을래요.” 아버지도 내 기분을 눈치채셨는지 돈을 한 움큼 쥐여주며 친구들 만나서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하셨다.

선희는 희고 귀티 나는 얼굴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가는데, 나는 오종종한 얼굴과 짧은 다리로 제자리걸음을 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뉴욕에서 싱글로 어정거리고 있을 때, 선희는 은퇴한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남매를 키워냈다. 나는 결혼도 늦었고, 결혼 후 4년이 지나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다. 내가 홀로 아이를 키우며 끙끙대는 사이, 선희는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은 의사가 되었고 딸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친정엄마처럼 교장이 되었다. 선희의 길은 늘 순조로웠고, 나의 길은 늘 힘들게 돌아가야만 했다.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라는 말이 있다. 실망하지 않고 기다리며 노력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낯선 여정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 더 나은 목적지에 도달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끌어안은 채,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삶은 발버둥 칠수록 더욱 피곤해질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신장 검사를 위해 CT 스캔을 받게 되었다. 검사 전 간호사가 가려움증이나 두드러기, 호흡곤란 같은 조영제 알레르기 부작용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맞아본 적이 없던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주사를 맞고 스캔이 시작되자마자 귀와 목이 격렬하게 가렵기 시작했다. 갑자기 검사실이 술렁이더니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겠다며 다급히 뛰어나갔다. 곧이어 또 다른 간호사와 의사가 들이닥쳤다. 오른쪽 목젖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가 이것저것 묻는 사이, 간호사 한 명은 아예 내 곁에 붙어 쉴 새 없이 혈압을 쟀다. 혈압은 급격히 올랐고 목은 점점 더 조여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목젖에 무거운 걸쇠가 채워진 듯 숨이 막혀 헉헉댔다. 간호사가 물을 마시라고 권했지만, 물은커녕 침 삼키기조차 불가능해졌다. 또 다른 의사가 급히 달려와 알레르기 치료제인 베나드릴 주사를 놓았다. 남편이 호출되었고, 나는 응급 침대에 뉘어 급박하게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순간, ‘죽음이 이렇게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이토록 바둥거리며 세상사 골칫거리들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지금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나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구름 위를 누워가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의식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바삭거리는 응급실의 하얀 시트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콤한 무의식 속에서 의식이 서서히 돌아올 때, 나는 오히려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죽음은 생각보다 감미롭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결국 나는 눈을 떴다. 다시 세상일을 마주해야 했다. 매 순간 긴장하고 타협해야 하는 팍팍한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다는 것, 그것이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남선희는 지금도 여전히 행복할까? 그 행복에 취해 영원히 살고 싶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비로소 놓아버린 것은 생명이 아니라, 평생 나를 옭아매던 비교와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깨어난 뒤에도 세상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작 달라져야 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On Different Tracks

Rain or shine, I walked through Riverside Park on Manhattan's Upper West Side as I always did. One day, a friend texted me an Instagram photo of gejang—Korean soy-marinated raw crab—calling it one of New York's seasonal delicacies.

"Don't you like gejang? I've been craving crab lately."

Her message instantly brought back a memory of my father and his unforgettable gejang.

The moment I stepped into my parents' house in Seoul, my father opened the refrigerator door and, as if someone might overhear us, whispered conspiratorially,

"Do you know what's in there? Go ahead—guess."

"What is it? It looks like a kimchi container."

I took out the large container and lifted the lid. Fresh crabs lay submerged in dark soy sauce, their white bellies and claws peeking through the rich brown marinade. My mouth immediately began to water.

"Wow! You made all of this? I was actually looking forward to eating gejang while I was in Seoul."

"I know how much you love it. I figured you couldn't get anything like this in America, so I had it made just for you. Eat as much as you want. But only when the housekeeper isn't here. If she finds out, she'll finish every last crab. The minute something delicious goes into the refrigerator, it mysteriously disappears. I can't exactly tell her not to eat it—that would be too petty."

"So you made all this without her knowing?"

He smiled.

"If your mother were still alive, she'd have cooked everything you ever wanted." His voice softened. "A woman selling fresh crabs happened to pass by, so I bought every crab she had left. Then I even paid her a day's wages to marinate them for me. These are for you—and only you. Promise me you won't tell the housekeeper."

I laughed.

"She probably already knows. She cleans the refrigerator. Besides, how am I supposed to hide this much gejang from her? And there's no way I can finish all of it."

