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든 새벽엔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문뜩 어떤 생각이 잠에서 깨게 했다. 떠오른 것을 잊기 전에 적어 놓으려고 일어났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 나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한다. 8층 창밖, 저 멀리 허드슨강이 어둠 속에 침잠해 있다. 흐름마저 멈춘 듯 정적이다. 누군가의 깨어 있는 삶을 증명하듯, 환하게 불을 밝힌 아파트 창들이 밤의 적막을 비집고 나온다.
좁은 길가 맞은편 커튼이 없는 창 안을 들여다봤다. 젊은 남자가 옅은 불빛 아래에 누워있다.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얼굴만 내놓고 잔다. 하얀 이불처럼 얼굴도 무척이나 희다. 늦잠 자는 나의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다가 봤던 모습과 같다. 그는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나 창가 침대에 누워 컴퓨터를 보곤 한다. 밥은 먹고 다시 누운 것인지? 낮과 밤이 바뀐 직장에 근무하는지? 궁금하다.
그 남자의 위층 창문을 통해 샤워하는 여자가 보인다. 그런대로 보이던 벌거벗은 몸매가 뜨거운 김에 가려 뿌연 모습으로 어른거린다. 샤워 후, 욕조를 닦는 그녀의 몸매는 낯익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가 즐겨 그리던 여인의 누드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녀의 욕실 불이 꺼지면 나의 시선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눈 둘 곳을 찾아 다른 창가로 옮긴다.
서쪽 큰길 건너 맞은편 건물에 사는 여자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가슴을 내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는 날씨가 따듯한 날이면 창문을 열고 샤워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햇볕 속의 여인’을 실재로 마주하는 기분이다. 나 역시 그녀처럼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아침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프레임 밖의 방 안만을 서성일 뿐이다.
나는 여자들의 벗은 모습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학창 시절, 순간순간 자세를 바꾸는 누드모델을 즉시 포착해 스케치북에 빠른 속도로 그리는 크로키를 수도 없이 했다. 내 시선을 끄는 것은 그 벗은 여자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내 창가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아파트 부엌 풍경이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동양 남자가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여닫고 오븐 앞에서 지지고 볶는다. 몸을 숙였다 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부지런히 움직인다. 남자가 상을 차려 놓으면 꽃무늬 잠옷을 입은 퉁퉁한 동양 여자가 등장한다. 둘은 마주 앉아 식사한다. 남자는 오븐 쪽에 앉아 밥 먹다가 수시로 일어나 여자에게 뭔가를 서브한다. 설거지하는지 싱크대에 둘이 나란히 한동안 붙어 서 있다. 불이 꺼진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 커튼이 내려지듯 그 아파트 창안 풍경이 적막하게 사라진다.
검은 티셔츠를 입고 음식을 만드는 남자는 날렵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짝사랑한 검정 터틀넥을 자주 입던 남자 얼굴로 상상한다. 다 차려 놓은 밥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꽃무늬 잠옷을 입은 퉁퉁한 여자는 내가 싫어하는 친구의 못생긴 얼굴로 상상한다. 나와는 달리 부엌에 들락거리지 않는 그 여자가 내심 부럽기도 하지만 왠지 싫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 부엌 창문 한 면에 가림막이 쳐졌다. 나의 시선을 눈치챘나? 하지만 나는 습관처럼 그 집 창을 흘금흘금 쳐다보며 또 다른 상상에 빠진다.
아주 오래전 나는 맨해튼 차이나타운 근처 그랜드스트릿에 있는 7층 건물 2층에 살았다. 아침에 7층 바느질 공장으로 올라가는, 낡고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에 잠에서 깬다. 우리가 사는 2층을 지날 때 요란했던 소리는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물속에 잠기듯 사라진다. 나는 다시 잠이 든다. 저녁엔 또다시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는 점점 요란해지면서 내려와 우리 층을 지날 때는 마치 폭풍이 스쳐 지나가듯 요란하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과 합류해 저녁 찬거리를 사러 차이나타운으로 나갔다.
내가 이 7층 건물로 이사 오기 전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결혼 선서만 하고 떨어져 살았다. 남편은 그의 룸메이트와 나도 룸메이트와 퀸스에서 살았다. 소호가 지금처럼 번창하기 전, 맨해튼 SoHo 및 NoHo 지역 내 ‘예술가들은 뉴욕시에서 주거 겸 작업 공간(JLWQA)’에 대한 뉴욕시 예술가 인증인 Artist Certification을 뉴욕시 문화국(DCLA)에서 발급받았다. 남편도 1982년에 발급받아 룸메이트와 빈 창고 건물 안에서 작업하며 생활했다. 변변한 직업이 없던 우리 화가 부부는 함께 살 형편이 되지 않아 결혼 전에 살던 대로 떨어져 살았다.
