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22, 2022

까칠한 갱년기


“노후를 잘 보내려면 친구 관리를 잘해야 해. 금나야, 너는 내가 관리하는 7명 중의 한 사람이야.” 
금나는 옥이의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은정이를 쳐다봤다. 은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은정이 너도 그 7명 중의 한 명이야.” 
라는 옥이의 말을 기다리지만 옥이는 아무 말이 없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 옥이는 7명의 친구를 오랜 세월 나름대로 관리하며 친분을 유지한다. 진주와 동금, 광희도 그중에 들어있지만, 은정은 아니다. 

 금나는 옥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울증 환자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전염되었는지? 옥이는 3개월 주기로 조증과 울증을 반복한다. 옥이가 친구들과의 만남은 조증 모드일 때 이루어진다. 울증 3개월은 두문불출한다. 조증 3개월은 울증 기간 못한 일을 마치 여행 떠난 사람이 본전을 빼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피곤해서 게슴츠레한 눈을 간신히 뜨고 밖으로 쏘다닌다. 그동안 쓰지 않은 돈을 풀어 쇼핑해서 친구들에게 선물 공세도 한다. 

 옥이는 친구들을 만나면 집에서 지껄이지 못한 한국말을 쉴 새 없이 토해낸다. 한국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한입 가득 물고 떠든다. 금나는 그녀를 보면 식욕이 떨어진다. 금나가 은정이와 이야기하려면 옥이는 끼어들어 참견한다. 남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만 정신없이 떠들어 모두를 정신 나가게 한다. 그나마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울증 3개월 동안은 시달리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운이 좋은 해는 한 번도 보지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금나는 옥이가 선물을 주며 우정을 강조할 때마다 부담스럽다. 미니멀한 자기 집 인테리어를 망친다며 집에 오자마자 버린다. 옥이가 만나자고 할 때마다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댄다. 간혹 진주의 권유로 옥이를 만날 때 금나는 맞은편에 앉자니 밥맛이 떨어지고 옆에 앉자니 귀가 울리고 골이 지끈거려 거리를 두고 앉는다. 

 작년 옥이의 집에서 만남 이후 오랜만에 업스테이트 뉴욕 야외 행사장에서, 금나, 은정, 옥이, 동금, 진주와 광희가 만났다.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에 실려 코끝에 맴돌았다. 어린 시절 시골길에서 맡았던 향기와 똑같다. 모두 코를 쫑긋거리며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잠시 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항상 주위를 살피며 이득을 취하려는 옥이와는 친하고 은정을 싫어하는 생쥐처럼 생긴 나이 든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염탐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옥이에게 물었다.
"옥이씨, 은정씨와는 어떤 사이예요."
“친군데요”
옥이에게 묻는 말에 왜 오늘따라 은정이가 먼저 입을 열었던가! 
“친구 아닌데요.” 
옥이가 대답했다. 온정은 얼굴을 붉히며 밥 먹던 수저를 놓고 어쩔 줄 몰랐다. 둘의 관계가 더욱더 궁금해진 나이 든 여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친구가 아니라면 어떤 사인가요?"
옥이는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재빨리 
"은정씨 남편과 친구 사이예요."

은정하고는 친구가 아니고 은정 남편과 친구라니! 옥이의 황당한 대꾸에 은정은 응원해달라는 표정으로 금나를 쳐다봤다. 금나는 시선을 피하며 말이 없다. 은정은 어디에다 눈을 둘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체념한 듯 허공을 응시했다. 

 옥이가 30여 년 전, 미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은정의 남편이었다. 한국 남자 은정 남편은 돈 없고 직업도 변변치 않아 옥이의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무거운 것을 들어주고 고민 상담도 해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어느 날 그가 결혼한다고 소개한 은정을 보는 순간, 왠지 무조건 그녀가 싫었다. 깡마른 몸, 뻣뻣한 곱슬 머리털,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에 가는 눈이 매섭다. 남자를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 것 같은 까칠한 인상이다. 

 은정은 남편의 소개로 옥이를 이런저런 모임에서 오랜 만남을 이어왔다. 옥이의 ‘친구가 아닌데요.’라는 대답이 혼란스러워 그녀가 한 말을 곱씹고 씹었다. ‘자기 혼자 옥이를 친구라고 여겼나? 조울증과 폐경기가 맞물려 신경이 날카로워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워서인가?’ 뭐 오랜 세월 정을 나눈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니 할 말은 없지만, 옥이의 조울증만 잘 피하면 솔직하고 따뜻한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조울증 옥이가 스스로 떨어져 나가 주어서 홀가분해졌다. 

