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 2022

사라진 이웃


“뉴욕 생활에 지쳤어. 서울에 돌아가서 강사 자리라도 알아볼 거야. 이제 우리 
그만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지자.”
밤새 고민했는지 횡 들어간 눈에서 안경을 벗어 느린 몸짓으로 닦으며 룸메이트가 말했다.

1984년 초, 맨해튼 소호에서 함께 살던 룸메이트와 우리 부부는 매년 치솟는 렌트비를 감당할 수 없어 고민해오던 터다. 서로가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내주기를 바라며 눈치 보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먼저 입을 떼 줬다는 것이 고마웠다. 우리는 아무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남편과 나는 집세가 싸면서 작업과 생활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에 갔다. 다리 밑 이스트강가에 높이 솟은 굴뚝을 축으로 거대한 도미노 설탕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빈 창고를 기웃거리며 강가를 따라 북쪽으로 발을 옮겼다.

방 한 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마냥 걸었다. 브루클린이 끝나고 작은 샛강을 건너면 퀸스가 시작되는 지점, 그린포인트 뉴타운 강가에 이르렀다. 염색 공장을 하다가 폐업한 빈 창고 5층 검붉은 거대한 건물이 막다른 길인 양 우리를 가로막았다. 더는 갈 곳을 잃었다. 우리는 피곤한 다리를 쉬려고 멈췄다. 그때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이 없는 허름한 회색 문짝에
‘RENT’ 사인을 봤다.

건물 5층에 400평이 넘는 뻥 뚫린 스페이스에 들어섰다. 맞은편 벽 쪽에 허리에서 시작해서 천정까지 치켜 올라가는 수십 개의 커다란 창문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낡아서 덜걱덕거리는 창틀 소리가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수많은 창문 밖으로 이스트강 건너 맨해튼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발뒤꿈치를 치켜들어 더러운 강물 위를 어른거리는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건물의 외곽이 물과 바로 연결되어있다. 비록 못생긴 큰 건물이긴 하나 강물에 떠 있는 베네치아의 한 귀퉁이를 연상시켰다.

한 남자가 백목으로 창문 두 개씩 들어가게 금을 그으며 말했다.
“살고 싶은 스페이스를 마음대로 골라요. 그리고 금 위에 벽을 세우고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을 쓰는 조건으로 렌트를 싸게 받을게요.”
창문 두 개씩 들어가게 자른 공간의 크기는 30여 평이었다. 한층 높이가 보통 집 두 배만큼 높았다. 작업하기 딱 좋은 공간이다. 다른 세입자들은 바닥이 고르고, 천장이 깨끗한 스페이스를 골랐다. 우리는 천장과 바닥이 엉망인 공동화장실 가까이에 있는 스페이스를 택해서 파이프를 연결해 우리만의 욕실을가질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물 위에 떠서 보석처럼 빛나는 거대한 크루즈 같은 맨해튼을 바라봤다. 
“한번 사대문을 떠나면 다시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서울 중구 남산동을 떠나 이태원에 살면서 친정아버지가 끊임없이 내뱉던
푸념이 떠올랐다. ‘한번 맨해튼을 떠나면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와 같다.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자다가 돌아누우며 눈을 떴다. 옆자리에 웬 외간 남자가 누워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깜짝이야. 뭐야? 왜 그래. 얼굴이 울퉁불퉁 난리야.”
한여름이 되자 아침에 일어난 남편의 얼굴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처럼 변해 있었다. 더러운 샛강에서 우글거리는 모기떼에 뜯긴 것이다. 복도에 나가다 돌아 들어 온 남편이
“옆집 남자는 나보다 더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어.”
우리의 신혼 첫 여름은 모기떼와 싸우며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람이 부는 날은 열세 블록 떨어진 뉴타운 크릭(Newtown Creek) 오물처리장에서 나는 오물 냄새가 우리가 사는 건물 쪽으로 풍겼다. 똥통에 들어앉은 듯 역겨웠다. 벽을 세우고 공동 화장실로 파이프를 연결하느라 우리는 무일푼이 되었다. 모기와 오물 냄새와 엘리베이터를 쓸 수 없는 웬만한 건물로 치자면 10층 높이인 그곳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등산하듯 버텼다.