6개월쯤 지난 후, 남편의 룸메이트가 그랜드스트릿에서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작업실의 한쪽은 룸메이트가 다른 한쪽은 우리 부부가 썼다. 각자 공간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침실이 있었다. 우리 침실 구석에는 이전에 살다 나간 사람이 두고 간 드럼, 북 등 타악기들이 쌓여 있었다. 악기 더미 곁에 누워 있노라면, 떠돌이 곡마단 원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피로에 지쳐 천막 구석에 몸을 뉘어 쉬는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언제 이 방황이 끝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으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화가와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집세 천불을 우리 부부가 육백 불 룸메이트가 사백 불 냈다. 우리 침실 밑에는 부엌이 있었다. 한 귀퉁이에 달력을 걸어 놓고 장 볼 때마다 쓴 액수를 적어 놓았다가 셋으로 나눠서 계산했다. 집세와 장 본 값을 계산할 때마다 우리 셋은 이 생활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씁쓸한 미소를 교환하곤 했다. 히팅이 없는 커다란 이 곳에서 겨울엔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는 닥터 지바고를 순간순간 떠올렸다. 내가 주인공 라라만큼 미인이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상상하며 추위에 떨었다. 건물은 낡아서 쥐와 벌레가 많았다. 나는 항상 몸 구석구석을 긁다가 잠이 들곤 했다. 남편은 긁어대는 내가 안쓰러운지 흰 종이를 깔고 천장을 두드려서 벌레를 떨어뜨려 잡아주곤 했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오다가다 들르는 친구들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그들은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있는 때에 찌든 커다란 회색 소파에서 자고 놀며 들락거렸다. 살 장소를 찾을 때까지 몇 달씩 지내는 서울서 온 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스튜디오를 ‘광장교회’(Grand Street에 있다고) 라고 불렀다. 내 남편은 ‘이 목사’ 그리고 우리 룸메이트는 ‘황 장로’라 불렸다. 연말에 그들은 아예 스튜디오로 퇴근하고 출근했다. 그나마 이류 대학을 나온 우리 처지와는 달리 서울대를 나온 황 장로는 동문회 송년 파티에서 먹다 남은 컴파운드 플라스틱 버킷에 가득 든 양념불고기를 들고 왔다. 거기에 김치 한 병만 있으면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더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 그때는 왜 힘들지 않았는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건물 주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았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내러 지하실에 가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큰 소리로 불러야 나타났다. 그가 커다란 장화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와 얼굴을 내밀면 나는 물었다.
“어둡지 않아요?” “밝으면 콩나물이 빨리 자라서 곤란해”
그는 집세를 받고 인심 쓰듯 콩나물 서너 움큼을 싸줬다. 집세를 내고 나면 땡전 한 푼 없는 우리는 콩나물국, 콩나물무침 그리고 콩나물밥에 파묻혀서도 작업을 고집하며 버텼다. 그러다 매년 올라가는 집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광장동을 떠나야 했다. 생활고에 지친 우리 룸메이트는 다행히도 교수가 되어 서울로 떠났다. 우리 부부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저렴한 거처를 찾아 헤매다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한국 이름은 녹점동) 이스트강 가 끝, 염색 공장 건물에 똬리를 틀었다.
"한번 사대문을 떠나면 사대문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친정아버지가 서울시 중구 남산동을 떠나 이태원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뱉던 푸념이다. 언제나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과연 나에게 일어날까? 고민하느라 내 몰골은 늘 지옥 풍경을 바라보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과 흡사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Greenpoint)는 '리틀 폴란드'라 불릴 만큼 폴란드계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당시 폴란드 여자들의 주 직업은 맨해튼의 부유한 가정이나 호텔에서 청소 및 가사 관리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남자들은 기계공이나 일반 노동자로 목수, 배관공, 전기 기술자 등 숙련된 건설 노동자가 많았다. 바로 옆 동네 윌리엄스버그에는 초정통파 유대인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검은 옷, 페옷(귀밑머리), 특유의 모자 등 복장을 착용하고 이스라엘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여 외부 기술과 문화를 거부한 채 생활했다.
나는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을 쥐가 곳간을 드나들듯 들락거렸다. 우리 아이 둘은 생후 6개월부터 그곳에서 수영을 배웠고, 시에서 운영하는 수영팀에 있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난 후, 나도 그곳에서 수영했다. 그날은 보통날과는 전혀 다른 날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며 수영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에 노랑 꽃무늬 커튼이 쳐져 안이 보이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락커를 열다 깜짝 놀라 기절할뻔했다. 블론드 가발이 잘린 목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락커마다 여자 가발이 나를 노려보며 차지하고 있었다.