"Just do as I say." He waved his hand impatiently. "Last time you came to Seoul, I tried so hard to get you to eat dog meat, but you wouldn't touch it. The housekeeper ended up eating every bite. Wait until she comes to clean later—you'll be shocked at how much weight she's gained. I'm trying to fatten you up, but she keeps eating all the good food instead. This time I outsmarted her. I want you to put on some weight before you go back to America. You're far too skinny. How can you possibly survive studying in tough old New York looking like that? Don't worry about anything while you're here. Just rest, eat well, and take care of yourself."

Lost in the memory of that conversation from my graduate-school days, I kept walking until I reached the entrance to the park near my apartment.

Something hanging from the branch of a tree caught my eye.

It was a small woman's handbag, dangling gently from a low branch. Someone must have left it behind only moments earlier after resting in the shade.

Should I keep walking? Or should I wait?

As I hesitated, a story my high school friend, Nam Sunhee, had once told me came rushing back. Without thinking any further, I decided to do exactly what she had done.

While waiting for the owner of the handbag, my thoughts drifted back to my father once again.

Honestly, it would have been much easier if he had simply taken me to a good gejang restaurant a few times. Instead, he had gone through all the trouble of preparing an enormous container of gejang and insisting that I eat it in secret whenever the housekeeper wasn't around. Before long, I found myself worrying more about her feelings than enjoying the food.

She was far too sharp not to know what was hidden in the refrigerator. In fact, I suspected she was patiently waiting for me to return to New York so she could have the leftover crabs all to herself after they had soaked even longer in the soy sauce.

I wanted to eat more to honor my father's love, but I simply couldn't eat as much as I had when I was younger.

One day, my father left for his country house with his girlfriend, and the housekeeper decided to take the day off as well.

The empty house suddenly stirred another memory.

It reminded me of Sunhee—the friend who had once told me the story about the lost handbag, and who happened to love gejang just as much as I did.

Sunhee and I were not only classmates throughout middle and high school—we were also relatives. Her paternal grandmother and mine were identical twins. Her grandmother had married into the Nam family, while mine had become part of the Lee family. By Korean standards, we were close enough to be considered family. I knew my father would be delighted if he heard that Sunhee and I had shared the gejang together.

I stood staring at the large container of marinated crabs for a while before picking up the phone. Knowing how much she loved gejang, I invited her over.

She arrived almost immediately.

"Wow! That's a lot of gejang!"

We sat down with bowls of steaming white rice and became so absorbed in sucking every bit of sweet flesh from the crab shells that we hardly exchanged a word.

As I watched soy sauce splatter across Sunhee's fair, delicate face without her caring in the least, I found myself wondering, Why had I kept someone so genuine at arm's length? The vague resentment I had carried toward her for so many years quietly began to dissolve.

After eating her fill, Sunhee—so elegant and poised in everyday life—flopped onto the floor with complete abandon and began telling me a story.

"The other day, I was walking home when I noticed a small handbag sitting on a bench in my neighborhood. I wasn't sure what to do, but I decided to wait until the owner came back. After a long time, no one showed up. I looked inside to see if there was any contact information, but all I found were some keys and a little cash. Then I thought, 'Whoever owns this bag is bound to realize the keys are missing and come back.' So I kept waiting.

"Sure enough, after a while I saw a woman running toward the bench in a panic. I knew immediately she had to be the owner. At first I almost waved the bag at her, but then I thought I'd better wait until she actually asked for it."

"Excuse me... have you happened to see a small handbag?"

"Do you mean this one? I've been waiting here for you to come back."

"Oh, thank goodness! Thank you so much!"

As I listened, I couldn't help thinking, Sunhee really is kind-hearted—and clever. No wonder she was class president for six straight years.

Yet before I had ever taken the time to know her, I had already decided I didn't like her because of her mother.

Her mother, an elementary school principal, was constantly coming and going from the school, wielding considerable influence over teachers and administrators. Her father was an executive at a large corporation. My father, on the other hand, was a businessman, and my mother was an ordinary homemaker.

What I hadn't realized then was that although Sunhee and I appeared to be traveling on the same railway line, our lives had already switched onto different tracks long before we truly came to know each other.

Other than our shared love of gejang, we seemed to have nothing in common, and it was I who had pushed her away first.

