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0, 2025

마치 어제 일처럼

“엄마 왜 이렇게 작아졌어요.” 

네가 한창 커가던 어느 날, 네 가슴에 묻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던 말 기억하니?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는 소리로 들려 마음이 묘해지곤 한단다. 내가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기보다 네가 잘 자라준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너는 그린포인트 브루클린에서 9파운드 8온스라는 당당한 무게로 태어났지. 그 주 병원에서 가장 크게 태어난 아이였어. 간호사가 내 품에 너를 안겨주며 걱정하는 눈빛을 거두지 못하더구나. 100파운드도 안 되는 가냘픈 내가 커다란 너를 안고 일어나려 할 때마다, 아이를 떨어뜨릴지 모른다며 꼭 침대에 앉아서 안으라고 성화였지. 퇴원하던 날, 그 간호사가 내게 남긴 의미심장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해. “네가 아이의 보스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너의 보스로 만들어서는 안 돼.”

화가 부모를 만나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너를 좋은 옷, 좋은 음식으로 입히고 먹이지 못했지. 갖고 싶은 장난감도 못 들은 척 넘어가기 일쑤였다. 너는 공원에서 모래를 만지며 놀았고, 집에서는 냄비나 식기류를 장난감 삼아 놀았어.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 아빠가 쓰던 물감을 찍어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구나. 우리가 그리면 너도 그렸고, 붓을 쥐면 기어이 붓을 빼앗아 네 세상을 펼치곤 했지. 집 안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너는 그렸어. 종이가 없으면 볼펜으로 냅킨에, 영수증에, 비닐봉지 위에도 네 흔적을 남겼단다.

선으로 시작된 네 그림은 원과 사각형을 거쳐 공룡이 되고, 바닷속 상어와 숲속의 호랑이로 변해갔지. 부드러웠던 선들은 어느덧 거칠고 강렬해져 탱크와 비행기가 교전하는 전쟁터가 되었고, 너는 쉴 새 없이 입으로 폭격 소리와 총소리를 내며 그 세계에 몰입하곤 했어. 우리는 단 한 번도 너에게 그림을 가르치거나 간섭한 적이 없단다. 그저 네가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곁에 다양한 재료를 놓아줄 뿐이었지. 가끔은 내 그림 한 귀퉁이에 네 그림을 얹어 멋진 합작품을 만들기도 했던 그 시절이 참 그립구나.

사춘기가 되며 만화에 빠진 너는 라구아디아 예술 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했지. 당연히 미술을 전공할 줄 알았는데, 너는 뜻밖의 말을 내뱉었어. “그림은 교육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예술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어요. 난 화가들이 싫어요. 실속 없이 폼만 잡는 루저(loser) 같거든요.”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기에 엄마는 씁쓸하면서도 네 뜻을 존중했단다. 예술과 거리가 먼 전공을 선택했던 네가, 대학에 가서 다시 드로잉과 사진을 배우고 영화를 부전공하며 새벽까지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어느 날 “화가가 가장 쿨한 직업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엄마 마음이 어땠는지 아니? 반가우면서도 짐짓 심술이 나 “이제 와서 전공이라도 바꾸겠다는 거니?”라며 쏘아붙였지만, 내심 방황하는 너를 보며 고민이 깊었단다. ‘어디서 시작했느냐보다 어디서 끝맺느냐가 중요하다’는 화가 마를렌 뒤마의 말처럼, 너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줘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아빠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내가 직장을 잡으려 하면 너를 키우는 게 우선이라며 질책하곤 했지. 그래서 나는 네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서, 너를 외롭게 하지 않는 엄마가 되려 애썼어. 다만 엄마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요리가 귀찮아 달걀부침에 스팸만 자주 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너는 그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니 미안하면서도 참 고맙더구나.

그 시절 우리는 참 가난했지. 아빠와 엄마의 학위로는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고, 우리 역시 너처럼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싶었으니까. 텔레비전도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빠가 길가에 버려진 흑백 TV를 주워 왔어.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화면만 보며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 그러다 또 운 좋게 비슷한 TV를 하나 더 주워 왔는데, 이번엔 화면은 비가 내리듯 지지직거려도 소리는 잘 나왔단다.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비 내리는 화면 쪽에는 수건을 덮어씌운 채 소리를 들으며 TV를 보던 우리 모습, 지금 생각하면 참 애틋한 풍경이지?

형편이 조금 나아져 작은 소니 TV를 샀을 때, 일주일도 못 가 도둑이 가져갔던 일도 기억나니? 이웃은 앞집 마약 중독자가 훔쳐 갔다고 일러줬지만, 해코지가 두려워 우린 아무 말도 못 했어. 다시 TV를 살 돈도 없었지만, 사봤자 또 훔쳐 갈 게 뻔해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TV 없이 살았단다. 매년 연말 LA 할아버지 댁에 가면 네가 TV 앞을 떠나지 못하던 모습에 할아버지는 결국 TV를 사서 비행기에 실어 보내주셨지.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어. 훔쳐 갈 게 하도 없으니 도둑이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시고 화풀이로 가구를 다 내동댕이쳐 놓았었지. 그 기억 때문일까? 성인이 된 네가 강아지 나이키를 산책시키다 멀쩡하게 버려진 TV를 집으로 주워 왔을 때 엄마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단다.