 돈 못 벌던 은정의 남편이 요즈음 잘나간다. 옥이는 예전에 자기와 차이 나게 못살던 은정이가 가난의 때를 벗고 점점 세련돼 가는 것이 얄밉다. 못살던 그 궁상스러운 모습 그대로 짜그라져 있기를 바라는 못된 심리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이 미울 정도로 은정이가 싫다. 집을 산지가 언젠데 아직 집들이도 하지 않는 얌체다. 발품 팔아 선물을 하면 은정은 기껏해야 와인 한 병으로 땡이다. 받기만 하지 베풀 줄 모른다. 옥이는 은근히 생쥐처럼 생긴 나이 든 여자에게 은정이에 대해 뒷말하며 관리하는 7명 친구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은정은 자리 잡고 사는데 골몰하느라 옥이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물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성격이다. 

 은정도 받기만 하고 베풀지 못한 미안한 마음은 있다. 친구들은 식사 초대도 하고, 살이 쪄서 입지 못하는 쓸만한 옷가지도 건넨다. 무언가 답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무일푼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아끼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리 실력도 신통치 않아 망설이다가 초대하지 않았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옥이의 미움을 살만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 앞에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옥아, 너 은정이 남편과 친구라면 은정이와도 친구지. 뭐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냐? 왜 그래 갑자기? 우리 그동안 함께 잘 어울렸잖아.”
모두 나 몰라라 하는데 동금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옥이를 나무라며 은정이를 두둔했다. 

 털털하고 널널한 동금이는 항상 집 문을 열어 놓고 친구들을 반긴다. 갑자기 욱하며 큰소리를 내긴 하지만, 뒤끝도 없고 험담도 하지 않는 돌직구다. 화장기 없는 흰 얼굴이 나이 들었어도 귀엽다. 멋 부리는 것이 쑥스럽고 귀찮아 톰보이처럼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고수한다.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긴다. 남의 집에 가는 것보다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 친구들을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한국에서 친정엄마가 수시로 보내주는 재료로 만든 음식 맛은 한국에 가서 맛집 순례를 하는 듯 친구들의 향수를 달래준다. 

 요즈음 동금은 아이들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자 가슴이 뻥 뚫린 듯 헛헛했다. 조금만 걸어가면 늘 푸른 바다가 있는 교외 조용한 아담한 집에서 갑자기 닥친 공허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중이다. 남편의 빈번한 출장 중 친구들을 초대했다. 여섯 명이 오랜만에 편하게 모였다. 

 부엌 맞은편 벽 쪽 의자에 은정과 진주가 앉았다. 은정과 직각으로 금나가 두 개의 아치형 창밖으로 피치 파인 트리가 보이는 뒤뜰을 향한 의자에 앉았다. 부엌 가까운 의자에 동금이가 금나와 직각으로 앉고 옥이가 앉았다. 금나와 마주 보게 광희가 앉았다. 예민한 금나는 역시나 옥이의 밥 먹는 모습과 떠드는 소리가 듣기 싫어 옥이를 외면한 의자를 선택했다. 

 술을 즐겨 마시는 동금이 집에는 술이란 술 종류는 다 있다.
“입가심으로 선물 들어온 아이스 와인으로 한 잔씩 시작하다가 맥주나 와인으로 갈까?”
“아. 나는 소맥으로 할 거야.”
은정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아이스와인 다음 기네스 그리고 소맥 하다가 와인으로 가자.” 

 창밖에는 비 오고요. 벽난로에서는 불꽃 튀는 그야말로 술맛 땅기는 날이다. 

 “요즈음 왜 이리 우울한 사람들이 많은 거야. 주위에서 불쑥불쑥 머리를 내미네. 어쩌라는 건지.”
본인이 조울증 환자라는 것을 깜박 잊었는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 말 많은 옥이가 시작했다. 광희만 빼고 모두가 어깨를 으쓱이며 눈 마주침을 했다. 

 “팬데믹이 길어져서 사람들이 지쳤나 봐. 선인장 바늘 같은 가시를 내밀며 가까이하기를 꺼리듯 날카로워졌어. 언제나 정상으로 돌아갈까? 골프도 제대로 치지 못하고. 답답해 죽겠어.”
평상시 5초 느린데다 골프에 미쳐 정신이 온통 필드에 가 있는 광희가 거들었다. 

