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7, 2020

아무도 아니다


 기차 창에 코를 박은 아이는 다리를 흔들며 뒤로 내달려 멀어지는 풍경이 신기한지 조용하다. 차창 울창한 나뭇잎들이 초록색 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서서히 갈아입는다. 쏟아지는 햇살을 안은 넓은 들판은 이슬을 털고 여름의 막바지를 느긋이 즐긴다. 가을바람은 뜨거운 여름을 밀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맑고 쾌청한 날이다.

여자는 예전에 살던 곳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다.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러나 딸아이가 맨해튼에 가고 싶다고 여러 졸랐다. 모처럼 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없어 맨해튼으로 쇼핑하러 가는 중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만큼 과거를 접고 미래를 힘차게 펼칠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 있을까? 여자는 아이가 발로 배를 차는 순간부터 엄마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여자로 태어났다. 아이는 되돌아보고도 싶지 않은 과거의 강을 건너 지금의 현실로 이끌어주고 미래를 꿈꾸게 했.

나들이 나온 아이는 상기된 볼이 발갛다. 회색 쫄바지에 핑크와 노랑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다반짝거리는 연분홍 운동화를 신은 가는 다리를 흔드는 아이는 태양처럼 밝고 맑은 시냇물처럼 조잘거린다. 하늘이 선물이다. 여자의 눈에는 꿀물이라도 떨어질 39세에 얻은 아이를 쳐다보며 아이가 없었다면혼잣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수많은 인파에 떠밀려 기차역을 빠져나온 아이는 입을 벌리고 높은 빌딩을 올려다봤다. 32 이스트 방향으로 걸었다. 파도 타듯 춤을 추며 사람들의 물결을 벗어나 조금은 한가한 길목에 들어섰다.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안경 너머로 여자를 눈여겨 확인하려는 빤히 쳐다봤다. 앞을 떡하니 막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지 않을 없었다. 안경 예리한 눈과 마주쳤을 여자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애써 표정을 감추고 아이의 손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아이는 높은 건물과 인파에 팔려있다가 얼떨결에 정신을 차린 엄마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주춤거리면서 여자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람 모두 당황한 표정이다. 여자는 아이 손을 쥐고 남자를 비껴가려고 했다
오랜만이야?” 
전혀 변하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놀라 주춤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아이의 손을 끌고 서둘러 가던 길을 재촉했다
엄마, 아파. 아저씨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빨리 가자.”

쇼핑 저녁을 먹고 기차에 올랐다. 아이는 오랜만의 나들이에 흥분해서 피곤한지 여자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9 아이의 뺨은 꽁꽁 강물 속을 들여다보는 가느다란 푸른 실핏줄이 보인다. 황금빛 노을은 아이처럼 잠들 스르르 어둠 속에 묻혔다. 무릎 위에 놓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여자의 차분한 모습이 창에 비췄다. ‘아이가 없었다면.’ 중얼거린다. 어렵사리 얻은 아이를 누가 채가기라도 하는 아이를 보듬어 안는다.

대각선으로 앞쪽 좌석에 다정히 붙어 앉은 젊은 커플이 어두운 창가에 비쳤다. 쇼핑한 물건인지 여자는 빨간 손지갑을 꺼내 열었다 닫았다 한다. 남자는 검은 벨트를 풀었다 감았다 하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묻는다. 남자는 자세를 곧바로 세운다. 둘은 하나가 됐다. 기차 소리는 사람을 잠재우듯 칙칙폭폭 소리 내며 미끄러진다.

 '오랜만이야?' 라던 남자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목소리는 늙지 않는지 여전히 똑같다. 그러나 빛났던 남자의 외모는 유행 지난 옷을 걸친 수척한 모습으로 산뜻한 구석이란 찾아볼 없었다. 10년이란 세월 속에서 종이가 누렇게 바래며 구겨진 낡은 모습이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옛일이 창가에 비친 젊은 남녀가 빨간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들여다보듯 그리고 검은 벨트를 풀었다가 감듯 여자의 뇌리에 떠올랐다.

