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2, 2022

하얀 집


“요즈음 주위에 왜 이상한 또라이들이 많은 거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네.”
우빈이 말했다. 

“당신 빼고 주위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면 그건 당신이 이상하다는 증거야?”

“뭐라고? 그럼 내가 미쳤다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묻는 거예요? 한동안 좀 편하게 지내나 싶더니 또 시작이군.”

“이게 죽고 싶어 환장했나.”

나는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가는 게거품을 물고 핏불처럼 달려들어 지난번처럼 목을 조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재빨리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딜 또 가는 거야. 나가려거든 아주 보따리 싸서 나가. 들어오기만 해 봐라.”
차를 몰고 목적지 없이 달렸다. ‘어딘가에 들이받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우빈을 처음 만난 하얀 집이 마치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달려드는 하얀 자동차처럼 떠올랐다. 기억 속의 하얀 집은 ‘방황하는 자 모두 내게 오라.’고 손짓하는 듯 어스름한 퇴근길에서 빛났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태원 잠수교 가는 길에 있는 외국 손님이 주 고객인 크라운 호텔에 직장을 구했다. 그나마 영문과를 졸업했길래 망정이지.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랴, 통역이 필요하면 수시로 불러대는 통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늦은 저녁, 지쳐서 퇴근할 때면 자취방에 돌아가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터였던 곳에 하얀 꽃잎이 활짝 피듯 하얀 집이 지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얀 집은 목욕을 갓 한 어린아이 볼때기처럼 붉은 노을빛에 반사되어 발갛게 빛났다. 불 켜진 창 안은 아늑하고 편안해 보였다. 저 하얀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버타임으로 밤을 새웠다. 날씨가 풀려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렸다. 조심스럽게 마른 땅을 골라 밟으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하얀 집 앞을 지나칠 때였다. 문이 활짝 열려있다. 작은 여자가 문 앞에서 석유통에 붓을 넣었다 빼고를 반복하며 붓을 빨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물었다.
“이 집에 사세요. 집이 너무 예뻐요. 지나갈 때마다 누가 이 집에 사는지 궁금했어요.”
작은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화실이에요.” 
내가 집안을 기웃거리며 궁금한 표정과 몸짓을 하자  
“들어가서 구경하셔도 돼요.”
“정말 그래도 돼요? 늘 궁금했는데.”
작은 여자의 거침없는 자연스러운 호의가 대단히 고마웠다. 나도 모르게 하얀 집 문지방을 넘고 말았다. 훗날 그 하얀 집 문지방을 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얀 집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가구가 없다. 문 입구에서 마주 보는 벽에 주방이 있다. 그 앞 검은색과 흰 정사각형 타일 바닥 위에 열 명 정도 앉을 기다란 흰 식탁이 덩그러니 있다. 주방 왼편으로는 화장대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화장실이 있다. 그 화장실 앞에 킹사이즈 침대가 피곤한 몸 누워도 된다는 듯 편히 놓여있다. 입구부터 주방까지 뚫린 큰 공간은 작업실이다. 이젤 위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고개 숙인 여자의 커다란 그림이 올려져 있다. 그 옆에는 화구, 그리고 캔버스가 쌓여있다. 


---겨울이 끝나가는 맑고 청명한 날이었다, 나는 화실 안에 석유 냄새가 밸까 봐 화실 밖에 나가 붓을 빨고 있었다. 키가 큰 여자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리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집에 사세요. 집이 너무 예뻐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집이 하얗다. 예쁘다. 세 놓아라.’ 하도 귀찮게 물어서 모른 척하려다가 올려다본 눈길을 끄는 그녀의 분위기가 나를 움직였다. 가는 몸매에 긴 다리, 핏기 없는 작은 얼굴에 비해 큰 눈은 외로운 그늘이 가득했다. 윤기 나는 숱 많은 검은 머리는 뒤로 묶여있다. 검은 코트 안에서 흰 셔츠가 살짝 빛났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화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사월. 나이도 나와 같다. 화실을 재빠르게 둘러보고 고개를 끄떡인 후 고맙다는 표정으로 나가려고 했다.