 “예전으로는 돌아가기는 틀렸고 그냥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하루하루 즐겨야지. 자기 인생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가시 바늘 세워봤자 피곤만 하지.”
풋풋한 시절에 만난 친구들끼리 두루두루 잘 지내자며 모임을 리드하는 모태신앙 진주가 말했다. 

 “야 그냥 술이나 마셔. 때가 되면 어련히 끝나려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친정아버지가 써준 것을 액자에 넣어 거실에 위엄있게 걸어 놓은 붓글씨 ‘진인사대천명’,을 슬쩍 쳐다보고 동금이가 쿨하게 말했다. 

"아이스 와인 다 마셨다. 기네스로 가자. 아니면 그냥 소맥으로 바로 갈까?"
남 일에 관심 없이 제일에 빠져 살며 피곤을 술로 달래는 은정이가 말했다. 

 금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나는 멋쟁이다. 남편과 둘이 알콩달콩 여행하며 산다고 아이도 낳지 않은 딩크족이다. 몸매가 노처녀 같다. 어찌나 눈썰미가 좋은지 옷 입은 센스가 은근히 고급스럽다. 은정이는 금나가 입는 옷을 눈여겨봤다가 따라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금나보다 못한 은정이는 금나의 짝퉁 모양새다. 

 금나의 시선이 맞은편 의자에 앉은 광희 쪽에 오래 머물렀다. 미간이 찌그러지는 것이 광희의 모습이 공해라도 된다는 듯 걸리적거리나 보다. 은정의 시선도 금나가 광희를 꼬아 볼 때마다 눈을 줬다가 점점 술기운이 오르자 광희를 마치 ‘반짝이는 장식 달린 트리가 창 쪽에 놓여 있구나?’라고 상관하지 않았다. 소맥을 들이키자 평화롭고 밝은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은정이의 눈에 광희는 드넓은 골프장으로 옮겨져 있었다. 

 ‘광희가 골프 치러 필드에 나가서도 저 똥배와 처진 히프를 드러내고 골프채를 휘두르지는 않겠지? L 사이즈를 입어야 하는 몸통인데 왜 굳이 S 사이즈에 몸을 구겨 넣어 울리불리를 고집하는지. 술 취한 척 물어볼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옥이가 물어봐 주기를 바라며 참기로 했다. 

  광희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잠깐 살고 이혼한 돌싱이다. 허전함을 달래려는지 몸에 많은 것을 달고 다닌다. 머리에는 모자,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목걸이, 보고 있으면 정신 사납다. 게다가 항상 여행 떠나는 사람처럼 커다란 가방이나 백팩을 애인처럼 매고 다닌다. 그 가방 안엔 뭔가 꽉 차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는 광희는 의사의 지시라도 받았는지 지인들에게 전화해서 외로움을 하소연했다. 정신과 의사는 돈을 받고 들어주지만, 돈을 받고서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에게 전화질했다. 

 얼마 전, 광희가 은정이에게 전화했었다. 공교롭게도 은정 남편이 받았다. 
“인제 그만 좀 하지요. 한밤중에 전화해서 자는 사람 깨워 괴롭히는 것 좀 그만하라고~
그동안 참고 벼루던 은정 남편이 작심한 듯 소리 지르고 전화기를 껐다. 

 화가 난 광희는 동금에게 전화해서 은정 남편이 예의가 없고 무식하다며 하소연했다. 동금이가 거들어주지 않자 바통은 진주에게 갔다.
“진정해. 이번 일요일에 우리 교회로 와. 함께 기도하자.”
교회라면 질색하는 광희는 금나에게 전화했다. 
“주위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정신과 의사에게 더 자주 삼담 받아.”
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외면당하자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풀리자 광희가 골프채를 잡고 필드로 나가자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술이 들어가자 옥이가 옆에 앉은 광희의 모자를 잡아당기며
“모자 좀 벗어. 네가 고개 숙일 때마다 내 접시에 먼지 떨어져.”
“내 모자 건드리지 마. 모자 벗으면 아침에 감은 머리가 엉망이라서 그래.”
온갖 장식을 붙인 사각 얼굴 위에 얹힌 챙 넓은 모자를 쓴 광희의 모습은 광대 같다. 똥배와 처진 히프를 구겨 넣은 얼룩무늬 스키니 진 위에 걸친 짧은 스웨터가 울리불리를 가리지 못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배배 꼬는 듯하다. 그러나 광희는 자신이 날렵한 여자라는 환상에 빠진 세상을 헤매는지 항상 스몰 사이즈를 고집한다. 

