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6, 2021

그때 그곳으로


“너 거기가 어딘지 아니?”

“어디?” 

“추운 겨울에 시외버스 타고 무작정 가다가 내렸던 곳?” 

너는 기억하고 싶지도 관심도 없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너의

시선은 창밖 빛바랜 청바지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지나가는 키 큰 남자를 따랐고 몸은

관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우리의 만남은 동문서답하는 식으로 항상 엇갈렸지만, 대학 시절 내내 함께했다. 


함박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어느 날,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너는 

“갈 곳이 있어. 이런 날 그와 함께 갔던 곳이야. 따라와.”

시외버스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커다란 호수가 있는 마을을 보자 너는 나보고 내리라고

눈짓했다. 호수 건너 띄엄띄엄 지붕 굴뚝에서 뿌연 연기가 짙은 회색 하늘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빙판을 굳게 다문 입술로 천천히 미끄럼을 타던 너는 갑자기

절규했다. 마치 호수 건너에 있기라도 한 너의 남자친구 이름을 부르듯이. 

“한권택~”

소리는 빙판 위를 미끄러져 멀리 갔다가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한권택~  권택~  택~’

빙판을 달려 건넛마을로 가려는 발밑에서 얼음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차가운 물

속에라도 첨벙 빠질 듯 놀라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얼기설기 금이 간 빙판을 조심조심 나와서

멀리 보이는 갈 수 없는 마을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한동안 서로 쳐다봤는데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하다니!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비가 곧 떨어질 것 같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린

날이었다. 새로 장만한 회색 원피스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너는 손을 흔들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야 너 멋지다. 그 원피스 어디서 샀어. 나 좀 빌려줘. 토요일의 미팅에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아.”

너는 미팅에 즐겨 가곤 했지. 미팅하러 가기 전날, 옷을 빌리러 나에게 오곤 했는데. 남자들은

너의 잘 빠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 까무잡잡한 피부와 큰 눈의 이국적인 너를 망설임

없이 선택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과 만남은 길지 않았다. 

“끝났나 봐. 연락이 없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투덜거리곤 습관적으로 한 남자와 끝나면 또 다른 남자를 찾아 미팅에

가곤 하지 않았니?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 빙판에서 미끄럼을 탔던 그날도 너는

남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애가 타서 무작정 시외버스에 올라타자고 했잖아. 


“생각나니? 우리 산장에 갔던 것. 그 날밤 잠이 오지 않아 밖에 나가 별을 보며 추위에 떨었는데.” 

“언제 또~?” 

“눈이 쌓여 신발이 젖을까 봐 우리가 좋아했던 남자애들 커다란 군화를 몰래 하나씩 신고 질질

끌며 하얀 숲속을 거닐었잖아.” 

“아~. 그거.” 

“그때 그곳이 어디였어?” 

“몰라. 군화 이야기하니까 가물가물하긴 한데 기억이 잘 안 나.” 


네가 신은 군화의 그 남자를 너는 무척 좋아하지 않았니. 그를 만나기로 한 날, 하필이면 네가

수영 시험을 봐야 하는 체육 시간과 겹쳐 그 남자를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잖아. 그 남자는

너를 만나기 위해 눈 오는 밤 너의 집을 찾아 헤매다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지

않았니? 난 이따금 하얀 눈밭 위를 담요처럼 덮은 새까만 밤하늘에서 움직이는 별들이 가득한

그 산장이 어디였을까 궁금하다.  

“그 남자와 어떻게 끝난 거야?”

너는 가슴 아픈 옛일을 수집하듯 잠시 말이 없더니

“군대 갔다고 했잖아.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만났어.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있냐며

차갑게 돌아서 갔어. 그 남자 내가 무척 좋아했는데. 그가 검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바이올린 연주하던 것 생각나. 지금도 그를 잊을 수 없다. 병문안 가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남자를 잡지 못해 인생이 뒤틀린 듯 몹시 서글픈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고는 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 남자들은 지금 무얼 할까?”

내가 턱을 팔에 괴고 물었다. 

“넌 왜? 쓸데없이 옛일을 죄다 떠올리며 나를 심란하게 하니? 기억해서 뭐 하려고?” 

“네가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묻길래 그때 그곳으로 데려가 줬으면 해서.”


더는 가난한 늙은 부모와 함께 사는 오빠 부부 밑에서 아웅다웅 사는 것이 짜증 나 죽고

싶다며, 집을 나와 살길은 결혼뿐이라며 갑자기 결혼했지. 그동안 사귄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고 나를 찾아왔었는데. 