Sunhee was everything I was not. She was tall, graceful, and strikingly fair, with an air of quiet elegance. For six consecutive years, she served as class president—not merely because of her mother's influence, but because she possessed a natural ability to lead. Everyone admired and followed her.

I, on the other hand, had never once held a leadership position. The only responsibility I had ever been given was keeping the accounts for the classroom beautification  committee, and I managed to lose all the money. My father had to repay it for me—a humiliation I never forgot.

At family gatherings, relatives showered Sunhee with praise while I faded into the background, almost invisible.

She entered one of Korea's prestigious women's universities. I failed the first round of college admissions and ended up enrolling in a coeducational university through the second-round admissions process.

From that point on, our lives drifted even farther apart.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Sunhee quickly secured a teaching position at a private middle school, thanks in large part to her parents' connections.

My father, a merchant with no influential network, couldn't open doors for me. I spent months wandering without a job before realizing that if I wanted a future, I would have to build it myself. I devoted an entire year to preparing for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fortunately, earned a position teaching at a public middle school in Dongbu Ichon-dong, not far from my home.

Around that time, I heard that Sunhee was busy dating a well-connected young man through introductions arranged by her mother.

I wanted that kind of romance too. I wanted to fall in love, marry, and begin a family.

But perhaps because I was short and plain-looking, men rarely approached me.

One physician I met through a matchmaker bluntly told my family that the marriage would only be "balanced" if I brought an apartment as part of the arrangement.

One day my father looked at me seriously and asked,

"Would you rather marry a doctor by giving him an apartment... or use that money to study abroad?"

"I'd rather study abroad."

A smile spread across his face.

"I thought you'd say that. Besides, Americans don't care nearly as much about a woman's height. Who knows? Maybe the person meant for you is waiting somewhere in America. And even if you never marry, so what? Live your life freely."

Not long after we shared that meal of gejang, I received Sun-hee's wedding invitation. She was marrying a man from a distinguished family—a graduate of prestigious schools who worked for one of Korea's largest corporations.

Why hadn't she mentioned her upcoming wedding while we sat together eating gejang? Had we spent the entire afternoon talking only about the lost handbag? Then again, I hadn't told her much about my first semester in New York, either. Looking back, perhaps we both sensed that our lives were already moving in such different directions that there was little point in talking about the roads that no longer crossed.

My father knew how uncomfortable I felt at family gatherings, yet he insisted that I attend her wedding.

"You have to go," he said.

The ceremony, held in a grand hotel ballroom, was magnificent. I quietly slipped into a seat in the very last row, trying not to draw the attention of our relatives. The bride and groom looked as though they had descended from heaven—a picture-perfect couple, radiant beneath the chandeliers.

When the ceremony ended, I turned to my father.

"Dad, I have somewhere else to be. I don't think I'll stay for the reception."

He seemed to understand exactly how I felt. Without saying much, he pressed a handful of money into my hand and told me to go meet my friends and enjoy myself instead.


In my mind, Sunhee was always striding confidently ahead with her long legs, her elegant bearing, and her luminous face, while I remained where I was, taking short, hesitant steps that never seemed to carry me very far.

While I wandered through New York as a single woman trying to find my place, Sunhee was raising a son and a daughter with the help of her retired mother.

I married much later than she did, and even after my marriage, four years passed before I finally had my first child.

While I struggled to raise my child largely on my own, I heard that Sunhee had already bought an apartment in Gangnam and was steadily climbing the professional ladder. Later came more news: her son had become a physician, her daughter had passed the bar examination, and eventually Sunhee herself became a school principal, just like her mother.

Everything in her life seemed to unfold effortlessly.

Mine always seemed to require a long detour.


There is a saying: "Sometimes the wrong train takes you to the right destination."

I often clung to those words.

Perhaps if I endured disappointment without giving up, if I simply kept going, I would someday arrive somewhere I had never imagined. Perhaps the unfamiliar road would lead me to unexpected people, unexpected joys, and a destination far better than the one I had originally hoped for.

Holding on to that fragile hope, I fought with everything I had, refusing to remain where I was or surrender to despair.

Yet life in New York only grew more exhausting the harder I struggled.


One day, I underwent a CT scan as part of a kidney examination.

Before the procedure, the nurse asked whether I had ever experienced an allergic reaction to contrast dye—itching, hives, facial swelling, or difficulty breathing.