 아니나 다를까? 옥이가 말했다.
“광희야 나니까 말해주는데. 너 똥배하고 처진 히프 좀 가려줄레. 사람들이 수군거려.” 
“누가 그래? 남이야 똥배를 내놓든 말든 뭔 참견이래. 에이씨, 골프나 치러갈 걸 괜히 와서 별 소릴 다 듣네.” 
광희가 목에 힘을 주고 소리치자 그녀의 목에 주렁주렁 걸린 번쩍이는 쇠사슬 목걸이가 흔들렸다. 주인에게 끌려가는 개 모가지처럼 주름진 목이 더욱더 주름졌다.
“야 목걸이는 왜 이렇게 주렁주렁 많이 걸었니. 목 디스크 온다. 다 빼고 하나만 걸든지 아니면 작은 스카프나 하지. 나니까 말해주는 거야.” 
“참견하지 마. 너나 잘해.” 
광희의 ‘너나 잘하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옥이에게 쏠렸다. 옥이는 큰 키에 살이 붙자 한 덩치 한다. 울퉁불퉁 뱃살을 치렁치렁한 긴 옷으로 덮어 덩치가 더 커 보인다. 작은 스카프로 목주름을 가려 옷맵시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드레스 위에 나비넥타이를 맨 듯 부자연스럽다. 

 동금이가 들었던 술잔을 탁하고 내려놓으며
“광희 말이 틀리진 않지. 남의 뱃살에 신경 쓰지 말고 각자 뱃살 관리나 잘해. 내 뱃살 보여줄까?”
벌떡 일어나더니 웃옷을 확 제쳤다. 허연 동금이의 배 앞면에 두부 한 모, 옆구리에 반 모씩 달린 뱃살이 드러났다.
“내 뱃살이 내 커다란 가슴에 밀려서 그렇지 나도 광희 못지않아. 나나 잘해야지. 각자 뱃살을 위해 건배하자.” 

 은정과 진주는 어깨를 으쓱하고 술잔을 들었다. 금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동금이를 째려보고 옥이를 노려보다가 광희가 한심하다는 듯 즐기지 않는 술잔을 들었다. 광희는 동금이만 빼고 그냥 이것들을 골프공 날리듯 날려 보내고 싶다는 표정으로
“야 너희들도 술 그만 마시고 골프 좀 쳐라. 세상에 골프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11시에 시작한 술좌석이 벌써 4시를 지나고 있다. 새삼 시간이 날아간다고 생각한 진주가 부드럽고,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인제 그만 마시자. 어두움이 깔리면 운전하기 편치 않은데. 1시간 동안 술 깨고 5시에는 출발해야지. 나 밤눈 어두워 운전하기 힘들어. 어둡기 전에 떠나야 해.” 
금나도 술자리가 지루했다는 표정으로 툭 뱉었다. 
“자 그만하고 지금 일어나자.” 

 친구들을 초대해 놓고 먼저 술에 취한 동금이는 딴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긴장이 풀리며 신나 하는 은정이는 집에 가기 싫다며 칭얼거렸다. 광희는 옥이가 잔소리할 때마다 기분 나쁘다며 들이켠 술로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충고해주면 듣지 않고 똥고집 부리는 광희를 보며 답답해 들이켠 술로 옥이도 취했다. 

 진주는 바나나처럼 매끈한 가는 몸매에 흰 피부로 귀티가 난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고 나긋나긋 고양이처럼 움직인다. 같은 몸무게를 항상 유지하며 바른 생활이 몸에 밴 단정한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뭔가 답답한 숨 막히는 여학교 사감처럼 회색 조끼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흰 면 셔츠 단추를 죄다 채웠다. 그녀가 입은 옷은 보기보다 비싼 옷들이다. 
“돈을 저렇게 많이 처들이고 멋이 안 나기도 힘들 텐데.” 
금나가 은정이에게 속삭였다. 
“너희들 술 좀 그만 마시고 뒤뜰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 좀 세라. 그러다 속 다 버리겠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진주는 친구들 건강을 챙기고 잘되라고 기도도 해준다. 그녀는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먹느라 많은 시간을 들여 장 보러 멀리 원정까지 간다. 소설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즐기고 남편과 여행도 종종 한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말뚝에 묶인 갑갑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금나는 진주의 그런 모습이 답답하다며 가까이하기를 꺼린다. 

