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1, 2021

노마드 라이프

 
 한 여름밤이다. 인파 속을 헤치며 종로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어느덧 바삐 걷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웬일일까? 타야 할 버스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태원으로 가는 버스가 몇 번인가요?” 
옆 사람에게 물었다. 말없이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급히 오는 버스를 향해 가버렸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전화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나니 그 뒷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서서히 초조해졌다. 인적이 끊긴 어두운 밤,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부엌 옆에는 코딱지만 한 어둡고 침침한 방이 있었다. 그곳은 쓰지 않는 물건들과 식자재를 쌓아 놓는 곳이었다. 어른들이 수시로 불러 심부름시키는 것이 싫어 몰래 그곳으로 숨어들곤 했다. 그 작은 은둔처에서 책을 읽거나 오래된 벽지의 무늬를 따라가며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속에 잠겼다가 또 다른 생각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 시선은 빛바랜 벽지 무늬의 한 귀퉁이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슬며시 옆 무늬로 이동하며 오랜 시간 이어졌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사방으로 뻗어 나간 벽지 무늬를 따라 여행을 하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무늬가 끊긴다. 끊긴 무늬에서 이어질 무늬를 찾아내려고 애쓰다 스르르 잠이 들곤했다.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 
엄마는 내가 그곳에 있는지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커다란 주황색 호박 단추가 달린 비단 마고자를 입은 할아버지가 긴 곰방대를 물고 계시다 헛기침을 내며 곰방대를 놋쇠 재떨이에 탕탕 털었다. 낭랑한 쇳소리에 식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식탁 주변에 모였다. 김과 조기 그리고 맑은 뭇국이 놓인 밥상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국을 한 수저 뜨면 약속이나 한 듯 식구들은 수저를 들었다. 저녁때가 되면 뭇국 냄새가 나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꿈이라니! 

 “그동안 꿈속에서 뉴욕 장면이 등장한 적이 없어. 이상하지.” 
언젠가 뉴욕에서 10여 년간 살다가 한국으로 떠나면서 선배가 던진 한마디가 생각난다. 나 또한 뉴욕에서 산 세월이 서울에서 산 세월보다 더 오래되었는데도 꿈속에서는 서울의 한 정류장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총총거린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로 엄마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남편은 동네 아저씨 아니면 길 가다가 마주친 나그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타인이다. 두 아들은 이웃 아이들로 등장한다. 꿈속에서의 기억은 어른이 된 후의 기억들이 들어 올 틈을 주지 않고 머릿속의 주인행세를 한다. 엄마가 그리워 설까? 멀리 떠가는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하며 작아진다. 서울 가는 비행기가 아닐까? 왜 비행기만 보면 고향에 가는 비행기라는 생각이 드는지. 저 비행기를 타면 저녁상을 차리는 엄마가 있는 포근한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초기엔 힘들 때마다 친정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푹 쉬다가 용돈 두둑이 받아오는 재미로 툭하면 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친정은 새로운 식구인 올케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 친구가 주인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기라도 하는 듯 내가 오는 것을 꺼렸다. 
“돈도 많아 누구는 좋겠네.” 
친정아버지에게 일러바치며 불평불만을 토할 때마다 
“너도 시집 잘 갔으면 될 거 아니야. 다 타고난 복이다.” 
본인 건강 챙기기도 버거운 친정아버지는 신경 쓰기 싫다는 듯 내가 고자질할 때마다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 
아버지 말씀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다. 모두가 내가 선택한 나의 탓이다. 
“알았어요. 아버지 나나 잘할게요.” 
뉴욕에서 나는 몇 불에 벌벌 떠는데 굴러들어 온 것들이 펑펑 써대니 대조적인 삶이 서러워 갈 곳이 아니라며 발길이 뜸해졌다. 친정은 더는 끼어들 수 없는 타인들의 무대로 바뀌며 씁쓸한 기억으로 멀어졌다. 
‘고향이란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애틋하게 기억하는 엄마와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더는 고향이 아니다. 고향에 대한 시각적 기억의 목마름이 오면 화질 좋은 인터넷으로나 들여다보고 달래며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세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엄마’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아이를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빛의 속도로 달려가곤 했다. 움직이며 소리 내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감정을 표현하는, 엄마만을 찾는 뼈처럼 깨끗한 아이들은 내가 창조한 작품 중에서 가장 걸작이다. 아이들만 보면 힘이 솟고 벌어진 입에서는 감탄이, 목소리는 부드러워진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했다. 이렇게 소중한 작품에 작은 흠집이 생기면 어쩔까, 상처가 나면 어쩔까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귀를 곤두세우고 항상 아이들 곁에서 소중히 다루며 지켰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붓을 놓지 않으려는 화가 남편의 고뇌를 지켜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붓을 놓는 순간 가족의 이별을 예상했다. 일주일에 닷새 일하는 남편에게 나흘만 일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심한 마약 중독자가 약을 조금씩 줄이듯 하루하루를 줄이다가 마침내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남편이 하루씩 일을 줄일 때마다 생활고로 불안했지만, 다행히 줄여진 시간 만큼 작업에 전력하니 그림이 조금씩 팔려 일하지 않아서 벌지 못한 그것을 메울 수 있었다. 지금 남편은 오나시스도 피카소도 아니지만, 온종일 작업실에서 지내는 시간 그것이 곧 작가로서의 자그마한 기쁨이다. 

