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이렇게 작아졌어요.”
네가 커가던 어느 날, 네 가슴에 기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니?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는 소리로 들린단다. 내가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기보다 네가 잘 자라준 것이 고맙다.
너는 그린포인트 브루클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병원에서 9파운드 8온스로 그 주에 가장 큰 아이로 태어났다. 간호사가 내 품에 너를 안겨주며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내가 너를 안고 일어나려고만 하면 너를 떨어뜨린다며 침대에 앉아서 안으라고 성화였다. 100파운드도 안 되는 내가 크게 태어난 너를 가누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퇴원하던 날 그 간호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네가 아이의 보스가 돼야지. 아이를 너의 보스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화가 부모 만나 어려운 환경으로 너를 잘 먹이고 입히지도 못했다. 갖고 싶은 장난감도 못 들은 척 사주지 않았다. 너는 공원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았고 집에서는 냄비나 식기류를 가지고 놀았다. 종이에다 엄마 아빠가 쓰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그리면 너도 그렸다. 붓으로 그리면 붓을 빼앗아 그렸다. 색을 쓰면 너도 색을 쓰겠다며 마구 칠 했댔지. 집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그렸다. 재료가 없어도 볼펜으로 냅킨에도, 영수증 그리고 봉지에도 그렸다.
선으로만 그리던 너의 그림이 원, 사각형 등의 형태를 띠더니 공룡을 그리기 시작해서 바닷속 상어로, 숲속의 호랑이로 옮겨갔다. 부드러운 선은 거친 선으로 탱크, 비행기 등 전쟁 모습을 그리느라 너는 쉴 새 없이 침을 튀기며 폭격 소리, 총소리 등의 사운드를 첨가하며 격해져 갔다. 엄마 아빠는 너에게 그림을 가르친 적도, 어떻게 그리라고 말한 적도 없다. 너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고 나는 재료만을 다양하게 옆에 놔 주기만 했다. 너는 내 그림 한 귀퉁이에도 그려 합작도 했다.
틴에이저가 되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잡을 줄 아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라구아디아 예술 고등학교 시험까지 보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당연히 미술을 전공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너의 입에서
"그림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일이 야요. 예술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어요."
“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결코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난 화가들이 싫어요. 화가들은 실속 없이 폼만 잡는 루저(loser)들이에요.”
너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너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전공을 택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는 드로잉, 사진 등 예술에 관한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부전공도 영화에 관련된 과목을 선택했다. 그림을 그려 블로그에 올리느라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화가가 가장 쿨한 직업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어느 날, 너의 입에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왜 엄마 입에서는
“그래서 어쩔 건데? 인제 와서 전공을 바꾸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방황하는 너를 보며 과연 남아프리카 화가 마들렌 뒤마(Marlene Dumas) 말대로 '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끝나느냐.'가 중요하다며 너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줘야 하는 걸까? 엄마는 고민했단다.
아빠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너만 잘 키우라고 직장을 잡으려는 엄마를 질책했다. 나는 항상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빨리 달려갈 수 있는 곳에서, 너를 슬프게 하지 않는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 단지 엄마가 약해서 밥맛이 없다고, 요리하기 싫다고 달걀부침에 스팸을 많이 먹인 것이 몹시도 걸린다. 그런데 너는 ‘기억 나지 않는다.’니! 스팸과 달걀부침이 가장 맛있다니! 미안하고 고맙구나.
아빠와 엄마가 공부한 학위로는 그럴싸한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 우리도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듯이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계속 하고 싶었다. 그래서 네가 어릴 적 우리는 매우 가난했지.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이 살았잖아. 하루는 아빠가 밖에 버려진 조그마한 흑백 TV를 주워 왔다. 우리는 신이 났지만, 웬걸,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심할 때마다 화면만 들여다보며 소리는 상상으로 만족했지. 어느 날, 운 좋게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TV를 아빠가 또 주워 왔다. 화면에서 비가 쏟아졌지만, 소리는 나왔다.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비 쏟아지는 화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화가 지인이 아빠 작품을 사가던 날, 작은 소니 텔레비전을 장만하고 고장 난 주워 온 것을 버렸다. 새것을 즐기던 중, 채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도둑이 가져갔다. TV를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던 길 건너 남자가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훔쳐 갔다고 이웃이 말해줬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로 약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시 TV를 살 돈도 없지만, 다시 산다 해도 또 도둑이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TV 없이 살았지.