기다리던 겨울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낡은 큰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강풍은 히팅도 없는 공간을 냉동고로 만들었다. 차라리 모기떼가 그리웠다. 한쪽 코너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전기 히팅을 놓고 낭만적이라며 좋아했던 창가를 멀리한 채 떨었다. 그해 봄은 왜 그리도 더디게 오던지! 봄은 천천히 느리게 나를 애태우며 다가왔다. 꼬챙이처럼 마른 내 몸 위에 두터운 옷이란 옷은 모두 끼어 입고 웅크린 둔한 몸짓으로 움직였다. 밖은 오히려 따뜻했다. 왜 홈리스들이 여름에도 겨울옷을 벗지 못하는지를 알 것 같다. 건물 앞 쓰레기더미에 팔뚝만 한 쥐들도 파르르 떨며 내가 지나가도 움직이지 않고 볕을 째며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같은 배를 타고 향해하는 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쌓인 눈이 녹는 곳으로 주춤주춤 걸어가 벽에 기대어 해를 바라봤다.

아득하게 뿌연 불안전한 삶의 피로 속에서 나는 임신했다. 플렛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공장 운영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따금 운이 좋은 날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운영자에게 사정하면 주위를 살피며 타라고 눈짓하곤 했다. 운이없는 날은 배가 부른 나를 남편이 위에서 끌어 올리고, 뒤에서 밀며 5층을 오르내리다가 드디어는 아예 출입할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아직도 렌트가 싼 그 건물에서 피로를 끌어 앉고 살고 있지 않았을까?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스승의 채찍과도 같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우리는 아이를 위해 새로운 곳을 향해 힘껏 날갯짓했다. 그러나 서투른 날갯짓으로 날아서 둥지를 튼 곳은 그곳에서 서너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나의 지지리 궁상스러운 이야기를 잠깐 멈추고 그리포인트라는 동네를 소개해야겠다.

17세기 해안선을 항해하던 선원들은 돌출된 풀밭인 녹색 지점에 부딪혔다. 나중에 지형이 울창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그린포인트(Greenpoint)란다. 내가 처음 맨해튼을 떠나 그린포인트의 돌출된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녹색이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총 없이 서부의 황량한 개척지를 개간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간 심정이었다. 그 후 많은 화가가 몰려와서 목청 높여 오물처리장
냄새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황량했던 사막에 나무를 심어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름에 걸맞은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린포인트는 해안 부두 노동자들인 아일랜드인과 독일인들이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이 돈을 모아 더 좋은 이웃을 찾아 떠나면서 폴란드 이민자로 대체된 동네다. 대부분 폴란드 남자들은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여자들은 건물 청소가 주요 직업이다. 물론 군데군데 그들과 섞이지 못하고 미운 오리 새끼처럼 푸에르토리칸도 살았다.

오래전 그린포인트의 아파트 대다수는 욕실이 없었다. 지금은 콘도로 바뀐 건물이지만, 1903년, 휴론 스트릿(Huron St)에 오픈한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을 연상시키는 건축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하루 평균 천 명 이상이 이용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점점 많은 사람이 각자 아파트에 실내 욕실을 가지게 되면서 1950년대, 문을 닫았을 때 사용자는 20여 명으로
줄어다고 한다. 