 금나는 생각한다. ‘은정이는 그나마 지금까지는 봐줄 만했다. 아쉽게도 술만 들어가면 늘 같은 말을 하고 또 한다. 게다가 동금이와 죽이 맞아 술 취해 횡설수설 헤매며 망가지는 모습이 역겹다. 동금이는 허구한 날 쓸데없는 유튜브를 보며 한국 정치에 빠져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누군가가 질타하면 싸울 태세로 목청을 높인다.’ 
“아니 왜 미국에 살면서 한국 정치에 빠져 울분을 토해?”
마치 금나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진주가 동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일이 없으니까 무료해서 그렇다. 왜? 그런 너는 왜 종교에 빠졌는데. 요즈음 누가 기독교를 믿냐?”
“나는 모태 신앙이라서 그래.”
“정치 종교 이야기는 제발 그만해. 자기 계발은 하지 않고 한번 사는 인생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금나가 조용히 한마디 하자 정치와 종교 다툼은 한 방에 끝났다. 

 이들이 50대 초반의 폐경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까칠해진 것일까? 

 잘나가는 친구도 있고, 잘나가는 친구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는 이도 있다. 아예 포기한 친구도 있다. 자리 잡은 친구는 안정된 삶을 즐기고 그렇지 못한 이는 아직도 힘들다. 앞서가는 친구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야 하는 스트레스로 까칠해지고, 뒤쫓아가는 친구는 앞서가는 친구를 따라가지 못해 까칠하다. 아예 포기한 친구는 체념하고 살다가도 불현듯 생각나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까칠해진다. 끝없는 마라톤 경기를 계속하는 느낌이다. 올림픽 경기에서의 마라톤은 정해 놓은 거리를 뛰고 나면 끝난다. 인생의 마라톤은 정해진 길이가 없다. 죽을 때까지 뛰어야 한다. 죽음으로 가는 마라톤을 굳이 스트레스받으며 뛸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원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 안에서 또 다른 원하는 것이 생겨나 결국 만족할 수 없는 삶일 텐데. 

 가끔 만나면 그나마 까칠한 면이 덜하다. 자주 만나 술이 과하면 까칠함이 깊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용암에서 연기 나듯 슬슬 올라온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이란 옛말을 도연명이 했나 보다.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말라.’는 너무 가까우면 까칠해져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너무 멀리하면 친구를 섭섭하게 해서 상처 준다. 이래도 저래도 상처를 주고, 받느니 아예 만남을 피하는 친구들도 있다. 아마 오랜 만남이 나이 들면서 서로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벌어지자 별일 아닌 일로 서로를 밀어내다가 별일이 되었다. 이제는 서로가 아예 만나지 않으려는 시점에 왔나 보다. 

 먼젓번 동금이네 집에서의 만남이 짧아 섭섭했던 진주가 가까이 사는 금나와 은정을 집에 초대했다.
“나는 좀 바빠서 안 되겠는데.”
금나가 말했다. 진주는 다른 날로 약속을 잡았다. 
“금나야, 진주집에 함께 가자.” 
은정이가 금나에게 말했다. 
“너 혼자가. 나는 가기 싫어.” 

 은정은 왜 그러냐고 더는 묻지 않고 금나와 둘이서만 카페에서 만났다. 금나의 태도가 시큰둥하다. 은정은 금나가 광희, 옥이, 동금, 진주를 밀어내고 자기 차례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그리 밝은 표정으로 반기던 금나가 말없이 조용하다. 은정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먼저 입을 뗐다. 
“여기 분위기 여전히 좋다.”
금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사람이 없네. 커피 맛은 여전한데.”
금나는 커피잔을 들고 홀짝거리기만 했다.
“빵 먹어 봐. 맛있어.”
금나는 말없이 빵을 뜯어 입에 구겨 넣었으며 생각한다. 
‘은정이의 태도에서 광희, 옥이, 동금, 진주의 싫은 모습이 조금씩 보여서 쳐다보고 말 섞고 쉽지 않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금나가 자주 하는 말이 떠올라 은정도 생각에 빠졌다.
‘그래 금나가 변한 거야. 물론 나도 변했지. 풋풋했던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야. 아쉽지만 금나가 밀어내는 것을 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그동안 친구 해준 것만도 고맙지. 모두가 폐경기를 무사히 넘기고 난 후에 다시 만나 서로가 까칠했음을 인정할 날이 오겠지. 오지 않아도 할 수 없고. 한번 사는 내 인생에나 몰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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