"I've never had contrast before," I answered. "I don't know."

The scan had barely begun when my ears and throat started itching intensely.

Suddenly the room became tense.

A nurse rushed out to call the doctor. Moments later another nurse and a physician hurried in. It felt as though the right side of my throat was slowly closing.

As the doctor asked me questions, one nurse remained at my side, checking my blood pressure over and over again.

It kept climbing.

At the same time, my throat tightened even more.


The sensation spread from the right side of my throat to the left, as though a heavy metal clasp were slowly locking around my airway.

I gasped for breath.

A nurse urged me to drink some water, but I couldn't even swallow my own saliva.

Another physician rushed in and injected me with Benadryl.

My husband was called.

I was transferred onto an emergency stretcher and hurried to the emergency room.

At that moment, one thought quietly entered my mind.

So this is how death comes.

Strangely, I wasn't afraid.

Instead, an unexpected calm washed over me.

Perhaps it wouldn't be so terrible to die.

Perhaps it would be easier than continuing to struggle through all the burdens and disappointments of life.

I simply let go.

My body relaxed.

My mind grew light, as though I were floating on a cloud.

Slowly, gently, my consciousness drifted away.

As my fingers absentmindedly brushed against the crisp white hospital sheets, I slipped into a deep, peaceful sleep.

As consciousness slowly returned from that sweet, dreamlike oblivion, I found myself wishing I would never wake up.

Death had been far gentler—far sweeter—than I had ever imagined. It was peaceful.

But in the end, I opened my eyes.

I had returned to the world, where life once again demanded that I confront its endless worries, its constant tensions, and its endless compromises. What I dreaded most was not death itself, but having to step back into that exhausting reality. That was the most honest truth I could admit to myself at the time.

I sometimes wonder about Sunhee.

Is she still as happy as she seemed all those years ago? Has her life been so full of happiness that she still longs to live forever?

Standing at the threshold of death, perhaps what I finally let go of was not life itself, but the comparisons and prejudices that had quietly bound me for so many years.

When I woke, the world had not changed in the slightest.

Perhaps it was never the world that needed to change.

Perhaps it was I.

Monday, May 4, 2026

뉴욕의 유랑자


세상이 잠든 새벽엔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문뜩 어떤 생각이 잠에서 깨게 했다. 떠오른 것을 잊기 전에 적어 놓으려고 일어났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 나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한다. 8층 창밖, 저 멀리 허드슨강이 어둠 속에 침잠해 있다. 흐름마저 멈춘 듯 정적이다. 누군가의 깨어 있는 삶을 증명하듯, 환하게 불을 밝힌 아파트 창들이 밤의 적막을 비집고 나온다.

좁은 길가 맞은편 커튼이 없는 창 안을 들여다봤다. 젊은 남자가 옅은 불빛 아래에 누워있다.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얼굴만 내놓고 잔다. 하얀 이불처럼 얼굴도 무척이나 희다. 늦잠 자는 나의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다가 봤던 모습과 같다. 그는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나 창가 침대에 누워 컴퓨터를 보곤 한다. 밥은 먹고 다시 누운 것인지? 낮과 밤이 바뀐 직장에 근무하는지? 궁금하다. 


그 남자의 위 아파트 창문을 통해 샤워하는 여자가 보인다. 그런대로 보이던 벌거벗은 몸매가 뜨거운 김에 가려 뿌연 모습으로 어른거린다. 샤워 후, 욕조를 닦는 그녀의 몸매는 낯익다.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의 '목욕하는 여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녀의 욕실 불이 꺼지면 나의 시선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눈 둘 곳을 찾아 다른 창가로 옮긴다.


서쪽 큰길 건너 맞은편 건물에 사는 여자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가슴을 내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는 날씨가 따듯한 날이면 창문을 열고 샤워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햇볕 속의 여인’을 실재로 마주하는 기분이다. 나 역시 그녀처럼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아침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방 안만을 서성일 뿐이다.