“차 한잔하고 가세요. 저도 지금 막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고마워요. 저도 한때는 미대에 가고 싶어 했는데…”

미안한 몸짓으로 올라간 히프를 의자에 살짝 걸친 그녀에게

“편히 앉으세요. 우리 친구들이 일주일에 한 번 모델을 불러 크로키 하는데. 시간이 나면 함께 해도 돼요. 다 같이 모델료를 걷어서 충당하기 때문에 부담이 적어요. 하고 싶으면 모델료만 조금 내고하세요.”

“모델을 보고 크로키 할 정도는 아니에요.”

“미대 졸업한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배우면 되지요."

잘 알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함께 크로키를 하자는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녀는 차를 마시고 화실 안을 다시 한번 훑더니 고맙다고 인사하고 밝은 표정으로 화실 문을 나갔다. 



---하얀 집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나온 나는 해맑은 하늘에서 선물처럼 쏟아지는 자비로운 햇살에 안겨 화실 문을 들어설 때와는 달리 힘찬 걸음으로 걸었다. 지친 타지 생활에서 궁금했던 하얀 집 주인 채린이 함께 크로키를 하며 친구 하자는 말이 고맙다. 집안 형편상 미대는 가지 못했지만, 나는 여고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했고 미술 대회에 나가서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재능을 살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채린이 졸업한 대학의 모델이었던 인상이 온화한 여자는 르누아르 화폭의 여자처럼 통통한 30대 중반의 여자다. 함께 크로키 하는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다. 물론 누드 모델이다. 처음 누두를 접했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서너 번 하고 나니 할만했다. 모델이 생리 기간에 오지 않은 날, 나는 친구들을 위해 얇은 옷을 걸치고 모델을 자청하기도 했다. 함께 크로키 하는 사람 중엔 남자도 한두 명 들락거렸다. 크로키가 끝나면 여자 친구 몇몇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다 자고 가기도 했다. 킹사이즈 침대 한 가운데에 머리통을 놓고 꽃 피우듯 몸을 사방으로 펼치고 이야기하다 새벽녘에서야 잠들었다. 자연스레 나도 그들과 어울리며 젊음을 즐겼다. 내 삶에서 가장 신나는 시절이었다.

목련이 꽃을 떨구는 늦은 봄, 크로키 하는 날이었다. 하얀 집 안으로 덩치가 큰 남자가 들어섰다. 흰자 위에 뜬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큰 눈을 가진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다. 앞머리를 오른쪽으로 늘어뜨린 남자는 키가 크고 건장한 몸집이다. 청바지 위에 터틀넥 셔츠 그 위에 청색 재킷을 입은 귀티가 나는 모습이다. 갑자기 화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는 크로키 하는 친구들 뒷자리에 가서 철퍼덕 앉아 우리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가 하얀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심장이 쿵 하더니 요동쳤다. 채린과 친구들은 그를 별로 반기지 않는 눈치다. 친구들은 그가 복학생으로 채린이 좋아서 찾아온 우빈이라며 수군거렸다. 그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키 작은 채린과 우빈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채린도 같은 학교에 함께 다녔다는 인연 정도로만 생각하며 내치지는 않지만 반기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그가 더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눈치챘는지 크로키가 끝나면 아쉬운 듯 문을 열고 나갔다. 커다란 우빈의 등이 문밖으로 마지못해 사라질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가 그를 붙잡아 주기를 바랐지만, 채린은 그가 간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떠들었다. 나는 왜 그가 친구들이 그를 멀리하며 어울리기를 꺼리는데도 하얀 집을 찾아오는 것일까? 궁금했다. 궁금증이 풀렸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다.


---나는 3년 전 개인 사정으로 휴학 후 작년에 복학했다. 첫 강의에서 색바랜 청바지 위에 쑥색 코드 로이드를 입은 작은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 얹힌 흑인의 폭탄 머리 때문이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꽤 웃긴다. 눈이 마주치자 ‘네가 오히려 더 웃긴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옆 친구에게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내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게 키가 작다. 얼굴엔 주근깨가 다다닥 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키 작은 여자와는 사귄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는데 왜일까? 흑인 아프로 곱슬머리?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쑥색? 아니면 코드 로이드의 질감 때문인가? 방과 후 나도 모르게 채린의 뒤를 따라 발길이 옮겨졌다. 그녀는 재잘거리느라 뒤를 밟는지도 모른다. 일단 집을 알아 놓고 시간 날 때마다 폭탄 머리 주위를 맴돌며 묘안을 짜기로 했다.