주거 건물구조는 대부분 1900년대 지어진 3, 4층으로 맨해튼 다운타운 오차드 스트릿에 있는 tenement museum과 똑같다. 욕실은 공중목욕탕을 사용하다가 아파트 부엌 한쪽에 꾸겨 넣은 모습으로 매우 작다. 아파트 실내 구조는 써브웨이 모습으로 오픈된 방들이 줄지어있다. 길가 창 쪽으로는 거실 그리고 중간에 침실과 작은 공간이 있고 뒤뜰 창 쪽에는 부엌과 욕실이 있다. 거실과 부엌에 벽난로가 하나씩 있다. 부엌 벽난로에는 무쇠솥을 걸어 놓고 음식을 만든 흔적이 있었다. 내가 처음 이사 들어갔을 때만 해도 벽난로 옆에 반은 더운 바람이 나오게 되어 있는 난방용이고 반은 조리용 오븐이 있었다. 지하실에는 각 아파트 전용 석탄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다. 건물마다 부엌 창 쪽에 숨통 트이는 뒤뜰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두 집 건너에 폴란드인 데비드 엄마가 산다. 뒤뜰 창밖으로 그녀가 뒤뜰에 있는 훈제 소시지(킬바사Kielbasa ) 만드는 창고를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와 나는 브루클린 우드홀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간호사에게 내 이름이 빨리 불리기를 초조히 기다릴 때 그녀가 파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내 옆 빈자리에 앉아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의 둘째 아이는 12월 18일, 데비드는 12월 23일에 태어났다. 거의 일곱 달가량 병원 복도에서 만나 온 셈이다. 이민자인 우리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고 남보란 듯이 잘 살 수 있을까? 이야기하며 시립병원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을 서로 달랬다. 폴란드에서 온 덩치 큰 그녀와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가 12월이 되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에?”
한동안 아이를 키우느라 바빠서 소식이 없었던 데비드 엄마가 내가 사는 건물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 놀라서 내가 물었다.
“저기 블록 끝에 보이는 건물을 사려고.”
내가 사는 건물 블록 끝에 있는 아파트 16개와 가게가 두 개나 딸린 건물을 사려고 왔다는 것이다. 우드홀 병원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이 같은 블록에 살게 될 줄이야.

그녀는 미국에 오자마자 10년 넘도록 유대인 입주 가정부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데비드 아빠 역시 철공소에서 오랫동안 일해서 저축했다. 이 둘은 결혼하면서 돈을 합쳐 건물을 샀다. 그렇게 마련 한 집이니 어찌 쓸고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 앞을 쓸고 있는 그녀를 보면 그녀의 살아온 옛 모습이 내 머릿속을반사적으로 훑으며 지나간다. 
“내가 맨해튼 저택에 사는 유대인 가정부로 일할 때 여주인은 나에게 항상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바닥을 닦으라고 했어. 내 무릎 좀 봐. 살색이 변해 검고 군살이 생겼잖아. 난 그 집에서 10년 넘게 살며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어.”
표정이 항상 어두운 데비드 아빠를 볼 때마다 나는 또 다른 상념에 빠진다.
“우리 남편 귀에서 소리가 나서 몹시 괴로워해. 동양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데 혹시 너 아는 한의사 있니?”
“저런,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데?”
“철공소에서 일하다가 머리 위에 매달린 둥근 쇳덩어리가 떨어지며 그의 머리를
쳤어. 그 후부터 귀에서 소리가 나서 괴롭데. 평생 소리를 듣고 살아갈까 봐 걱정이야.”

그녀와 나는 아이를 키우며 거의 매일 공원에서 만났다. 그녀는 더운 여름날 마시고 난 빈 주스 통에 물을 넣어 얼려서 데비드에게 먹이곤 했다, 주스 통 레이블이 닳아 상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알뜰히 살았다. 모기지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업스테이트 뉴욕에 52에이커의 땅도 마련한 부자가 되었다. 자기 땅에서 사슴을 잡아서 킬바사(Kielbasa; 폴란드 소시지)를 만들어 나에게 주곤
했다. 
“너 오바마 찍을 거니? 흑인은 안돼. 동양인이라면 모를까? 절대 오바마 찍지마.”
그녀가 주위를 살피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대부분의 폴란드인은 검은 사람들을 멀리한다. 동네는 한마디로 훤하다 못해 환하다. 검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동양인도 없다.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 전교에 베트남 아이 한 명 그리고 우리 두 아이만 동양인이었다. 단합이라도 하는 듯 폴란드 집주인들은 검은 사람들에게는 아파트를 세주지 않는다.

데비드 엄마는 그렇게 알뜰하면서도 옷 쇼핑을 하러 풀턴 스트릿에 자주 갔다. 폴란드를 방문 때마다 커다란 가방 다섯 개 가득 옷으로 꽉꽉 채워간다. 폴란드인은 청바지와 가죽옷을 무척 좋아한다.
“나 이번에 고향에 가다가 죽을 뻔했어. 독일 함부르크에서 폴란드 바르샤바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에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화장실에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가방이 너무 많아서. 밖에 놔두고 들어가자니 누가 집어 갈 것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소변을 참느라고 죽다 살아났다.”