동네 성당 옆 맥도날드를 지날 때마다 간절하게 성호를 긋던 어린 너의 모습도 선하구나. 해피밀을 먹고 싶어 조르지는 못하고 그저 성호를 긋기만하던 그 작은 등. 그때 엄마는 정한수를 떠 놓고 비는 심정으로 네 곁에 서 있었단다. 이제는 비싼 레스토랑에서도 너를 대접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니. 그 시절 엄마의 형편을 미리 알고 보채지 않으며 잘 자라준 네가 참 대견해.

한글 학교 보낼 돈이 없어 아빠가 벽에 칠판을 붙여놓고 가르칠 때, 너는 짜증을 내며 한국말 배우기 싫다고 칭얼댔었지. 그런데 얼마 전 네가 전화 했길레 물었지. “왠일로 요즈음 전화를 자주하니?” “한국말 잊어버리지 않게 엄마와 연습 하려고요. 엄마, 한글말 잘 가르쳐줘서 고마워요.”라고 했을 때, 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기뻐했단다.

사춘기 시절, 네 외모에 불만을 터뜨리며 엄마 아빠의 나쁜 점만 닮았다고 원망하던 너를 위해 엄마는 아껴둔 쌈짓돈을 풀었지. 여드름 약을 사고 치아 교정을 해주고, 좁은 방에서 게임만 할까 걱정되어 여름마다 해외 봉사활동을 보냈어. 평소와 달리 돈을 쓰는 엄마를 보며 “우리 집 망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던 너의 눈빛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비록 형편이 어려워 악기나 운동 레슨은 제대로 못 시켰지만, 뉴욕시 수영장과 테니스장, 학교 밴드부를 전전하며 엄마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단다. 가끔 네 방에서 들려오는 맑은 기타 소리는 그때의 힘듦을 씻어주는 나의 위안이야.

기억나니? 어릴 때 수영장에 가다가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급한 마음에 스톱 사인을 지나치다 교통사고 난 것. 보이스카우트에 가다가도 네가 차 뒤에 앉아 ‘엄마~’ 하고 부르자 갑자기 차를 멈추는 바람에 뒤 차가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도?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빠가 놀라서 달려왔잖아. 너의 일이라면 언제나 쿨하지 못하고 도마 위 생선처럼 팔딱거리며 유난떨던 엄마를. 미안하다. 아들아. 쿨하지 못했던 엄마를.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 일이라면 자꾸만 열이 오르는 이 ‘새끼 타령’을 나도 어쩌지 못하겠구나.

“엄마 생일인데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어제 네 방문을 받고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 피곤해 누워 있다가도 네 전화 한 통에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후다닥 저녁을 차려내게 되더구나. 너는 나를 일으키는 용기이자 행복 그 자체란다. 바쁜 너에게 자주 오라 가라 하지는 않으마. 오면 반갑고, 오지 않아도 섭섭지 않으니 그저 네 삶에 충실하며 행복하거라.

네 외할아버지는 방과 후 집에 오는 버스 정류장에 엄마를 마중 나오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학교 이야기를 들려달라 하셨지. 엄마 손은 늘 부드럽고 푹신한 할아버지 손안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걸을 때 네가 잡아주는 너의 손도 할아버지 손 만큼이나 부드럽고 포근하구나. 

할아버지는 저녁에 반주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워낙에 건강한 할아버지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내가 부르면 반갑게 맞아 이야기 해줄 거라고만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작아지고 늙었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슬퍼 내가 말했다.

“아버지, 나에게 못다 들려준 지난날의 이야기를 적어 놓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가 남긴 노트북을 틈틈이 들여다보며 살아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탁했지. 물론 나는 미국 온 후에도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두 통씩 오랜 세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할아버지가 모았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보내와서 간직하고 있다.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적혀있는 소중하고 애틋한 기록으로 지금도 나에게 살아있는 대화가 되어준단다.


네가 훗날 엄마 글을 읽고 싶을 때는 이미 엄마는 너무 늙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없겠지. 살아있다 한들 희미해진 기억을 너에게 정확히 말해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난 오래전부터 잊혀 사라질 일상을 기록하고 영어로 번역해 두었다. 이유는,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 없거나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네가 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사람은 20살 이전의 기억으로 산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너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과 사랑에 의지해서 살았다. 기록은 단지 글자가 아니라 삶의 연장선이야. 며칠만 지나면 예전 같지 않게 희미해지는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지는구나. 너도 네 삶을 기록 해두기 바란다. 삶의 기록을 남기려면 아무래도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지 않겠니? 


엄마의 일상 기록이 너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고 행복한 삶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구나. 고맙다. 너를 마음껏 사랑할 기회를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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