10 , 39 여자의 생일 전날도 오늘과 같은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장을 보러 여자와 남자는 모처럼 타지역 한인 마켓에 갔었다. 차에서 신문을 읽으며 여자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던 여느 날과는 달리 남자가 쇼핑 카트를 끌고 앞장섰다. 하던 짓을 하는 남자의 행동에 여자는 살짝 불안을 느꼈지만 살다가 이런 날도 온다니! 기뻤. 앞장서서 걷는 키에 벌어진 어깨 그리고 맵시 있는 남자를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따라갔다

남자는 고무밴드로 묶어 놓은 파의 부분을 쥐어서 굵은 단을 고르고, 배춧속을 눌러보고, 수박을 두들기며 싱싱하고 좋은 것을 골랐다. 생선 부에서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생선 고르는 모습이 심각하다. 생선의 때깔도 보고 몸통을 손으로 눌러보고 제쳐보고 골라놓고는 만족한 그의 엄마가 하듯 미꾸라지 꾸물대는 물통에다 손을 헹궜다.

남자 엄마는 마켓에 가면 가자미를 항상 산다. 말려서 구워 먹고 삭혀서 좁쌀밥을 넣고 식해를 담근다. 집안 식구들은 밥상에 올라 가자미의 어느 부분을 처먹을까 생각하는지 젓가락을 들고 조용하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젓가락질하며 생선을 발라 먹느라 말이 없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잡으려고 살살 다가가듯 그리고 잡은 먹잇감을 먹느라 열중하듯. 여자는 젓가락만 들고 구경하다 머리도 눈알도 사라진 앙상한 뼈만 남은 접시를 보고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사자가 먹고 남은 것을 기다리다 실망한 하이네처럼.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다.

이렇듯 생선을 즐겨 먹는 남자는 정육점 선반을 기웃거리는 여자의 행동이 못마땅한지 이마에 팔자 주름이 선명해지며 삐딱한 눈으로 쳐다본다. 여자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맞춤을 피했다
세일도 하는 갈비 집어.”
깜짝 놀라 돌아보니 뒤에서 갈비 팩을 들던 어느 중년 여자 남편의 외침이었다. 주위에서 보던 아낙들이 놀라 소리죽여 킥킥거렸다. 들었던 갈비 팩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그의 와이프를 보며 왠지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료 의식에 여자는 씁쓸했다.

남자가 다른 곳에 신경 , 재빨리 라면 팩과 소주 병을 슬쩍 카트 깊숙이 넣었다. 남자가 연구소에서 늦게까지 일하는 밥할 걱정 없이 라면을 끓여 냄비째 놓고 TV 보며 한가로이 먹고 싶어서다. 얼큰하고 시원한 라면 국물이 식도를 내려갈 때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함께 쓸려 내려간다. 깍두기와 소주 한잔이 곁들이면 긴장했던 몸이 늘어지며 허물어진다

쇼핑한 물건을 계산하고 영수증을 받아 여자가 잘못 계산된 같은 느낌에 케셔 앞에서 머뭇거렸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케셔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살다 보니 여린 같으면서도 강한 면이 있는 여자다. 특히나 부인과는 달리 물욕이 없다. 이미 가져봐서인지 먹는 이외는 전혀 물건을 사지 않는다. 먼저 부인과 때보다 삶이 간단해서 생활비가 적게 든다. 특히나 여자의 친정에서 소소히 보내오는 용돈이 달콤한 솜사탕 맛이다.

와이프처럼 투잡을 뛰며 피곤하다던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같다. 자기가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를 함께 즐기고 일단은 대화가 통했다. 어찌 보면 귀여운 면도 있다. 그리고 남자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예전 부인처럼 이방 저방을 쫓아다니며 잔소리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하다 한잔에 잊어버리는 단순한 면도 있다. 싸우고 와인 들고 돌아와 잔을 부딪치며 마디 나누면 원상태로 돌아가 그런 일이 없었다는 평정을 유지한다언젠가 물밑 깊이 묻힌 여자의 다른 일면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긴장도 되지만, 일단은 가출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기분 좋았던 여자가 계산대 앞에서  이리 날카로워지는 것일까?