내가 사는 건물에 살던 노 부인도 유대인 집 가정부로 일했다. 그녀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고급 모피와 가죽으로 휘감고 다녔다. 아이들 학교에서 만난 학부모가 나에게 너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와 같은 건물에 사는 그 우아한 여자가 건물 주인이냐? 주일마다 비싼 옷을 매번 갈아입고 성당에 와서 사람들의 시선을 엄청나게 받는데. 부자인가 봐.”
남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이 노 부인 남편의 직업은 허구한 날 박스에 옷을 가득 담아 플라스틱 랩으로 둘둘 감아 폴란드로 보내서 옷 장사를 한다. 동네 옷 가게는 발 들여 놓을 틈 없이 장사가 잘됐다. 

공산국가에서 온 민족이라 설까? 이들에게는 서비스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 폴란드인 여자 점원이 있는 가게에 동양인 내가 들어서면 ‘너 뭐야?. 나는 너보다 우월한 백인이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겠지. 살려면 빨리 사고. 사지 않을 거면 빨리 꺼져.’ 마치 어디에 있다가 굴러들어왔냐? 는 듯한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훑는다. 물건 가격이라도 물어볼라치면 가는 입술을 더욱 꾹 다물고 대꾸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본다. 대부분의 폴란드 여자들의 입술은 가는 일자다. 그 가는 붉은
입술을 꽉 다물면 파란 동그라미 눈 둘과 빨강 한 줄 선만 있는 흰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인다.

간혹 미국에 갓 도착한 동양인을 처음 보는 폴란드인은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듯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고정하고 넋 나간 듯이 응시했다. ‘주여.’ 저에게 평화를 주소서.’ 나는 습관적으로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두 손을 불끈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기도를 듣기라도 한 듯 뎅~뎅~뎅~ 열한 번의 둔탁한 종소리가 응답했다. 동네 곳곳엔 오래된 신도 수가 적은 성당이 많다. 죽은 교인의 유산으로 근근이 운영하다가 더러는 매물로 나와 콘도로 개발되기도 한다. 하지만 폴란드 성당만은 신도 수가 많다.

일요일마다 우리나라 정월이나 추석에 새 옷을 갈아입고 나들이 가듯 폴란드 이웃들은 신사 숙녀가 되어 뽐내며 성당으로 향한다. 이들은 옷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들이다. 허드렛일하고 번 돈으로 장만한 옷을 입고 봐달라는 듯 걸어가는 그 행렬이 어찌나 긴지 처음에 나는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뒤따라간 적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동네를 방문했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에
헌신하는 민족이다. 성당 앞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도 맥도날드 옆에 있는 성당 앞을 지날 때는 성호를 습관처럼 그었다. 아이는 엄마가 햄버거 사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사달라고 조르지는 못하고 성호를 서너 번씩 긋기만 했었다. 하느님에게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 해피밀을 많이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은 아닐까? 

학교에서 만나는 학부모들은 나에게 친절하다. 하지만 그들 눈에 나는 언제나 낯선 타인이다. 그들 마음속에서는 ‘너는 흑인보다는 낫지만, 백인인 나보다는 못해.’라는 암묵적인 심리가 있다.

나는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들여보내고 문 앞에서 잘났다고 떠드는 학부모들을 멀리한 체 시에서 운영하는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으로 부리나케 가곤했다. 그날은 보통날과는 전혀 다른 날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며 수영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에 예전에는 보지 못한 노랑 꽃무늬 커튼이 쳐져 있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고 락커를 열었다.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블론드 가발이 잘린 목처럼 가발 거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락커마다 하시딕 쥬이시 여자들이 쓰는 가발이 나를 노려보듯 들어있었다.

물속에 남자들은 없었다. 여자들만이 수영복이 아닌 온몸을 가린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치마가 부풀어 공처럼 둥둥 떠다니는 이상한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모두의 시선이 유일하게 수영복을 입은 작은 동양인 나에게 모였다. 전혀 평상시와는 다른 수영장 안 풍경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파악하려고 슬슬 수영하며 왔다 갔다 살폈다. 물에 불린 두부처럼 허연 여자가 다가왔다.  
“Do you need a job?”
아니, 이건 또 뭐야? 물속에서 일자리가 필요하냐고 묻다니. 황당했다.
“What job?” 
“Cleaning job.”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삐 머리 회전을 시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고 정리해보니 ‘유대인 아줌마가 자기 집 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소리다. 이쯤 되면 나도 
“I need a cleaning lady too.”
나는 웃는 얼굴로 받아넘겼다. 두부에 고추장을 휙 뿌린 듯 홍조 띤 언짢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같은 무리에게 둥둥 떠 가더니 나를 힐금힐금 째려보며 수군거렸다. 물을 뚝뚝 흘리며 프런트 데스크에 알아봤다.
“매주 수요일 아침 서너 시간은 하시딕 유대인 여자를 위한 스케줄로 바뀌었어요. 하지만 그들과 수영하고 싶으면 해도 돼요.”
어차피 뒤죽박죽 뒤섞여 사는 뉴욕, 그들 눈에 나 또한 낯선 모습이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몰아내고 싶을까?