나는 여자들의 벗은 모습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학창 시절, 순간순간 자세를 바꾸는 누드모델을 즉시 포착해 스케치북에 빠른 속도로 옮기는 크로키를 수도 없이 했다. 내 시선을 끄는 것은 그 벗은 여자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내 창가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아파트 부엌 풍경이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동양 남자가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여닫고 오븐 앞에서 지지고 볶는다. 몸을 숙였다 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부지런히 움직인다. 남자가 상을 차려 놓으면 꽃무늬 잠옷을 입은 퉁퉁한 동양 여자가 등장한다. 둘은 마주 앉아 식사한다. 남자는 오븐 쪽에 앉아 밥 먹다가 수시로 일어나 여자에게 뭔가를 서브한다. 설거지를 하는지 싱크대에 둘이 나란히 한동안 붙어 서 있다. 불이 꺼진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 커튼이 내려지듯 그 아파트 창안 풍경이 적막하게 사라진다.


검은 티셔츠를 입고 음식을 만드는 남자는 날렵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짝사랑한 검정 터틀넥을 자주 입던 남자 얼굴로 상상한다. 다 차려 놓은 밥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꽃무늬 잠옷을 입은 퉁퉁한 여자는 내가 싫어하는 친구의 못생긴 얼굴로 상상한다. 나와는 달리 부엌에 들락거리지 않는 그 여자가 내심 부럽기도 하지만 왠지 싫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 부엌 창문 한 면에 가림막이 쳐졌다. 나의 시선을 눈치챘나? 하지만 나는 습관처럼 그 집 창을 흘금흘금 쳐다보며 또 다른 상상에 빠진다.


아주 오래전 나는 맨해튼 차이나타운 근처 그랜드스트릿에 있는 7층 건물 2층에 살았다. 아침에 7층 바느질 공장으로 올라가는, 낡고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에 잠에서 깬다. 우리가 사는 2층을 지날 때 요란했던 소리는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물속에 잠기듯 사라진다. 나는 다시 잠이 든다. 저녁엔 또다시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는 점점 요란해지면서 내려와 우리 층을 지날 때는 마치 폭풍이 스쳐 지나가듯 요란하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과 합류해 저녁 찬거리를 사러 차이나타운으로 나갔다.


내가 이 7층 건물로 이사 오기 전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결혼 선서만 하고 떨어져 살았다. 남편은 그의 룸메이트와 나도 룸메이트와 퀸스에서 살았다. 소호가 지금처럼 번창하기 전, 맨해튼 SoHo 및 NoHo 지역 내 ‘예술가들은 뉴욕시에서 주거 겸 작업 공간(JLWQA)’에 대한 뉴욕시 예술가 인증인 Artist Certification을 뉴욕시 문화국(DCLA)에서 발급받았다. 남편도 1982년에 발급받아 룸메이트와 빈 창고 건물 안에서 작업하며 생활했다. 변변한 직업이 없던 우리 화가 부부는 함께 살 형편이 되지 않아 결혼 전에 살던 대로 떨어져 살았다.


6개월쯤 지난 후, 남편의 룸메이트가 그랜드스트릿에서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작업실의 한쪽은 룸메이트가 다른 한쪽은 우리 부부가 썼다. 각자 공간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침실이 있었다. 우리 침실 구석에는 이전에 살다 나간 사람이 두고 간 드럼, 북 등 타악기들이 쌓여 있었다. 악기 더미 곁에 누워 있노라면, 떠돌이 곡마단 원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피로에 지쳐 천막 구석에 몸을 뉘어 쉬는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언제나 이 방황이 끝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으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화가와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집세 천불을 우리 부부가 육백 불 룸메이트가 사백 불 냈다. 우리 침실 밑에는 부엌이 있었다. 한 귀퉁이에 달력을 걸어 놓고 장 볼 때마다 쓴 액수를 적어 놓았다가 셋으로 나눠서 계산했다. 집세와 장 본 값을 계산할 때마다 우리 셋은 이 생활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씁쓸한 미소를 교환하곤 했다. 히팅이 없는 커다란 이 곳에서 겨울엔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는 닥터 지바고를 순간순간 떠올렸다. 내가 주인공 라라만큼 미인이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상상하며 추위에 떨었다. 건물은 낡아서 쥐와 벌레가 많았다. 나는 항상 몸 구석구석을 긁다가 잠이 들곤 했다. 남편은 긁어대는 내가 안쓰러운지 흰 종이를 깔고 천장을 두드려서 벌레를 떨어뜨려 잡아주곤 했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오다가다 들르는 친구들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그들은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있는 때에 찌든 커다란 회색 소파에서 자고 놀며 들락거렸다. 살 장소를 찾을 때까지 몇 달씩 지내는 서울서 온 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스튜디오를 ‘광장교회’(Grand Street에 있다고) 라고 불렀다. 내 남편은 ‘이 목사’ 그리고 우리 룸메이트는 ‘황 장로’라 불렸다. 연말에 그들은 아예 스튜디오로 퇴근하고 출근했다. 그나마 이류 대학을 나온 우리 처지와는 달리 서울대를 나온 황 장로는 동문회 송년 파티에서 먹다 남은 컴파운드 플라스틱 버킷에 가득 든 양념불고기를 들고 왔다. 거기에 김치 한 병만 있으면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더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 그때는 왜 힘들지 않았는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건물 주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았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내러 지하실에 가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큰 소리로 불러야 나타났다. 그가 커다란 장화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와 얼굴을 내밀면 나는 물었다. 