 건강하고 밝게 자란 아이들은 집을 떠나 넓은 세상을 훨훨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와 편히 쉴 수 있게, 재충전하고 또다시 안전하게 날아갈 수 있게 비행장의 활주로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모금 자리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학교와 직장으로 세상을 떠돌던 아이들은 그들이 낳고 자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더는 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여자와 혼자만의 자유가 필요하다.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늙은 여자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선택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원하는 삶에 충실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일에 집중하며 바삐 살는 것이다.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30년 동안 잘살아 보겠다고 바둥거렸던 보금자리를 떠나 맨해튼으로 거처를 옮겼다. 

 남편이 아침에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나면 커피잔을 들고 멍하니 허드슨강을 쳐다본다. 어린 시절 벽 무늬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듯 강물줄기을 바라보며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발버둥 치는 나를 버리고 물살을 살살 어루만지며 물의 순리에 따르면 물속에서 살아남는다. 아집을 부리며 물을 역행하면 허우적거리다 물에 빠진다.’ 
삶은 수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던 2020년 초, 어느 날 
“엄마, 밖에 나가지 말아요.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돼요. 조심하세요.” 
어릴 때 아이들은 내 말을 잘 들었다. 이제는 늙은 여자가 젊은 아이들 말을 잘 들어야 할 때다. 코비드에 걸리지 않으려고 집과 공원에서만 빙빙 돌며 격리 생활에 충실했다. 격리 체질인 듯 예전보다 더욱더 일에 빠져 생산적인 하루하루를 보냈다. 걱정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부지런히 백신 예약을 했다. 

 일 년 만에 지하철을 타고 초행길을 나섰다. 코비드-19 백신을 맞으려면 긴 줄에 오래 기다릴 것을 예상하고 중무장을 했다. 먼 길을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걸음이 불안정하고 불안할까? 오랜 격리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서 걸어갈 수 없는 낯선 거리는 멀다는 생각이 들어설까? 집을 중심으로 사람도 길도 멀리 뚝 뚝 떨어져 나간 느낌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두리번거렸다. 경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친절하게 물어온다. 
“백신 맞으러 가지요? 길을 따라 3블록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2블록 가면 있어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얼어서 빙판이다.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빙판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에서 오던 젊은 남자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고 빙판이 끝나는 지점까지 부축해 줬다. 고맙다고 말했던가? 아닌가? 갑자기 엉덩방아를 찧고 나니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 표시를 못 한 것에 신경 쓰면서 어리버리 하다가 하마터면 또 넘어질 뻔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긴 줄이 없다. 황당했다. 두리번거렸다. 아이패드를 들고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아이패드에 내 전화기에 예약한 밥 코드를 맞댔다.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모더나’ 백신을 아주 쉽게 맞았다. 