잘못 계산된 것을 찾아낸 여자는 작은 액수지만 정정하고 싶었다. 케셔에게 영수증을 내밀며 설명하려고 했다. 케셔는 듣는 마는 무시하고 뒷줄에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대충 넘어가려고 했던 여자도 케셔의 태도에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정으로 영수증을 케셔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여자의 저돌적인 행동에 한풀 꺾인 케셔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영수증을 흩어봤다.

여자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인지 신경이 예민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확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더욱 예민해진다. 그렇다고 엉뚱한 것을 자기 위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고 해결하든지 아니면 묵인해야 마음이 편해진다그녀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오랫동안 사귄 남자가 없었다. 함께 하던 친구들이 결혼한 후에 여자는 유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뒤늦게 결혼했다.

의논도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남자와 결혼 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부모는 놀랐다. 한번 결혼하고 이혼한 남자라는 데는 더욱 놀라 결혼을 반대했다. 차라리 그런 남자와 결혼하려면 혼자 살라고 했다.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딸을 초조히 기다리던 부모는 워낙에 까다로운 딸이 선택한 남자라면 다시 고려해 볼만 하다고 생각할 즈음 시티홀에서 이미 결혼했다는 통보를 받고 엄마는 쓰러졌다.

그냥 나가자.”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 틀린 것이 있으면 고쳐야지 그냥 나가?” 
뒤에 줄이 길잖아.” 
항상 뒷사람을 생각하고 나는 무시하는데. 잠깐이면 .” 
여자는 화가 났다. 케셔의 잘못된 계산보다는 오히려 남자가 남의 눈치를 보며 자기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더욱 케셔를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남자는 뒤에선 사람들을 돌아보고 인상 쓰며 나가자고 재촉했다. 여자는 그의 재촉을 듣는 마는 케셔와 실랑이를 계속했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헛수고였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시간을 끌고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태도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건물 옥상에 놓인 화분 속의 연약한 꽃처럼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여자와는 대조적으로 남자는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동네에서 아궁이에 밥을 먹고 들에서 누런 벼메뚜기 잡아 구워 먹고, 늦가을 김장용 무를 먹으며 흙냄새 맡으며 잡초처럼 자랐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그의 엄마는 시할머니의 구박을 짜증으로 화풀이했다. 기억 엄마하면 짜증이었다. 자라면서 그렇게 싫어했던 짜증을 그도 습관적으로 툭하면 내뱉었다. 결국, 그의 짜증으로 번째 와이프가 떠났다.

와이프가 떠난 이유는 남자가 짜증을 내다가 아내가 대응하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를 달래려고 이방 저방을 쫓아다니며 말을 거는 아내에게 더욱 짜증이 툭하면 집을 나가 잠수했다. 잠수함에서 위의 소식이 궁금해 내미는 잠망경처럼 주위가 평온해질 즈음엔 미안하다 고맙다는 한마디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 견디다 못한 와이프도 집을 나가 잠적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의 불행은 남자의 부인의 잠적으로 시작되었.

남자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보내던 어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간 사람은 잊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봐. 이번 주말에 우리집으로 .
선배 문을 들어섰다. 작은 키의 가련한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언뜻 보고 실망했다. 실실 웃기만 하고 말이 없는 그녀를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키가 크고 다부진 그리고 예리하고 지적인 눈매의 남자를 보자 마음에 들었다얼마 후 남자를 소개해준 분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만나러 갔다. 남자는 거의 시간 후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이미 결혼했습니다. 지금은 나가 연락 두절이지만, 와이프는 키가 크고 인물이 좋아요.” 
여자의 짧은 다리를 슬쩍 보며 남자가 이야기할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며 커피잔을 들어 홀짝거렸다  
집안 환경이 넉넉지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문사에서 일하다 저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습니다. 박사학위 공부하는 저를 서포트했어요. 생활비가 부족할 때는 웨이트리스 일도 했지요이러고 노닥거릴 시간에 돈을 벌었으면 많이 벌었겠네. 시간이 돈이지요.” 
남자는 선배의 부탁으로 억지로 끌려 없이 나왔다는 식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여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낭떠러지로 떨어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말을 잃고 창밖으로 씁쓸한 시선을 돌렸다.