굳이 나와 한 물통 속에 몸을 담기 싫다는데 나는 그린포인트 YMCA 수영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에 있는 동네 목욕탕 크기만큼 매우 작다. 아무도 없다. 나와 라이프 가이드만 있다. 무척 조용하다. 물소리만 간혹 들린다. 왠지 쑥스럽다. 그때 한 남자가 옷 벗은 기사도처럼 등장했다. 다행이다 싶어 눈을 들어 봤다. 아뿔싸! 멀리서만 유심히 관찰 했던 그 남자, 그가 수영복도 아닌 길가에 항상 평상복처럼 입고 다니던 회색 바탕에 푸른 줄무늬 팬티를 입은 채 풀장으로 첨벙. 아차 싶었다.

그는 내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열 블록 떨어진 곳에 산다. 쓰레기 덤불에서 나온 듯 생전 목욕이라고는 하지 않는 듯한 중늙은이다. 부지런한 폴란드인 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남자 하나뿐일 것이다. 아침마다 공원 산책길에서 만나는 그는 몹시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항상 반바지 차림이다. 반바지라기보다는 복서 팬티만 달랑 입고 있다. 양쪽 팔 길이만큼의 끈으로 서로 묶인 두 마리의 강아지가 그의 뒤를 부지런히 발맞춰 따라간다. 그에게도 허물어져 가는 집이 있었고 와이프인지 걸프랜드가 있었다. 어느 날 집이 헐리고 여자가 떠났다. 집터 자리도 반으로 줄었다. 재산세를 내지 못해 뉴욕시에 뺏겼다. 철조망 담 한쪽에 폐차를 놓고 그가 살고 뺏긴 다른 반쪽은 공터로 쑥대밭이 되었다. 철망에는 옷가지 등등 걸 수 있는 것은 죄다 걸어놨다. 화장실도 부엌도 없이 폐차 앞 길가에 식탁과 의자를 놓고 거실 겸 부엌으로 사용한다.

아침에 둥근 빵에 뭔가를 열심히 발라 먹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식탁엔 말라 뒤틀어진 과일, 빵이 나둥그러져 있다. 양념통들은 지나다니는 차들이 뿜어낸 먼지로 무슨 통인지 분간할 수 없다. 먹다 남은 음식을 쪼는 비둘기들이 식탁에서 항상 그와 함께 푸덕거린다. 식사 후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가난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책을 읽는다.
‘이 남자는 과연 목욕이나 하고 사는 건가?’ 
한다면 어디서 할까? 궁금해 했더니 동네 YMCA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수영을 못하는 그는 씩씩거리며 물속을 헤집고 오락가락했다. 잘 좀 해보려고 허우적거리며 기다시피 손발로 물을 마구 걷어찼다. 작은 수영장 물이 밖으로 튀어 넘치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Calm down man.” 
라이프 가이드가 진정시키자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며 이런저런 폼으로 물속을 헤집으며 난리 쳤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같은 물속에 있기도 찜찜했다. 수영장 한 귀퉁이에 가만히 붙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날 나는 그와 함께 목욕했다.

그린포인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이 되면서 건축 붐이 일어났다. 150여 년 동안 운영하던 도미노 설탕공장도 결국 최후의 마지막 남은 공룡이 숨을 거두듯 2004년에 문을 닫았다. 우리 부부 화가가 개척자로 둥지를 튼 이후 맨해튼 가까운 강가에 작업하기 좋은 빈 창고와 싼 임대료 덕분에 많은화가가 잇따라 몰려왔다. 대부분 화가는 핸디맨들로 도시의 비어있는 창고들을 번화한 동네로 변화시킨다. 자연스럽게 갤러리와 카페가 생기면서 문화 예술의 장소로 바뀌었다. 당연히 예술가들을 뒤 쫓는 개발업자들이 몰려와 부동산 가격은 치솟았다. 임대료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폴란드와 푸에르토리칸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그 자리에 젊은 전문직 힙스터들이 몰려왔다.

