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서울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가는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나뭇가지에 작은 여자용 핸드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있다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그냥 갈까, 말까 고민하려던 찰나, 중고등학교 친구 남선희가 들려준 경험담이 떠올라 나도 그녀와 똑같이 해보기로 했다.
핸드백 주인을 기다리면서 친정아버지와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차라리 아버지가 게장 잘하는 식당으로 데려가 서너 번 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게장을 이토록 많이 담가놓고 아줌마 몰래 먹으라니, 오히려 내가 아줌마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눈치 빠른 아줌마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뉴욕으로 돌아가면 간장에 푹 절여진 채 남은 게장을 독차지하려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버지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야 하는데 예전만큼 먹히지 않았다. 마침 아버지가 여자친구와 함께 시골집에 간 사이, 아줌마도 쉬겠다고 집을 비웠다. 그 순간 나에게 핸드백 이야기를 해주던 친구 선희가 게장을 참 좋아했다는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선희와 나는 중고등학교 동기이기도 하지만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할머니와 나의 친할머니는 쌍둥이였다. 그녀의 할머니는 남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나의 할머니는 이씨 집안과 결혼한 것이다. 가깝다면 꽤 가까운 사이다. 그녀가 나와 함께 게장을 먹었다고 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터였다.
커다란 게장 통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게장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냉큼 달려왔다. “와, 게장이 이렇게나 많아?” 우리는 흰쌀밥을 곁들여 게장을 쪽쪽 빨아 먹느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먹기에 바빴다. 희고 고운 얼굴에 간장이 튀어도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는 선희를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사심 없는 애를 밀어내며 친해지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향했던 나의 엇나간 묘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평상시의 우아한 자태와는 달리 배를 가득 채운 선희는 방바닥에 벌렁 눕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얼마 전에 집에 가다가 동네 벤치에서 작은 백을 발견했잖아. 어떡할지 망설이다가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고. 혹시 연락처라도 있나 싶어 안을 뒤져봤더니 열쇠와 돈만 나오는 거야. 집에 갔다가 열쇠가 없다는 걸 알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계속 기다렸지.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라고. 직감적으로 가방 주인이라는 걸 알았지. 백을 들고 흔들며 아는 척을 하려다가, 혹시 모르니까 그 여자가 와서 백을 찾을 때까지 가만히 있어 봤어.” “혹시 작은 백 보지 않으셨어요?” “이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찾으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아, 고마워라! 정말 고마워요.”
‘선희는 마음씨도 곱고 머리도 좋구나. 그러니 반장을 6년씩이나 했지.’ 나는 그런 선희를 제대로 알고 친해지기도 전에 그녀의 엄마를 먼저 싫어했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엄마는 학교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치맛바람을 휘날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업 간부였지만, 나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같은 기차선로 위에 있는 줄 알았던 우리의 운명은, 서로를 깊이 알아가기도 전에 이미 다른 선로로 갈아타고 각자의 길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장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말고는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며, 내가 먼저 그녀를 밀어냈었다.
선희는 나와 반대로 키가 크고 귀티가 나는 고운 흰 얼굴을 가졌다.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꼭 엄마의 치맛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아이들을 이끄는 통솔력이 있었고 다들 선희를 잘 따랐다. 반면 나는 단 한 번도 학교에서 ‘장’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다. 미화부에서 회계를 맡았다가 돈을 몽땅 잃어버려 아버지가 대신 물어주었던 쓰라린 기억만 있을 뿐이다. 집안 모임에서도 친척들은 선희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나는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당했다. 그녀는 명문 여자 대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전기 입시에서 떨어져 후기인 남녀공학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 궤도는 더욱 멀찍이 갈라졌다.
