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수아는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학교 정문 오른쪽에는 낮은 축대가 있다. 남학생들은 거기에 죽 늘어앉아 미니스커트를 입고 교정을 들어서는 여자들의 다리를 훑어본다. 그 시선이 오늘도 자신의 맨다리에 꽂힐 걸 생각하자 몸이 무거워졌다.
오늘 학교를 째 버릴까.
하지만 학점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수아는 겨우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맥주 한 캔이 남아 있었다.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자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미니스커트와 높은 구두를 꺼내 신었다.
“키도 작은데 그렇게 높은 구두 신으면 더 작아 보여.”
수아가 탄 버스가 삼각지에 멈춰 섰다.
그녀는 사람들 뒤에 숨어 서 있던 남자가 만원 버스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노래를 잘하는 남자였다.
“공연 잘 봤어요. 노래 정말 좋았어요.”
가까이 가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수아는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빛바랜 청바지에 연분홍 티셔츠를 입고, 베지색 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막 빨아 입은 옷처럼 깨끗한 느낌이었다. 가까이 가면 사과 향이 날 것만 같았다.
수아는 괜히 코를 쫑긋거렸다.
남자가 왼쪽 교정으로 사라지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뭐 하는 거야? 멍하니. 작업은 하지도 않고.”
교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학생은 시집 잘 가려고 대학 왔나? 정신 차려.”
수업이 끝난 뒤 수아는 교정을 한참 어슬렁거렸다.
아침에 본 그 남자와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날이었다.
학교 정문 오른쪽에는 그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다.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어두웠다. 입구에 선 채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리자, 구석 테이블에 앉은 그가 보였다. 맞은편에는 노라가 있었다.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노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질투와 체념 사이를 헤매던 수아는 그들 가까운 테이블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위스키랑 반숙이요.”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자 독한 술이 목을 태우며 내려갔다. 그녀는 곧이어 반숙 달걀도 삼켜버렸다.
수아의 시선은 계속 그들에게 가 있었지만, 둘은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를 엿듣고 싶어 몸을 기울여 봤지만 음악 소리만 쾅쾅 울렸다.
갑자기 키 큰 남자가 다가와 수아 맞은편에 앉았다. 머리는 커다랗고, 앞머리는 이미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잘 지냈어? 숨어 다니는 거야? 나 피하는 줄 알았네.”
수아는 대답 대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그가 두툼한 편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집에 가서 읽어 봐.”
수아는 편지에 손도 대지 않았다. 편지는 주인을 잃은 물건처럼 테이블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자는 자리에 박힌 듯 앉아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후줄근한 줄무늬 셔츠에 축 처진 나팔바지 차림이었다. 가까이 가면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수아는 다시 노라 쪽을 힐끗 바라봤다.
“밥 먹으러 갈래?”
그가 물었다.
“배 안 고파. 술이면 몰라도.”
남자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좋지. 분위기 괜찮은 데 아는데.”
“나 높은 구두 신어서 멀리 못 가. 그냥 철길 옆 해장국집에서 소주나 마시자.”
수아는 노라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키 큰 남자를 따라 카페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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