남자 생각엔 선배가 소개해준 여자는 집안은 부유하고 교육은 제대로 받았지만, 전혀 자기를 서포트하기 위해 직장 생활을 타입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 의지할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특히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간 와이프는 돌아오지 않고 이혼 서류가 왔다. 이혼 소식을 들은 선배가 다시 여자를 만나보라고 설득했다
한국에서 유학 정도면 집안이 부유하다. 누가 아냐. 결혼하면 여자 쪽에서 집이라도 사줄지?”

여자는 평상시에는 무척 상냥하다. 그러나 살다 보니 성깔 했다. 아주 평온한 호수 같은 여자가 뭔가 가시에 찔린 듯한 것을 인지하면 뛰는 파도처럼 급변했다. 그러다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호수의 표면과 같은 평정을 유지한다. 언제 다시 파도가 몰려올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두번째 결혼만은 실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참을 만큼 참고 산다고 남자는 자신을 다독거리며 차 안에 앉아있었다. 

여자는 잘못된 계산을 정정하고 되지 않는 돈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눈치를 보며 멋쩍은 문을 열었다. 발을 안에 넣기도 전에 남자는 차를 급하게 몰았다. 여자는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모든 차가 자기에게 달려드는 듯해 속도 내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것을 안다는   남자는 평상시보다 더욱 속력을 냈.  
그래? 천천히 . 화났어?” 
줄이 긴대 받자고 사람들을 기다리게 ” 
남의 눈치는 보면서 입장은 헤아리지 않아.” 
갑자기 남자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려. 나가. 내리라니까. 내려.” 
내리지 않으면 차를 어디에든 들이받을 같은 기세에 밀려 여자는 내리지 않을 없었다.

쏜살같이 달려서 멀어져가는 뒤꽁무니를 보며 여자는 아찔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자기 예상치도 못하게 우주에 홀로 남겨졌다가 사막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눈물이 없이 주르르 흘렀다. 낯선 길가에 내동댕이쳐져 혼자가 것이다. 혹시나 차가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떠난 차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 속에서 여자는 터질 듯한 머리를 감싸고 어찌할바를 몰랐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차가 사라진 쪽을 향해 마냥 걸었다. 붉은 석양이 짙푸른 색을 띠다 어두워졌다. 암흑 속에 걷고 있는 여자는 추워 몸을 떨었다어둠 멀리 붉은 글씨로 담담하게 써진 ‘MOTEL’ 네온사인이 슬프게 빛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모텔에 들어갔다. 씻지도 않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워 뒤척이며 이런 사태가 당연히 수밖에 없었던 남자와의 만남과 부모가 반대한 표면 위로 오르지 못하게 누르며 살았던 결혼 생활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입지 말아야 옷을 대충 걸치고 적응하려고 애썼다. 맞지 않은 옷을 벗어 고쳐 입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옷을 벗다가 잃어버릴 것이 두려워 편한 척했다. 언젠가는 맞게 것이라는 희망도 없지는 않았다. 또한, 여자는 학위를 들고 노처녀로 그녀를 사랑하고 서포트한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부모 멀리서 사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그녀가 있는 효도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를 놓치면 더는 결혼 기회가 같지 않아서 무조건 첫눈에 그럴듯한 남자를 선택했다

여자가 모텔 침대에서 고개를 드니 커튼 사이로 훤히 날이 밝았다. 까만 밤을 지새우고 밝아오는 아침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제 떠오른 모습과 너무도 다른 태양이 여자를 탓하는 듯했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모텔에서 나가야 시간인 12시다. 어찌해야 할까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아주 곳으로? 곳이 없다. 그리고 부모가 사실을 안다면 어찌 될까?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아버지와 통화에서 
네가 갑자기 보따리를 안고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잠을 깼다. 지내고 있는 거지? 쉬고 싶으면 왔다 가라.” 
하셨는데. 아버지 살아생전에 헤어질 수는 없다.