 돌아오는 길, 집 가까이 다가갈수록 팔다리는 힘이 빠지고 걸음걸이가 나른해졌다. 아파트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반기듯 감싼다. 오늘따라 집이 왜 이리 깨끗하고 아늑해 보일까? 집안에 안기듯 몸을 던졌다. 

 코비드-19는 제 역할을 다 한 듯 맥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언젠가는 힘을 키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코비드에 걸리지 않았지만 코비드 환자만큼이나 긴장하며 살았다. 거리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쏟아져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물결은 거리를 흔들었다. 혼돈 속에서 고요를 즐기며 인내하고 버티던 나도 달려 나가 생존 기념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파의 빈 틈새를 비집고서 파도 타듯 그들과 함께 휩쓸려 갔다. 바람결에 떠도는 이름 없는 야생화처럼 자유롭게 집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세상을 떠도는 크루즈에 올랐다. 

 노인이 구급차 침대에 실려 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배에 비해 나이 든 노인들이 많다. 뷔페에서 할아버지 둘이 만나자마자 반갑다며 지팡이를 치켜들고 기운 빠진 펜싱 흉내를 냈다. 남편이 살아생전에 만들어 준 지팡이라며 산신령이나 들고 다닐 것 같은 키 크기의 지팡이에 의지한 할머니도 있다. 
"메디칼 팀! 메디칼 팀!"
요란한 호출 비상벨이 울렸다. 아무래도 이번 배는 잘못 탄 것 같다. 
“우리 남편 못 봤어요?” 
뷔페에서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는데 할머니가 묻는다. 
“조금 전에 네 남편과 함께 밥 먹고 있었잖아요?” “나 결혼한 지 75년 됐는데 남편을 잃어버렸어요.” 
결혼한 지 75년이 됐다면 거의 100살은 됐다는 얘긴데 80 정도로 보이는 것이 치매가 왔나 보다. 치매로 집을 나가 잃어버릴까 봐 아예 남편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배에 가둔 것은 아닐까? 흠,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야.

 스파에서 만난 할머니는 두 달 반이나 더 배에 남아 아프리카를 돈단다. 
“지루하지 않나요?” 
물었다. 
“집에 혼자 있다 죽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두려워요. 집에 있으면 청소하고 요리해줄 사람 불러야지. 빌 내야지. 여러 잡다한 일들에 신경 쓰지만, 배에 거주하면 오히려 비용이 적게 들고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아요.” 할머니의 말이 그럴듯해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맞아요. 얼마 전, 뉴욕 타임스에서 읽었는데 어떤 할머니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남편이 죽고 재산을 정리한 후 7년 동안 크루즈에 거주한 데요. 배가 정박할 때마다 이미 다 둘러봐서 내리지 않는데요. 다만 크루즈 클로젯이 작아서 많은 옷을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아시아와 터키에 정박할 때는 옷을 쇼핑하려고 내린다는군요. 그 인터뷰를 보고 나도 더 나이 들면 자식들을 더욱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크루즈에서 거주할까 생각 중이에요.” 

 크루즈 여행이 수박 겉핥기식의 여행이라 한곳에 머물며 그곳의 문화를 오래 즐길 수는 없다. 하지만 잠자리 들기 전 다음 날 닻을 내릴 항구를 상상하는 맛, 공기도 좋고 음식과 잠자리가 정갈해서 즐긴다. 어느 복권 탄 부부가 외부와 단절하기 위해 크루즈로 잠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이따금 정박하는 항구로 찾아와 만나면서. 

 “아들들아, 먼 훗날, 그리 멀지도 않았나? 엄마가 기력이 쇠하면 크루즈에다 버릴래? 너희가 만나고 싶으면 항구로 찾아오고 그것도 귀찮으면 오지 않아도 괜찮아.” 
두 아들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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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치마 속

“Hi, I remember you.” “미안.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가에게 ‘I am from my mother’s belly.’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꽤 인상적이어서 너를 기억해요.” “어! 그랬어요. 크루즈에 몇몇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