“어둡지 않아요?” “밝으면 콩나물이 빨리 자라서 곤란해”

그는 집세를 받고 인심 쓰듯 콩나물 서너 움큼을 싸줬다. 집세를 내고 나면 땡전 한 푼 없는 우리는 콩나물국, 콩나물무침 그리고 콩나물밥에 파묻혀서도 작업을 고집하며 버텼다. 그러다 매년 올라가는 집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광장동을 떠나야 했다. 생활고에 지친 우리 룸메이트는 다행히도 교수가 되어 서울로 떠났다. 우리 부부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저렴한 거처를 찾아 헤매다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한국 이름은 녹점동) 이스트강 가 끝, 염색 공장 건물에 똬리를 틀었다. 


"한번 사대문을 떠나면 사대문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친정아버지가 서울시 중구 남산동을 떠나 이태원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뱉던 푸념이다. 언제나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과연 나에게 일어날까? 고민하느라 내 몰골은 늘 지옥 풍경을 바라보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과 흡사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Greenpoint)는 '리틀 폴란드'라 불릴 만큼 폴란드계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당시 폴란드 여자들의 주 직업은 맨해튼의 부유한 가정이나 호텔에서 청소 및 가사 관리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남자들은 기계공이나 일반 노동자로 목수, 배관공, 전기 기술자 등 숙련된 건설 노동자가 많았다.


바로 옆 동네 윌리엄스버그에는 초정통파 유대인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검은 옷, 페옷(귀밑머리), 특유의 모자 등 복장을 착용하고 이스라엘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여 외부 기술과 문화를 거부한 채 생활했다. 나는 그 동네에 있는 뉴욕 사에서 운영하는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을 쥐가 곳간을 드나들듯 들락거렸다. 우리 아이 둘은 생후 6개월부터 그곳에서 수영을 배웠고, 초등학교부터는 그곳 수영팀에 있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난 후, 나도 그곳에서 수영했다. 그날은 보통날과는 전혀 다른 날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며 수영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에 노랑 꽃무늬 커튼이 쳐져 안이 보이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락커를 열다 깜짝 놀라 기절할뻔했다. 블론드 가발이 잘린 목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락커마다 여자 가발이 나를 노려보며 차지하고 있었다.


수영장 안에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자들만이 수영복이 아닌 온몸을 가린 긴 치마를 입고 물에 둥둥 떠다녔다. 모두의 시선이 유일하게 수영복 입은 작은 아시아인 나에게 모였다. 전혀 평상시와는 다른 수영장 안 풍경에 몹시 당황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파악하려고 슬슬 수영하며 왔다 갔다 살폈다. 두부처럼 허연 여자가 다가왔다.  

“Do you need a job?”

아니, 이건 또 뭐야? 물속에서 일자리가 필요하냐고 묻다니. 당황하며 머뭇거리다 

“What job?” 

“Cleaning job.”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삐 머리 회전을 시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고 정리했다. ‘유대인 아줌마가 자기 집 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소리다. 이쯤 되면 나도 

“I need a cleaning lady too. (나도 청소하는 사람을 구한다.)”