선희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모의 영향력 덕분에 사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장사꾼인 나의 아버지는 그런 힘이 없었기에 나는 취직을 못 하고 한동안 방황했다.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으로 1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운 좋게도 집에서 가까운 동부이촌동의 공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무렵 선희가 엄마의 연줄로 집안 좋은 남자와 데이트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선희처럼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오종종한 외모 때문인지 선뜻 다가오는 남자가 없었다. 중매를 통해 만난 한 의사는 내가 아파트 한 채는 얹어 와야 저울추가 평행하다며 노골적으로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 “너 아파트 한 채 얹어서 의사랑 결혼할래? 아니면 그 돈으로 유학을 갈래?” 아버지는 내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심각한 얼굴로 물으셨다. “유학 갈래요.”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키 큰 미국 사람들은 키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해. 미국에서 네 짝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아냐. 결혼을 못 한들 어떠냐, 자유롭게 살아라.”
그녀와 게장을 먹고 난 얼마 후, 선희가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집안 좋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왜 선희는 나와 함께 게장을 먹으면서 곧 있을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백을 찾아준 이야기만 나누다 헤어진 것일까. 물론 나 역시 뉴욕에서 보낸 첫 학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추측해 보건대 서로 다른 길로 치닫는 일치하지 못할 대화는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친척 모임에 가기 꺼려하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결혼식만큼은 꼭 가야 한다며 나를 앞장세우셨다. 호텔에서 열린 성대한 결혼식에서 나는 친척들의 눈치를 살피며 맨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말 선남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화려한 결혼식이었다. “아버지, 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피로연 식당에는 가지 않을래요.” 아버지도 내 기분을 눈치채셨는지 돈을 한 움큼 쥐여주며 친구들 만나서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하셨다.
선희는 희고 귀티 나는 얼굴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가는데, 나는 오종종한 얼굴과 짧은 다리로 제자리걸음을 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뉴욕에서 싱글로 어정거리고 있을 때, 선희는 은퇴한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남매를 키워냈다. 나는 결혼도 늦었고, 결혼 후 4년이 지나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다. 내가 홀로 아이를 키우며 끙끙대는 사이, 선희는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은 의사가 되었고 딸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친정엄마처럼 교장이 되었다. 선희의 길은 늘 순조로웠고, 나의 길은 늘 힘들게 돌아가야만 했다.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라는 말이 있다. 실망하지 않고 기다리며 노력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낯선 여정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 더 나은 목적지에 도달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끌어안은 채,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삶은 발버둥 칠수록 더욱 피곤해질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신장 검사를 위해 CT 스캔을 받게 되었다. 검사 전 간호사가 가려움증이나 두드러기, 호흡곤란 같은 조영제 알레르기 부작용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맞아본 적이 없던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주사를 맞고 스캔이 시작되자마자 귀와 목이 격렬하게 가렵기 시작했다. 갑자기 검사실이 술렁이더니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겠다며 다급히 뛰어나갔다. 곧이어 또 다른 간호사와 의사가 들이닥쳤다. 오른쪽 목젖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가 이것저것 묻는 사이, 간호사 한 명은 아예 내 곁에 붙어 쉴 새 없이 혈압을 쟀다. 혈압은 급격히 올랐고 목은 점점 더 조여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목젖에 무거운 걸쇠가 채워진 듯 숨이 막혀 헉헉댔다. 간호사가 물을 마시라고 권했지만, 물은커녕 침 삼키기조차 불가능해졌다. 또 다른 의사가 급히 달려와 알레르기 치료제인 베나드릴 주사를 놓았다. 남편이 호출되었고, 나는 응급 침대에 뉘어 급박하게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순간, ‘죽음이 이렇게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이토록 바둥거리며 세상사 골칫거리들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지금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나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구름 위를 누워가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의식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바삭거리는 응급실의 하얀 시트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콤한 무의식 속에서 의식이 서서히 돌아올 때, 나는 오히려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죽음은 생각보다 감미롭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결국 나는 눈을 떴다. 다시 세상일을 마주해야 했다. 매 순간 긴장하고 타협해야 하는 팍팍한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다는 것, 그것이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남선희는 지금도 여전히 행복할까? 그 행복에 취해 영원히 살고 싶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비로소 놓아버린 것은 생명이 아니라, 평생 나를 옭아매던 비교와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깨어난 뒤에도 세상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작 달라져야 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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