수도 없이 전화를 들었다 놨다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걸려던 전화를 언니에게 했다. 평상시에도 동생의 남편을 못마땅해하던 언니는 시골집 열쇠를 주며 잠시 그곳에 머물며 어찌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라고 했다어둑해져 가는 저녁, 그것도 낯선 곳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서러워서 수시로 눈물이 났다. 잠은 그리도 쏟아지던지.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몹시도 피곤한 일이였나보다.

남자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예상한 일이다. 남자 지난 학기에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눈이 마주친 박사학위 받은 여자가 있다.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을 찾느라 짜증 내는 그의 이상한 행동이 이어졌다. 급히 어디를 가야 한다고도 하고 거울을 자주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곁눈질하 무엇인가 모를 답답한 불안감이 밀려오곤 했다.

여자는 남자와 내연녀의 관계를 묵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구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남자와 마주치는 시간이 예전보다 드물었다. 그가 집에 일찍 오는 날은 하던 데로 저녁 식탁에서 와인을 마셨다
오늘은 일찍 왔네? 웬일이야? 연구소에 무슨 있어요?” 
항상 그랬듯이 대답 없는 메아리를 기다리며 여자는 지껄였고 남자는 없이 식탁에서 먼저 일어났다. 남자가 먹은 그릇이 싱크대에 달가닥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공기가 줄어든 숨이 막혔다. 식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와인 색깔이 유난히도 핏빛처럼 붉어 보였다. 건너편 아파트 창문 안에서 젊은 부부가 함께 부엌에서 저녁 준비하는 다정한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다 느린 움직임으로 설거지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번은 남자에게 그의 내연녀를 언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꺼낸들 없는 남자가 대답해 없다. 답은 뻔하다. 그의 침묵이 더욱더 무겁게 길어질 뿐이다. 그리고 가출할 것이다. 그녀도 그를 기다리다 언젠가는 남자의  부인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뻔한 앞날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지난 여름은 몹시도 더웠다. 사람은 물에서 왔다는 말이 맞나보다. 여자는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면 가라앉으며 모난 것이 없어지듯 물에 몸을 담그면 긴장이 풀린다. 여자가 바닷가에 가자고 때는 바쁘다던 그가 더위를 견디지 못했는지 갑자기 가자고 했다.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그러나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고 웃통만 벗고 신문을 봤다. 물에 함께 들어가자고 해도  바닷가를 걷자고 해도 대꾸가 없다. 강요하면 짜증 것이 뻔했다. 여자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걷다가 뒤돌아보니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냥 걸었다. 남자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그리 발걸음은 가볍고 날아갈 홀가분한지! 이대로 그냥 가버릴까? 얼마나 왔을까? 돌아가기 싫었다. 더는 없는 바닷가 끝이었다. 간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품을 안고 왔다가 뒷걸음치는 파도가 그녀를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라고 속삭였. 파도는 잔잔했다. 위에 누웠다. 뭉게구름이 자유롭게 노닌다. 지금까지 잡을 없는 뜬구름 같은 남자를 잡으려고 혼자 바둥거리며 침묵했나? 한동안 팔을 저으며 마냥 누워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멀어진 여자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팔을 저었다. 그때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해변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내려와 있었다. 겁이 났다. 부지런히 수영해서 해변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난 듯했다. 혹시나 남자가 걱정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걸음은 빨라지다 뛰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고 있었다. 역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씁쓸한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집에 오자마자 여자는 여권의 만기일을 확인했다. 잊고 부모 곁에서 쉬고 싶었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새벽에 아버지가 산책하러 나가며 열어 놓은 문을 슬그머니 밀고 소리 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엄마가 싱크대 앞에서 아침 준비를 하다가 인기척 소리에 돌아 흘깃 봤다. 그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고개를 다시 싱크대 쪽으로 돌리려다 갑자기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젖히며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아이고 새끼” 
여자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도 엄마 품에 안겨 소리 울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왔어?”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오매불망 그리던 엄마 침대에 누웠다. 엄마 냄새를 맡으며 뒹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엄마가 옆에 누워 발가락으로 여자의 다리를 간지럼 태우며 깨웠다
잠꼬대를 심하게 해서 깨웠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아니냐?” 
그냥 좀 피곤해서.” 
미국 가더니 사람 됐다. 못된 성질 죽고. 파김치 됐네. 미국물이 세기는 센가 보다. 머리도 하고 옷도 입고 친구들도 만나라” 
친구들은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요.”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세상은 천국이다. 부모 이외 어느 누구도 그냥 조건 없이 보호해 주고 사랑해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훗날 이상으로 돌려줘야 한다.