웃는 얼굴로 받아넘겼다. 두부에 초고추장을 휙 뿌린 듯 홍조 띤 그녀는 언짢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같은 무리에게 둥둥 떠 갔다.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며 저희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물을 뚝뚝 흘리며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알아봤다. 매주 수요일 아침 서너 시간은 하시딕 유대인(Hasidic Jewish) 여자들을 위한 스케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뒤죽박죽 뒤섞여 사는 뉴욕, 그들 눈에 나 또한 낯선 모습이 아닐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몰아내고 싶을까?’ 저희 모습과 다른 아시안과 함께 물속에 몸을 담고 싶든지 말든지 나는 물 위에 누워 천장 스카이뷰를 보며 그들이 나를 밀어내는데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맨해튼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그린포인트에서 나고 자란 나의 두 아들은 그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으면 집을 떠날 줄 알았다. 하지만 힙스터(Hipster)인 양 폼 잡고 젊음을 즐기느라 신이 나서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밥해 주기 싫은 내가 떠날 수밖에 없다. 또한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예전에 우리가 살다 쫓겨난 소호처럼 변했다. 집세가 오르자, 폴란드 이민자들은 퀸스에 있는 리지우드나 매스패스로 옮겨갔다. 그들이 옮겨간 자리에 우리 아이들 같은 전문직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2014년 초 30년을 산 그린포인트를 떠나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로 왔다. 


이사 와서 보니 가격이 높은 홀푸드만 있고 내 수준에 맞는 장 볼 곳이 없었다. 트레이드 조가 가까이에 들어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근처에 오픈했다. 이왕이면 한국 마켓도 들어오라 주문했다. 조금 걸어가야 하지만, H Mart도 들어왔다. 다시 가끔 즐겨 먹는 Shake Sake 햄버거가 들어오기를 바랐다. 드디어 나의 산책로 반경 안에 오픈했다. 이번에는 재미 삼아 코비드 백신 맞은 증명을 보여주면 무료로 도넛을 준다는 ‘krispy kreme 가게야 들어와라.’ 중얼거렸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오픈했다가 몇 년 후 폐점했다. 아쭈, 원하면 다 들어오네. 다시 한번 더, Target이 들어오면 어떨까 했더니만, 떡하니 서너 볼록 떨어진 홀푸드 앞에 오픈했다. 내 사랑 이케아가 들어오기를 원하지만, 넓은 쇼룸을 갖춰야 하기에 힘들 것 같다. 


“엄마, 나 이벤트에 당첨돼서 돈 받았어요.” 

작은 아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도 질세라 위에 열거한 가게들을 말하면서 

“엄마가 원했던 가게들이 동네에 다 들어왔다. 신기하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좋은 작품과 글을 쓰고 싶은 것인데 차마 그렇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울 수가 없구나.” 

“엄마가 원했던 것이 세 가지 이상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안될 거예요.” 

“리필이라는 것도 있는데. 다시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글쎄요. 한 5년쯤 후에나 효력이 발생할지? 시효기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5년 후에 다시 원하는 것을 주문해 보라는 뜻은 그 기간 엄마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충고로 들렸다. 


내가 즐겨 걷는 산책로 중의 하나는 리버사이드 공원을 따라 콜롬비아 대학까지 올라가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젊고 발랄함을 느끼고 싶어서다. 힘든 학업에 시달린 피곤한 모습이긴 해도 싱싱하다. 

“아버지 너무 어린 애들이 많아요. 다른 데로 가요.”

내가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을 즐겨 찾는 친정아버지에게 말할때마다,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싱싱한 에너지를 받아야지. 들어가 차 한잔 마시고 잠깐 앉아 있다가 나오자.”

친정아버지는 비원의 한적한 뜰도 즐기셨지만, 나이 든 사람이 많은 곳엔 가기를 꺼리셨다. 나도 그런 연유에서인지 대학가를 거닐면 젊어진 듯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다운타운 쪽으로 걷다 보면 빈 가게가 눈에 띄게 하나둘씩 늘어난다. 팬데믹으로 온라인 쇼핑이 성행하자 급격하게 늘었다. 빈 가게를 하나둘 세면서 남의 일이 아닌 듯 씁쓸한 심정으로 힘 빠진 다리를 옮긴다. 빈 가게 앞, 바람에 날려 쌓인 너저분한 귀퉁이에 홈리스가 적선하라며 앉아 있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요즈음 그들도 예전보다 수입이 줄었겠다. 내 주머니 역시 현찰도 없고 동전 만져 본지가 한참 됐으니. 


어느 따뜻한 해 질 녘, 노을빛이 나를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목적도 없이 콜롬비아 대학 쪽으로 걸어 올라가 내려오는데

“와우 네가 입은 옷 멋져요.” 

뒤에서 백인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여자를 쳐다봤다. 엄청 멋쟁이다.