타 주와 유럽에서 온 젊은 전문가 혹은 화가 지망생들이 아파트를 구하러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아파트를 구했는지 월말과 초에는 친구들과 무빙 트럭으로 짐을 옮기느라 부산들 하다. 연휴엔 부모들이 자식들 사는 모양새를 보러 멀리서 방문하고는 스트릿 주차를 신경 쓰지 않아 티켓을 받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왠지
내가 티켓을 준 양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이’ 하곤 얼른 집안으로 쫒기 듯 들어온다.

이렇게 시작한 화가의 길이 잘 풀리면 한동안은 짐을 쌀 필요가 없지만, 화가 로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한쪽에서는 희망을 품고 이사 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화가의 길을 접고 낙향하느라 많은 물건을 버리고 올 때와는 달리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들이 이사 나갈 때마다 나는 조그마한 횡재를 한다. 스트레처 바 (캔버스 틀), 물감, 가구, 옷 그리고 신발 등등 친절하게도 박스에 넣어 길가에 내놓거나 철제 울타리에 걸쳐 놓는다. 안목이 있는 화가들이 쓰던 물건이라 스타일도 좋다. 처녀 때 몸을 조금은 그나마 유지하는 나로서야 대부분 잘 맞는다. 이런 날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레벨도 떼지 않은 새 옷들도 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명품들이다. 구글링하다가 가격에 놀라는 재미에 빠져 아침 산책길에 쓸만한 물건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알을 굴린다.

오프닝에서, 한 여자가 손 백(clutch)을 우아하게 들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눈에 익은 백이다. 집에 오기가 무섭게 집안을 뒤져 그 백을 찾아냈다. 버릴까 말까? 하며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핸드백 회사를 구글링 했다. 내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명품이다. 옆집 젊은 여자가 이사 가며 버렸던 것을 주웠는데 이게 웬횡재란 말인가!
“내 차림새는 이사 가는 젊은 힙스터들 덕분에 공짜로 생긴 옷과 백이라고요!”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더 큰 다른 횡재도 있었다. 그린포인트엔 영화 촬영회사가 많다. 그리고 동네에서 영화 촬영을 자주 한다. ‘너희 스페이스를 찍고 싶다. 연락 바람’이라는 쪽지가 편지함에 종종 꽂혀있곤 한다.

‘반가운 소식은 아니더라도 골치 아픈 편지가 없기’를 바라며 나는 매일 편지함을 연다.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살피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버릴 편지는 재빨리 버리고 내야 할 빌은 바로 처리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화로웠던 어제와 같은 오늘’ ‘이대로’만을 유지해주는 하루하루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한때는 편지함에 쌓인 빌 때문에 빌빌대며 어디론가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해남으로 갈까? 누군가 해남이 땅끝마을이라던데, 땅끝까지 돈을 받으러 쫓아오지는 않겠지? 아니면 통일교를 믿어볼까? 어디선가 들었는데 통일교를 믿으면 기초생활은 보장해준다던데.