매년 LA 사시는 할아버지가 보내오는 비행기 티켓으로 연말에 LA에 가면 너는 티브이에 눈을 박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다.
“텔레비전 없이 사는 것이 아이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도 제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사주겠다.”
“돈으로 주시면 제가 뉴욕에 돌아가서 살게요.”
“아니다. 돈으로 주면 사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내가 여기서 사 줄 테니 가져가거라.”
할아버지는 커다란 산요 TV를 사서 비행기에 실어주셨다. LA에서 집에 돌아오니 문은 열려있고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둑이 하도 집안에 훔쳐 갈 것이 없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시고 화가 났는지 몇 개 없는 가구를 다 내동댕이쳐 놨었던 것을 네가 보고 놀랐던 것 기억나니? 그래서일까? 너는 성인이 되어 나이키(프렌치 불도그)를 산책시킬 때마다 나이키가
“너 이거 좋아? 집에 가져갈래?’
하는 표정으로 버려진 멀쩡한 물건 앞에 멈춰 너를 쳐다보면 집안으로 주워 오곤 했지. 그러다 어느 날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도 주워 오지 않았니? 아마도 TV 없이 보낸 어릴적 너의 기억이 주어오게하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마음 아팠다.
동네 성당 앞에서 성호를 그으며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자란 너는 어릴 때 성당 옆 맥도날드 앞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간절한 눈으로 해피밀을 먹게 해달라고 나를 쳐다보곤 했지. 너는 엄마가 햄버거 사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조르지는 못하고 성호를 서너 번씩 긋기만 했었는데. 하느님에게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 해피밀을 많이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은 아니니? 성인이 된 너는 아무리 허기져도 맥도날드에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네가 간절히 해피밀을 위해 기도 할 때 엄마도 정한수 떠 놓고 비는 심정이었다. 엄마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북적거리는 맨해튼을 거닐때 성당에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기도한다. 너에게 해피밀을 사줄 수 없던 형편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도 사 줄 수 있는 처지까지 왔다는 것이 오직 우리의 노력만은 아닐진대 어찌 감사하지 않겠니! 엄마의 형편을 알고 보채지 않고 잘 자라 준 너에게도 감사한다.
한글 학교 보낼 돈도 넉넉치 않아 아빠가 칠판을 벽에다 붙이고 ‘가나다라’하면 너도 ‘가나다라’하고 ‘아이어우이’ 하면 네가 따라하며 그만하겠다고 너는 짜증을 내곤했지. 엄마는 네가 한국말로 말해야 간식을 주곤해서 너는 몸을 뒤틀며 한국말 배우기 싫다고 칭얼 거렸다. 그런데 얼마전 네가 전화 했길레 물었지.
“왠일로 요즈음 전화를 자주하니?”
“한국말 잊어버리지 않게 엄마와 연습 하려고요. 엄마, 한글말 잘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너의 그말에 엄마는 오히려 고마워서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단다 .
네가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키는 작고 얼굴은 크고, 볼에 살이 너무 많고 다리가 굵다고. 엄마 아빠의 나쁜 점만 닮았다며 원망했다. 사춘기가 되자 너의 얼굴엔 여드름이 쫙 깔렸다.
“생긴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난리니, 공부나 해”
타일러도 화를 내며 투덜댔다. 엄마는 너를 키우는 내내 옷, 장난감 등등 많은 것을 얻어다 키웠지만, 이제야말로 아끼고 아껴 모은 쌈짓돈을 풀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너는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여드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좋다는 여드름 약을 이것저것 사다 썼다. 치아교정도 했다. 너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고 14살부터 여름 방학마다 국외 봉사활동도 보냈다. 물론 네가 방구석에서 게임만 할 것이 걱정되어서였지만. 너는 돈을 펑펑 쓰며 평상시와는 달리 행동하는 나를 보며
“엄마 괜찮아? 우리 집 망하는 거 아니야?”