“누구야. 갑자기 결혼은?”

너는 그냥 별일 아니라는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동네 입구에 있는 문방구점 아줌마가 소개해 준 명문대 나온 남자야. 키도 작고 시골

출신으로 외모는 별 볼 일 없지만, 자수성가한 사람이야. 그냥 다 잊고 결혼하기로 했어.”


우리는 오랜만에 천호동에서 만났다. 아마 네가 천호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다.

너의 표정은 지루하지만 안정된 삶에 만족하는지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글쎄 한나를 낳았는데 머리숱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래도 머리칼이 있는 듯 매일 정성스럽게

빗겨 준단다.”

너는 둘째 한수를 낳고 강남으로 이사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한동안

나에게 연락이 없었다. 


강남 신사동 가로수 길에서 샛길로 빠져 조금 걷다 보면 좁은 삼거리 모퉁이에 빵집이 있다.

빵집에 들어서자 향긋한 당과 밀가루가 어우러져 아득히 빠져드는 폭신한 식감이 진동했다.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이 흘렀다. 가슴을 조였다 풀고 조이며 쓸쓸한 가을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음률이 작은 빵집 안을 휘감았다. 삼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진열장 오른쪽 뒤에서 하얀 유니폼을 입은 하얀 얼굴의 여자가 빵 반죽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가 손수 꾸려나가는 빵 가게 주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할 때 네가 들어왔다.


너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딸아이 옷을 빌려 입은 듯 검은 청바지와 GUESS 사인이 쓰인 흰

배꼽티 위에 브라운 가죽 재킷 깃을 올리고 쭈뼛쭈뼛 나에게 다가왔다. 앞이마를 문지르며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웬 키 큰 남자가 콧등을 문지르며 네 뒤에서 멈췄다. 남자는

바바리 깃을 올리고 앞머리를 흩트려 내린 꼴로 사색에 잠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박제되어 틀에 갇힌 듯한 너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냐고 눈으로 묻고는

시큰둥하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너는 숨바꼭질 하는 시선으로 나와 그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남자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남자는 굳게 다문 입술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어올

때와 같은 자세로 줄레줄레 빵집 문을 열고 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이혼했어?”

“이혼은, 그냥.” 

자유분방함을 대담하게 보여줘도 내가 이해할 거라고 착각한 것이 실수였다는 듯 너는 어깨를

으쓱하고 커피잔 꽃무늬를 들여다보며 잠시 말이 없더니 

“이 근처에서 만났다가 헤어지려고 했는데 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

“이왕이면 좀 근사한 사람을 만나지. 어째 네 남편보다 시원치 못하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섰는데 친절하게 도와주길래 고마워서 차 한잔 마시다 친해졌어.

보기보다 꽤 로맨틱해.” 

“왜, 네 남편이 어때서? 돈도 잘 벌고, 성실하잖아.” 

“우리 남편, 장편이라 지루해, 단편이 읽기가 흥미진진하잖아.” 

너는 엉뚱한 말로 얼버무리고는 잔뜩 찌푸린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날따라

서둘러 헤어졌던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너에게 전화했다. 너는 골프치러 가자고 했다.

“골프 칠 줄 몰라.” 

골프 칠 줄 모른다는 내 대답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조건 나를 골프장으로 끌고 갔다. 

“넌 미국 가서 골프도 안 쳤니? 이 좁은 한국에서도 다들 치는데 그 넓은 미국에서 골프도 안 치다니!.”

한눈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하고 아담한 산봉우리, 그 봉우리를 돌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는 언덕에 나를 앉혀 놓고 아쉽다는 표정으로 너는 골프 하러 갔다. 

“오래 기다렸지. 네가 기다릴 것 같아 오늘은 일찍 끝냈어.” 

너는 선글라스를 벗고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또 넘기며 내 표정을

살폈다. 지루하면 두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머니 바닥을 매만지는 내 습관을 네가

알았다면 너는 그쯤에서 끝났어야 했다. 너는 집요한 눈빛으로 골프에 대한 열정을 저녁해가

산봉우리 너머로 꼴깍 떨어질락 말락 할 때까지 열강했다. 

“골프나 배워. 골프가 건강에 얼마나 좋다고. 세상에서 골프처럼 재미있는 것은 없다.

상류층과 교류하려면 골프도 칠 줄 알아야 해. 미국에 돌아가면 골프 꼭 배워. 다음엔 함께 치게.”