오늘은 또 무엇이 나를 노리고 있을까 긴장하며 편지함을 열었다. 주황색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영화 촬영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있으면 연락 바람.’ 뭔가 심상치 않은 돈 냄새가 풍겼다.
연락했다. 근처에 있었는지 금방 왔다. 스튜디오 실내를 연방 사진기로 눌러대더니 매니저와 상의하고 연락해주겠단다. 매니저와 실내 디자이너가 곧바로 왔다. 실내를 약간 바꾸어야 하므로 준비하는데 하루, 찍느라 하루, 원위치로 돌려놓는데 하루, 모두 3일이 걸린단다. 스튜디오 사용료를 제시하는데 생각보다 액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3일 동안 호텔에 머무는 비용도 주겠단다.
눈을 어디에 고정해야 할지 잠깐 당황하다가 쿨 한 척하느라 애매한 천정만 올려다봤다. 계약만 맺으면 간단하게 거금이 손에 쥐어진다. 신이 나서 일단 늘 마셔대는 와인 한 박스를 드려놨다. 와인 한잔을 여유롭게 죽 들이키며 생각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오면 어디에 쓸까?”
우선 친구가 말한 가격이 좋고 서비스 좋다는 피부관리를 하러 가자. 돌보지 않아 생긴 기미와 주근깨를 없애고 처진 눈을 보수공사 하자. 오랫동안 티브이 없이 살았는데 이 기회에 납작한 티브이를 하나 장만하자. 방콕에 가 있는 작은놈을 찾아갔다가 땅끝마을을 한 번 둘러봐? 머릿속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돈으로 무얼 할지를 연구하느라 분주했다. 계약하고 거머쥔 수표를 은행에 입금하고 집에 돌아왔다. 저런, 그 돈 액수만큼 들어갈 일이 두꺼비처럼 턱 하니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서들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기면 늘 써야 할 일이 따라온다고들 했나 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뭉게구름이 유난히도 뭉개고 있었다. 저 잡히지 않는 뭉게구름을 잡으려 애쓰는 동안 거센 파도가 밀려와 7월 4일 독립 기념일 날 마실 와인 한 박스만 남겨놓고 나의 희망을 몽땅 휩쓸어 갔다.

“야그들 대단하네! 남산에서는 한 방 터지고 한참을 기다려야 또 한 방인데 소나기처럼 퍼 붙는 것이 마~ 전쟁터가 따로 없네!”
독립 기념일마다 불꽃 구경을 한다며 지붕으로 올라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뉴욕에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다 운 좋게도 불꽃 구경을 바로 머리 위에서 하는 곳에 살게 되다니! 메이시 백화점이 주관하는 불꽃놀이는 거의 매년 이스트강가에서 한다. 3척의배에서 30분간 불꽃을 마구 토해 쏘아 올린다. 불꽃이 얼굴을 향해 떨어지듯이 퍼붓다 마지막 몇 분간은 남은 폭약을 몽땅 쏟아 부며 쉴 틈 없이 터지는 것이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 불꽃을 혼자만 보기 아까워 그동안 수많은 지인과 구경하며 즐겼다. 함께 했던 지인들을 돌이켜 보니 이미 저세상으로,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꽤 된다.

하도 많이 본 불꽃이라 덤덤한 나는 지붕에 올라가 어둠 속에서 불꽃 구경하는 친구들의 뒷 모습을 관찰했다. 서로 죽고 못 살 것처럼 진한 감정을 드러내며 좋아서 껴안고 보던 커플들은 대부분 이혼하고 주위에서 사라져 소식이 묘연하다. 덤덤히 옆에 앉아 보던 커플은 그런대로들 함께 잘살고 있는데 말이다.
‘야그들 대단하네!’  흥분했던 지인도 딸과 부인을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해 아들딸을 또 낳았다는 소식이 멀리서 들려왔다. 부등켜안고 보던 한 커풀도 이혼하고 남자가 또 다른 여자와 불구경 왔다. 폭음이 터질 때마다 진한 포옹을 반복하곤 했지만 그들의 연정도 그리 길지 않았다. 같은 사물을 보고 좋아 난리 치는 사람들은 싫증도 빨리 내는지 신의로 살아야 할 삶을 흥분으로 살고 끝내고를 반복한다.

불꽃이 폭음을 내며 오르다 더 높이 타오르며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검푸른 하늘에 희뿌연 연기만 허무하게 남는다. 쉽게 타오르는 사랑 또한 빨리 시들해지며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흥분하고 시들해지기를 반복한다. 독립 기념일이 오면 우리 부부와 함께한 커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새로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아니면
끝난 사랑의 공허함을 안고 괴로워하는지 몹시 궁금하다.

‘동네 모습이 거의 변한 것이 없지만, 자신만이 늙어 변했다.’를 되뇌던 2차 세계대전을 피해 오스트리아에서 와 이 건물에 살던 마리아의 말과는 달리 그녀가 죽은 후 동네는 변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이스트강가엔 30~40 층짜리 콘도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내가 오랜 세월 부엌 창가에서 내다보던 엠파이어 빌딩도 고층 건물에 가려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웃들도 사라졌다. 모두가 어디로 갔을까? 정보통인 뒷집 호세가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이미 저세상으로 갔다. 길 건너 델리 가게도 얼마 전에 문을 닫더니 낯선 사람이 내부 수리를 한다. 흘끔 들여다봤다. 여간 근사하지 않다. 어쩌다 급히 지인이 방문하면 남편에게 외상으로 맥주며 안줏거리를 거침없이 내주던 구멍가게였는데 아쉽다.