수영장 안에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자들만이 수영복이 아닌 온몸을 가린 긴 치마를 입고 물에 둥둥 떠다녔다. 모두의 시선이 유일하게 수영복 입은 작은 아시아인 나에게 모였다. 전혀 평상시와는 다른 수영장 안 풍경에 몹시 당황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파악하려고 슬슬 수영하며 왔다 갔다 살폈다. 두부처럼 허연 여자가 다가왔다.
“Do you need a job?”
아니, 이건 또 뭐야? 물속에서 일자리가 필요하냐고 묻다니. 당황하며 머뭇거리다
“What job?”
“Cleaning job.”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삐 머리 회전을 시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고 정리했다. ‘유대인 아줌마가 자기 집 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소리다. 이쯤 되면 나도
“I need a cleaning lady too. (나도 청소하는 사람을 구한다.)”
웃는 얼굴로 받아넘겼다. 두부에 초고추장을 휙 뿌린 듯 홍조 띤 언짢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같은 무리에게 둥둥 떠 갔다.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며 저희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물을 뚝뚝 흘리며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알아봤다. 매주 수요일 아침 서너 시간은 하시딕 유대인(Hasidic Jewish) 여자들을 위한 스케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뒤죽박죽 뒤섞여 사는 뉴욕, 그들 눈에 나 또한 낯선 모습이 아닐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몰아내고 싶을까?’
저희 모습과 다른 아시안과 함께 물속에 몸을 담고 싶든지 말든지 나는 물 위에 누워 천장 스카이뷰를 보며 그들이 나를 밀어내는데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맨해튼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그린포인트에서 나고 자란 나의 두 아들은 그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으면 집을 떠날 줄 알았다. 하지만 힙스터(Hipster)인 양 폼 잡고 젊음을 즐기느라 신이 나서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밥해 주기 싫은 내가 떠날 수밖에 없다. 또한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예전에 우리가 살던 소호처럼 변했다. 집세가 오르자, 폴란드 이민자들은 퀸스에 있는 리지우드나 매스패스로 옮겨갔다. 그들이 옮겨간 자리에 우리 아이들 같은 전문직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2014년 초 30년을 산 그린포인트를 떠나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로 왔다.
이사 와서 보니 가격이 높은 홀푸드만 있고 내 수준에 맞는 장 볼 곳이 없었다. 트레이드 조가 가까이에 들어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근처에 오픈했다. 이왕이면 한국 마켓도 들어오라 주문했다. 조금 걸어가야 하지만, H Mart도 들어왔다. 다시 가끔 즐겨 먹는 Shake Sake 햄버거가 들어오기를 바랐다. 드디어 나의 산책로 반경 안에 오픈했다. 이번에는 재미 삼아 코비드 백신 맞은 증명을 보여주면 무료로 도넛을 준다는 ‘krispy kreme 가게야 들어와라.’ 중얼거렸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오픈했다가 몇 년 후 폐점했다. 아쭈, 원하면 다 들어오네. 다시 한번 더, Target이 들어오면 어떨까 했더니만, 떡하니 서너 볼록 떨어진 홀푸드 앞에 오픈했다. 내 사랑 이케아가 들어오기를 원하지만, 넓은 쇼룸을 갖춰야 하기에 힘들 것 같다.
“엄마, 나 이벤트에 당첨돼서 돈 받았어요.”
작은 아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도 질세라 위에 열거한 가게들을 말하면서
“엄마가 원했던 가게들이 동네에 다 들어왔다. 신기하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좋은 작품과 글을 쓰고 싶은 것인데 차마 그렇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울 수가 없구나.”
“엄마가 원했던 것이 세 가지 이상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안될 거예요.”
“리필이라는 것도 있는데. 다시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글쎄요. 한 5년쯤 후에나 효력이 발생할지? 시효기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5년 후에 다시 원하는 것을 주문해 보라는 뜻은 그 기간 엄마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충고로 들렸다.
내가 즐겨 걷는 산책로 중의 하나는 리버사이드 공원을 따라 콜롬비아 대학까지 올라가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젊고 발랄함을 느끼고 싶어서다. 힘든 학업에 시달린 피곤한 모습이긴 해도 싱싱하다.
“아버지 너무 어린 애들이 많아요. 다른 데로 가요.”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을 즐겨 찾는 친정아버지에게 내가 말하면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싱싱한 에너지를 받아야지. 들어가 차 한잔 마시고 잠깐 앉아 있다가 나오자.”
친정아버지는 비원의 한적한 뜰도 즐기셨지만, 나이 든 사람이 많은 곳엔 가기를 꺼리셨다. 나도 그런 연유에서인지 대학가를 거닐면 젊어진 듯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다운타운 쪽으로 걷다 보면 빈 가게가 눈에 띄게 하나둘씩 늘어난다. 팬데믹으로 온라인 쇼핑이 성행하자 급격하게 늘었다. 빈 가게를 하나둘 세면서 남의 일이 아닌 듯 씁쓸한 심정으로 힘 빠진 다리를 옮긴다. 빈 가게 앞, 바람에 날려 쌓인 너저분한 귀퉁이에 홈리스가 적선하라며 앉아 있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요즈음 그들도 예전보다 수입이 줄었겠다. 내 주머니 역시 현찰도 없고 동전 만져 본지가 한참 됐으니.