뉴욕으로 유학 보낸 딸 한나를 방문한 너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나에게 내가 생전 가 본 적이

없는 5번가 플라자 호텔 옆에 있는 Bergdorf Goodman 백화점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채리

빛 머리칼 아래 너의 큰 눈이 나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더니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너 어디서 옷 사 입니?”

“브루클린에 있는 Beacon’s closet이라는 헌 옷 파는 곳에서. 계절 바뀔 때만 일 년에 두세 번.”

너는 더는 나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Bergdorf Goodman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꼴랑 속옷 한 벌, 가방 한 개와 드레스 한 벌을 샀는데 만 오천 불이 넘었다. 더

사려는 너를 말릴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카드 정지가 되었다는 점원 말에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쇼핑 백은 아주 가벼워 보였다. 저게 정말 만 오천 불어치일까? 설마 하는 생각으로

네가 든 쇼핑 백을 흘끔흘끔 보며 우리는 센트럴 팍 안으로 들어갔다. 


벤치에 앉자마자 너는 흰색 위에 빨간색 지붕을 얹은 말보로 담뱃갑을 꺼냈다. 네가 사막을

방황하는 카멜 담뱃갑을 꺼내는 것이 너와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내 뇌리에

스쳤다. 너는 세련된 손놀림으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깊이 빨더니 느리게 내뱉었다. 한

개비에 불을 붙여 나에게도 줬다. 그러고 보니 추운 겨울 호수 빙판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건넛마을로 갈 수 없었을 때도 우리는 담배 한 대씩을 입에 물고 멀리 지붕 위로 올라가는 밥

짓는 연기처럼 뻐끔뻐끔 피던 생각이 났다. 너는 나와 헤어질 때 담뱃갑을 내 가방에 넣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딸에게 들키면 안 돼. 네가 가지고 있다가 다음 만날 때 가져와.”

“야. 뭘 다 큰 딸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숨기냐. 어차피 담배 냄새 뱄을 텐데. 딸하고 맞담배 피워.”

“교육상 그러면 안 되지.” 

너는 껌을 잘근잘근 씹으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모범적인 모습으로 멀어져갔다. 


며칠 후 우리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서 만났다. 나를 보자마자 너는 손을 입에 대고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내가 건네준 말보로를 몹시 고팠던 양 달게도 빨았다. 그러고는

종이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나에게 줬다. 피식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야, 이 번호로 전화 좀 걸어봐.”

“누군데, 네가 걸면 될 거 아니야.”

“영어로 해야 해. 어제 길을 가는데 멋진 남자가 자꾸 따라오며 얘기하자는 거야.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다가 헤어질 때 전화번호 주더라. 내가 영어로 전화하는 게 쉽지 않아서.”
“너 돌았구나. 내가 왜 모르는 남자에게 전화해? 하고 싶으면 네가 해. 너 옛날에 영어

배운다고 미팔군에 근무하는 미국 남자와 데이트도 했잖아.”

“전화해서 우리 함께 그 남자 만나서 저녁 먹자. 그 남자 멋있어.”

“미쳤어. 너 혼자 만나. 나 집에 가서 저녁밥 해야 해.”


너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명품으로 휘감은 네가 지루한 장편인 너의 남편과 함께 뉴욕을

방문했을 때다. 우리는 드라이브해서 업스테이트 뉴욕 콜드 스프링에 갔었다. 지루한 장편인

네 남편과 함께라서 너는 기억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네 남편은 너와는 달리 검소한

차림이었다. 성실함이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묻어났다. 소탈하면서도 듬직한 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너의 시선은 이미 멀리 가 있었다. 너는 식당 근처 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다가 기차가 떠나자 먼 산을 공허하게 올려다봤다. 너에게 말보로라도 꺼내 불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남편 앞에서는 현모양처인가 본데 그럴 수가 없어 아쉬웠다. 식사가

끝나고 빌이 왔을 때 너의 남편이 지불한다며 내 남편에게 물었다. 

“팁은 얼마를 줘야 할까요?”


너는 너의 남편을 쫀쫀하고 답답한 인간이라는 듯 흘겨보다가 포기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는

듯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너의 지루한 표정을 쳐다보며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필름

돌리듯 빠르게 리와인드 했다. 너는 꿈을 꾸는가 싶더니 이내 깨어난 듯 애써 네 남편에게

흔들리는 미소를 짓고는 일어나자고 했다. 

우리는 순수한 어린 시절부터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인가? 너무 오래된 기억을 되짚다 보니

너의 일이었는지? 나의 일이었는지? 헷갈린다만, 그냥 누구의 일이었든 간에 우리가 함께

했던 그때 그곳에서의 장면들이 이따금 나를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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