“너야말로 멋지게 옷을 입었네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만나서 차라도 마시면 어때? 네 전화번호 줄 수 있어요?”

혹시 레즈비언이 아닐까? 오해할 만큼 적극적이다.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줬다. 그녀는 디자이너로 오래전 유대인 의사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의 이혼 사유는 남편이 부인과 아이들보다 부모와 쌍둥이 동생을 먼저 챙기는 것을 참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개인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그녀의 모습에 꽤 흥미를 느꼈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매력적인 싱글이다. 옷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겹겹이 입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한 차림새다. 그 여자 자체가 움직이는 예술 작품이다. 

“여자가 로맨스를 잃으면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진다.” 

라고 종종 말하던 친정아버지 말씀이 떠오를 만큼 그녀의 모습 또한 로맨틱하다. 


늦게 일어나는 그녀가 나에게 거의 매일 문자메시지를 한다. 일찍 일어나는 내가 문자메시지를 하면 그녀는 자느라고 바로바로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책이 끝나면 장도 보고 댄싱 클래스도 가고 동네 이벤트에도 함께 참여한다. 그녀가 소개해 준 친구들도 거의가 유대인 예술가다. 

“어쩌다가 둘이 만났어?”

그녀의 친구들이 물을 때마다 내가 입을 때기도 전에 그녀는 

“내가 길에서 보고 쫓아가서 친구 하자고 했어” 

나는 그녀가 나를 chasing 했다는 말에 만족하며 콧대를 높이고 한마디 거든다.

“그날 우리는 저녁노을 빛에 홀려 친구가 되었어”.

그녀의 친구 중 제임스라는 30살 먹은 변호사 게이 남자가 있다. 

“어떻게 젊은이와 친구 사이가 됐어?” 내가 물었다. 

“그가 건널목 맞은편에서 오는 데 너무 멋있어서 내가 쫓아가서 친구 하자고 했어.”

그녀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쫓아가서 친구하자고할만큼 밝고 자신감이 넘친다. 함께 걷다 보면 서너 번은 멈춰야 한다. 지나가는 개을 쓰다듬어야 하고 이웃들과 인사하며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드느라.


어퍼웨스트에 사는 리버럴 유대인들은 나의 옛 동네 윌리엄스버그 하시딕 유대인과는 전혀 다르다. 

“내 조상들은 옛날 옛적에 엘리스 아일랜드로 들어왔어. 그때 처음 이민해 온 할아버지는 이탈리아를 너무 좋아해서 이탈리아 성 Pasqua라고 바꾸었어. 그 이후 후손들이 성 스펠링을 조금씩 바꾸다가 내 라스트 네임은 Pasco가 되었지. 내 조상들은 1차 대전 전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나치에 대한 감정도 다른 유대인처럼 심하지 않아.”

내가 종교가 없듯이 그녀도 회당(Synagogue, 시나고그)에 참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80가와 브로드웨이에 있는 제이바스(ZAbar’s)에 자주 가서 찬거리를 산다. 그녀가 해 먹는 음식 조리법을 말해줘서 나도 해 먹는다. 대부분 내 입맛에도 맞는다. 이번 페스오버에는 Matzos를 해 먹으며 유대인 문화를 체험했다.


어린아이 모두가 그러하듯 나도 어릴 적엔 새처럼 날고 싶었다. 물 위에 누워 하늘을 보고 두 팔로 물을 저으면 나르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며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을 들락거렸다. 그러고는 수영장 물에 함께 몸담기를 거부하는 하시딕 유대인들에게 밀려났다. 그들의 배타적인 물결에 아집으로 맞서 역행했다면 나는 허우적거리다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물살을 거스르기보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자 비로소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물의 순리는 나를 어퍼웨스트사이드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색채의 유대인 친구를 만났다. 


길었던 유랑의 끝에 나는 물결을 거스르며 힘을 빼는 대신,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새로운 인연들과 함께 인생이라는 파도를 즐기고 있다. 과거의 결핍은 현재 풍요로운 관계를 알아보는 눈이 되었고, 그 눈으로 바라보는 뉴욕의 새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서로 다른 선로 위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습관처럼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공원을 걷고 있었다. 친구가 뉴욕의 제철 음식이라며 게장을 맛있게 먹는 인스타그램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게장 안 좋아해? 요즘 나는 게가 당기는데.” 친구의 게장 타령을 듣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