그러고 보니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고 버티다 보면 부모처럼 보듬어 것이라는 착각을 했을 뿐이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한다는 것이 그녀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이미 엄마 뭔가 감지했는지 남자에 관해 묻지 않고 서울에 나와 살고 싶으면 살라고 했다.  
고마워요. 나는 아버지와 엄마에게 것이 없는데 매번 이렇게 주셔서.” 
내가 있는 딸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저 기쁘게 받으면 된다. 불행하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행복이 코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흐르는 데로 순리대로 살면 .”

친정에서 쉬다 두둑한 용돈을 들고 남자에게 연락도 없이 뉴욕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문을 따고 들어가자 부엌 식탁 화병 속에 꽂힌 화려한 꽃이 보였다. 여자가 화사한 꽃이라도 사다가 꽂아 놓으면 ' 죽을 꽃을 들여 샀어?'라고 빈정거리던 남자가 아니던가. 꽂을 버리려다 그냥 놔두었다. 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쓰레기통에서 죽어가는 선인장도 안쓰러워 주워다 키우고 공항에 버려진 꽃들에도 마시던 물을 부어주며 눈길을 주곤했는데. 서울에 있는 사이 남자는 박사학위 여자와 정분이 깊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꽃도 꽃이지만 내연녀가 집안에 들락거린 흔적이 곳곳에 드러났다

우연히 모임에서 내연녀를 만났다. 나이는 여자보다 두세 어린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볶은 머리를 헤어밴드로 뒤로 넘긴 여자의 모습은 예쁘지는 않지만, 지적이. 남자들 무리에서 당당한 태도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분위기를 살렸다. 전혀 그녀를 의식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남자처럼 이미 침묵에 익숙해진 그녀도 내연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의 행복은 내연녀가 나타남으로 시작됨을 여자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 내연녀가 있으면서도 여자의 생일이라고 먼 곳가지 한국장을 보러 함께 와주고 갑자기 친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가 친정에서 두둑한 봉투를 들고 돌아와 설까? 설마 인간이라면 그렇게까지 이기적일 수는 없다. 여자는 남자의 변한 태도를 지켜보며 불안했다. 불안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여자가 빌고 들어가면 남자는 함께 의향은 있을까? 돌아간들 찾아온들 결혼이 과연 이어질 있는 것일까?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고도 그를 도피처로 이용한 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여자의 뇌리에서 빙빙 돌았다.