어느 따뜻한 해 질 녘, 노을빛이 나를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목적도 없이 콜롬비아 대학 쪽으로 걸어 올라가 내려오는데
“와우 네가 입은 옷 멋져요.”
뒤에서 백인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여자를 쳐다봤다. 엄청 멋쟁이다.
“너야말로 멋지게 옷을 입었네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만나서 차라도 마시면 어때? 네 전화번호 줄 수 있어요?”
혹시 레즈비언이 아닐까? 오해할 만큼 적극적이다.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줬다. 그녀는 디자이너로 오래전 유대인 의사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의 이혼 사유는 남편이 부인과 아이들보다 부모와 쌍둥이 동생을 먼저 챙기는 것을 참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개인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그녀의 모습에 꽤 흥미를 느꼈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매력적인 싱글이다. 옷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겹겹이 입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한 차림새다. 그 여자 자체가 움직이는 예술 작품이다.
“여자가 로맨스를 잃으면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진다.”
라고 종종 말하던 친정아버지 말씀이 떠오를 만큼 그녀의 모습 또한 로맨틱하다.
“우리 산책할까?”
그녀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좋아. 네가 사는 빌딩으로 3시까지 갈게.”
주로 늦게 일어나는 그녀가 나에게 거의 매일문자메시지를 한다. 일찍 일어나는 내가 문자메시지를 하면 그녀는 자느라고 바로바로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책이 끝나면 장도 보고 댄싱 클래스도 가고 동네 이벤트에도 함께 참여한다. 그녀가 소개해 준 친구들도 거의가 유대인 예술가다.
“어쩌다가 둘이 만났어?”
그녀의 친구들이 물을 때마다 내가 입을 때기도 전에 그녀는
“내가 길에서 보고 쫓아가서 친구 하자고 했어”
나는 그녀가 나를 chasing 했다는 말에 만족하며 콧대를 높이고 한마디 거든다.
“그날 우리는 저녁노을 빛에 홀려 친구가 되었어”.
그녀의 친구 중 제임스라는 30살 먹은 변호사 게이 남자가 있다.
“어떻게 젊은이와 친구 사이가 됐어?” 내가 물었다.
“그가 건널목 맞은편에서 오는 데 너무 멋있어서 내가 쫓아가서 친구 하자고 했어.”
그녀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쫓아가서 친구하자고할만큼 밝고 자신감이 넘친다. 함께 걷다 보면 서너 번은 멈춰야 한다. 지나가는 개을 쓰다듬어야 하고 이웃들과 인사하며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든다.
어퍼웨스트에 사는 리버럴 유대인들은 나의 옛 동네 윌리엄스버그 하시딕 유대인과는 전혀 다르다.
“내 조상들은 옛날 옛적에 엘리스 아일랜드로 들어왔어. 그때 처음 이민해 온 할아버지는 이탈리아를 너무 좋아해서 이탈리아 성 Pasqua라고 바꾸었어. 그 이후 후손들이 성 스펠링을 조금씩 바꾸다가 내 라스트 네임은 Pasco가 되었지. 내 조상들은 1차 대전 전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나치에 대한 감정도 다른 유대인처럼 심하지 않아.”
내가 종교가 없듯이 그녀도 회당(Synagogue, 시나고그)에 참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80가와 브로드웨이에 있는 제이바스(ZAbar’s)에 자주 간다. 그녀가 해 먹는 음식 조리법을 말해줘서 나도 해 먹는다. 대부분 내 입맛에도 맞는다. 이번 페스오버에는 Matzos를 해 먹으며 유대인 문화를 체험했다.
어린아이 모두가 그러하듯 나도 어릴 적엔 새처럼 날고 싶었다. 물 위에 누워 하늘을 보고 두 팔로 물을 저으면 나르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며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을 들락거렸다. 그러고는 함께 몸담기를 거부하는 하시딕 유대인들에게 밀려났다. 그들의 배타적인 물결에 아집으로 맞서 역행했다면 나는 허우적거리다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물살을 거스르기보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자, 비로소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 순리는 나를 어퍼웨스트사이드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색채의 유대인 친구를 만났다.
길었던 유랑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어퍼웨스트사이드라는 안식처에 닿았다. 이제 나는 물결을 거스르며 힘을 빼는 대신,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새로운 인연들과 함께 인생이라는 파도를 즐기고 있다. 과거의 결핍은 현재 풍요로운 관계를 알아보는 눈이 되었고, 그 눈으로 바라보는 뉴욕의 새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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