데비드 엄마도 업스테이트 시골집에 가서 오지 않는지 볼 수가 없다. 옆집 리사는 웰페어 체크가 오는 날이면 우체부를 기다리며 창가에 베개를 받치고 내다보다가
“What’s up?”
나를 반기며 소리 지르곤 했는데. 앞집 제이도 차에 앉아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쉰목소리로 동네 분위기를 말해주곤 했는데, 차도 사람도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면 집 앞을 쓸던 알렉스도 없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학교를 포기한 히스패닉 싱글 엄마들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모차에서 칭얼거리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을 찾아 떠났고 노인들은 세상을 떠났다고 치자. 그러나 중년 이웃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우나 고우나 정들었던 이웃이었는데… 치솟는 집세를 내지 못해서 야반도주했나? 아니면 급속도로 변화는 동네 분위기를 놓칠세라 집주인들이 건네는 뭉칫돈을 받아 들고 떠나온 푸에르토리코로 돌아들 갔나? 많은 폴란드 세입자들은 임대료가 저렴한 퀸스 매스페스 (Maspeth)와 리지우드(Ridgewood)로 옮겨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타 주와 유럽에서 몰려드는 젊고 싱싱한 하얀 낯선 젊은이들이 새로운 곳에서의 새 삶에 흥분한 모습이다. 주말도 아닌데 일하러 가지 않고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컴퓨터를 들여다본다. 해가 지면 술집으로 옮겨 앉아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저 젊은이들은 도대체 뭘 해 먹고 사는 걸까? 몹시 궁금해서 힙스터 아들에게 물었다.
“조부모나 부모에게 트러스트를 받았거나 주식 투자해서 월급 받듯이 디비든을 받을 거예요.”
부모에게 물려받은 트러스트와 제대로 된 직업도 없는 화가들은 작업하기 좋은 강가를 낀 빈 창고와 저렴한 집세때문에 그린포인트로 몰려왔다. 그리고 부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치솟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남쪽 이스트강가를 따라 레드훅(Reed Hook) 아니면
부시윅(Bushwick)과 업스테이트 비컨(Beacon) 등으로 떠났다. 옮겨간 그곳도 개발되었다. 그들은 개발하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간 때문에 돈 벌 시간이 없다. 돈도 벌지 못하면서 큰 공간에서 작업해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며 견뎌야 하는 삶이다. 그렇게 몇십 년을 버티고서도 대부분 화가가 보상받지 못하고 집세에 밀려 쫓겨난다. 그런데도 붓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이유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주말 이른 아침, 아무도 걸어간 흔적이 없는 이스트강가를 걸었다. 강가 모래밭에 오리와 갈매기의 발자국만이 이어졌다 흩어지며 물결에 희미한 자국을 남긴다. 체념하듯 움직이지 않는 갈매기가 있다. 날기를 포기한 듯 아무런 동요도 없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다리가 하나뿐이다. 어쩌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이 험한 세상에 나처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승객을 나르는 선착장 난간에 기대어 배가 들어오고 떠나는 소리, 피어 다리 밑을 치는 물결 소리, 나뭇잎 흔드는 바람 소리가 씁쓸하게 들린다. 북쪽 롱아일랜드 시티로 가는 배와 남쪽 덤보로 가는 두 배가 떠나면 나도 자리를 뜬다.

나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Greenpoint)에서 30년을 살았다. 서울에서 부모님 밑에 살았던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동네가 젠트리피케이션 되어 내가 알던 이웃도 사라지고 내가 아는 장소가 더는 아니다. 나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한번 맨해튼을 떠나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를 고인 물을 퍼내듯 되뇌며 살던 브루클린을 떠나 맨해튼을 향해 나는 다시 날갯짓했다. 이스트 강을 건너 허드슨 강가에 멈췄다. 2014 년 초, 30년간 똬리를 틀었던 그린포인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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