그래도 혹시나 남자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해 가을의 시간을 보냈다. 시계 바늘이 여자의 몸을 수놓듯이 찔렀다. 갑자기 이름도 생김새도 색깔도 없는 새가 가슴 속을 파고들어 와서 함께 살았다. 새가 파드닥파드닥 날갯짓할 적마다 허둥대며 괴로웠다. 어느 때는 시간 동안 계속되고 어느 때는 며칠 갔다. 밥맛을 잃고 누웠다. 그러다 갑자기 새가 안전한 둥지를 찾은 조용해지면 슬그머니 일어나 기운을 차리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녀가 밟는 잔디마다 쳐다보는 나무마다 색을 잃은 죽어 보였다.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걷다가 열려있는 미국 교회에 슬그머니 들어가 조용히 뒤에 앉아 울다 나왔다. 밖을 쏘다닐 때는 그나마 가슴속에서 날갯짓하던 새도 바깥 공기가 좋은지 조용했다. 여자도 평정심을 찾을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둠이 몸을 감싸며 뚜껑을 열고 들어가 눕는 듯했다. 밀폐된 공간에 누운 목젖이 조여왔다. 어쩌다 잠이 드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다. 잠을 자면서도 남자가 문을 따고 들어온 같기도 하고 나간 같기도 비몽사몽에 시달렸다. 남자가 평상시 하던 대로 커피 끓이느라 달그락 소리가 들리고 커피 향에 코를 벌름거렸다. 드디어 남자가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눈을 뜨다가 실망해 자리에 도로 누워 생각에 잠겼다.

여자는 낙엽처럼 떨어져 쓰러지고 으깨어졌다. 나뭇잎을 흔들어 떨어트린 나무처럼 사랑도 정도 없는 사람에게 매달려 살려고 왜 여자는 애타게 기다리는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 남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여자 혼자만의 문제다. ‘이미 남자는 새로운 인연과의 관계에 충실하며 행복해 있을 텐데.’ 눈물이 말랐다. 그녀를 미치게 휘젓던 생김새도 색깔도 없는 새는 가슴에서 나가 멀리 날아갔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오지 않는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 있을까? 잠이 들었는가 하면 창을 치는 바람 소리에 깼다가 다시 잠들면 꿈속에서 헤맸다. 그나마 잠잘 때만은 현실을 잊을  

이렇게 기다리는 생활을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서서 해결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기다리면 남자가 해결해줄 것이다. 버림을 받은 여자는 철저히 상처를 받아야 미련을 버리고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마냥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서류를 받아든 여자의 손이 떨렸다. 뜯지 않고 식탁에 던졌다. 한동안 팔짱을 끼고 봉투를 째려봤다.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잔을 들고 창밖을 멍하니 내다봤다. 연말 내내 내리던 눈이 그쳤다. 쌓인 눈이 바람에 방황하듯 흩날렸다어차피 것이 왔다. 오히려 빨리 해결해준 것이 홀가분했다.

원래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다. 본성에 충실한 남자를 도피처로 서둘러 선택한 여자의 다른 이기적인 본성이 있었을 뿐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의 밑바닥을 보고 나면 쉽게 잊을 있다. 여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알았고 이런 헤어짐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에 사인하며 피식 웃었다.

남자가 내연녀와 서둘러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째 말보다 달릴 같은 번째 말로 갈아탄 것이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용케 갈아 있는 능력은 그의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탁월한 능력이다. 시어머니는 종종 둘째 며느리인 여자에게 
며느리가 돈을 벌어 집을 샀다.”
고 자랑했다. 돈을 벌면 
친정에서 집이라도 사줘야 하지 않겠냐?” 
말하며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다 없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차곤 했다.

귀에 생생한 엑스 시어머니의 쯧쯧쯧 차는 소리에 고개를 젓다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자신을 탓하며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기차 창밖은 칠흑처럼 어둡다. 차창 피곤한 사람들의 모습은 정지된 고요하다. 내려야 역에 거의 왔다. 아이는 여전히 새근새근 잔다. 아이의 쌕쌕거리는 소리에 시어머니의 차는 소리가 어둠 속에 묻혔다.

10 괴로웠던 길고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금 생각하니 단지 조금은 지루했던 계절이 아니었나? 애초부터 남자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에 상처가 깊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어둠이 내리는 붉은 석양 속에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의 뒷모습을 보면 차에서 내팽개쳐진 상처만은 아물지 않은 되살아나며 문뜩문뜩 여자를 슬프게 한다. 여자는 아이를 안아 가슴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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