라고, 걱정했던 것 기억하니? 물론 형편이 어려워 악기나 운동 레슨도 시키지 못했지만,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수영, 테니스, 학교 밴드부에 넣고 데리고 다니느라 엄마 나름대로 애썼단다. 힘겹게 받은 기타 렛슨 덕에 가끔 네 방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기타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기억나니? 어릴 때 수영 배우러 가다가 수영복을 빠뜨리고 온 것이 생각나서 급한 마음에 스톱 사인을 지나치다 교통사고 난 것. 보이스카우트에 가다가도 네가 차 뒤에 앉아 ‘엄마~’ 하고 부르자 갑자기 차를 멈추는 바람에 뒤 차가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도?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빠가 놀라서 달려왔잖아. 네 일이라면 평소와는 달리 매사 뒤죽박죽이 되기 일수인 엄마의 새끼 타령을 어쩌겠니. 미안하다. 아들아. 쿨하지 못했던 엄마를. 엄마는 네가 너무 좋아서 ‘쿨’한 사람이 될 수가 없구나. 네 일만큼은 쿨할 틈도 없이 마치 도마 위에서 팔딱거리는 생선 모양 난리를 치니 말이다. 네 일이라면 갑자기 열이 오르는 데야 어쩌겠니.
“오늘 엄마 생일이지요? 뭐 필요한 것 있어요?”
“고마워. 가지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네가 말 잘 들어서 엄마는 하루하루가 생일이었다. 그냥 네가 건강하게 잘 지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선물이야.”
어제 네가 엄마를 방문해 줘서 고마웠다. 피곤해 누워 있다가 네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던지. 벌떡 일어나 저녁 준비를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했단다. 너는 엄마를 벌떡 일으키는, 용기와 기운을 행복을 주는 존재란다. 너만 보면 없던 기운이 절로 생겨서 엄마야 좋지만, 바쁜 너에게 자주 전화하고 오라 가라 하지는 않으련다. 오면 반갑고 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으니 너의 삶에 충실하고 행복해라.
네 외할아버지는 방과 후 집에 오는 버스 정류장에 엄마를 마중 나오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흔드시며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하셨지. 내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푹신한 네 할아버지 손안에 있었다. 어릴 적 너도 엄마인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잘 따라 주었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걸을 때 항상 네가 이 엄마의 손을 잡아주듯이. 너의 손도 할아버지 손 만큼이나 부드럽고 포근하구나. 할아버지는 저녁에 반주 하시며 당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워낙에 건강한 할아버지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내가 부르면 반갑게 맞아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만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작아지고 늙었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슬펐다.
“아버지, 나에게 못다 들려준 지난날의 이야기를 적어 놓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가 남긴 노트북을 틈틈이 들여다보며 살아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탁했지. 물론 나는 미국 온 후에도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두 통씩 오랜 세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할아버지가 모았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보내와서 간직하고 있다.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적혀있는 소중하고 애틋한 기록이다.
네가 훗날 엄마 글을 읽을 때는 이미 이 엄마는 너무 늙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없겠지. 살아있다 한들 희미해진 기억을 정확히 말해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난 오래전부터 잊혀 사라질 날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너는 엄마가 건강해서 평생 살 것으로 생각하고 걸프렌드나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의 글을 읽을 시간이 없는 줄 안다. 그러나 너도 언젠가는 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가 있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억들이 소중해진단다. 문자로 써 놓지 않으면 희미해져 사라진다. 못하는 영어지만 그동안 써 놓은 글을 네가 읽기 쉽게 다 번역했다. 네가 한국말은 곧잘 하지만 아무래도 읽기와 쓰기는 쉽지 않아서다.
사람은 20살 이전의 기억으로 산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너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과 사랑에 의지해서 살았다. 기록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지 않고 삶의 연장으로 함께 살아간다. 며칠만 지나면 예전 같지 않게 희미해지는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지는구나. 너도 네 삶을 기록 해두기 바란다. 삶의 기록을 남기려면 아무래도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지 않겠니?
엄마의 일상 기록이 너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고 행복한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듯 하구나. 고맙다. 너를 마음껏 사랑할 기회를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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