---어느 날 우리 집 문 앞에서 복학생 우빈을 만났다. 깜짝 놀랐다. 
“웬일로 여기에? 이 동네 사세요?” 
“실은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을? 학교에서 하면 되지 왜 우리 집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저 급히 갈 곳이 있어서. 내일 학교에서 이야기하세요”  

낭만의 대학 생활 마지막 여름 방학 어느 날, 창문을 열려다가 우빈이 우리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봤다. 우빈 보다 더 큰, 너무 커서 휘어진 대나무처럼 마른 남자와 함께 어슬렁거렸다. 
“저것들이 미친 거 아니야. 학교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한마디 하지 않더니. 왜 우리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거야. 내가 꺽다리 옆에 서는 것을 질색하는 줄도 모르고.” 
우빈은 여름 내내 우리 집 앞에서 하릴없는 건달처럼 아니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놈팡이처럼 얼쩡거렸다. 어느 날 내가 급한 일로 집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복술 강아지를 안은 머리통 큰 남자와 이야기하는 우빈에게 들켰다. 

“아니 왜 매일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

“할 말이 있는데 길에서 말하기 좀 곤란해서. 잠깐 찻집에라도 들어갈까?”

“무슨 말인지 그냥 여기서 하세요. 저 갈 데가 있어요”

우빈이가 머리통 큰 친구를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이자 친구가 그냥 말하라는 시늉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우빈이 

“데이트 좀 하다가 졸업하고 난 후, 우리 결혼하면 어떨까?”

어처구니가 없다. 미쳤구나. 오싹했다.

“미쳤어요. 사귀기도 전에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돈 거 아니야. 미쳤어~”

나는 문을 쾅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대충 털어놨다. 키 큰 사람 올려다보기도 귀찮아하는 키가 작은 아버지가 

“나에게 맡겨라. 내가 처리할 테니. 넌 집 안에 있어. 나오지 마.”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걱정하지 마라.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더는 우리 집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을 거다.”

“아버지, 어떻게 처리했어요?”

“​​​​해밀톤 호텔 커피숍에 데리고 가서 점잖게 타일렀다.”

‘적을 잡으려면 숲에 숨어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때를 기다려야지. 이렇게 전면 공격으로 나오면 우리 딸이 더욱더 멀리 도망가지 않겠는가. 일단 후퇴하고 기회를 기다려 보자고 했다.’ 한데 그 녀석 좀 이상하더라. 검은 눈동자가 흰자 위에 붕 떴더라. 정상은 아니야. 조심해. 그런 녀석들은 살살 달래서 멀어지게 해야 해. 알았지.”

나와 아버지는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을 싫어하다 못해 질색한다. 여덟 살 터울 나는 키 작은 언니가 대학교 3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키 크고 잘생긴 놈 쫓아다녀 아버지 속을 무척이나 썩였기 때문이다. 우빈이야 집안 형편이나 좋지. 언니가 쫓아다닌 꺽대는 허울만 멀쩡했지, 집 주소도 없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꺽대에게 미쳐서 본인 용돈은 물론이거니와 카메라와 타이프라이터 등 귀중품을 전당포에 맡겨 돈을 장만해서는 꺽다리의 용돈과 술값에 바쳤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언니를 집에 가두었다. 중학교 2학년인 나에게 찻집에서 돈 오기를 기다리는 꺽다리에게 돈을 전해주라질 않나! 하지 못하겠다고 반항하자 내 머리통을 벽에 박으며 난리 쳤다. 집안 식구 모두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버지는 포기하고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꺽대와 대충 결혼식을 해서 내보냈다. 깨가 쏟아지게 살 것처럼 신이 나서 집 떠난 언니는 얼마 후 퍼렇게 멍든 얼굴로 집에 왔다.
“아버지, 결혼하면 친정에서 사는 것처럼 그대로 사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울며불며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아무리 도와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이었다. 형부는 백수로 언니에게 빨대를 꽂고 세월아 네월아다. 부모 말 듣지 않고 남자 외모에 미쳐서 결혼한 고뇌로 얼룩진 언니의 일생은 생각만 해도 지겹다. 내 두뇌에 잘 생기고 키 큰 놈들은 빨대 들고 꽂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건달로 각인 되었다.  


---나는 채린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서가 아니라 채린의 집 앞에서 얼쩡거리다 보니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집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피곤하다. 침대에 누워 있고만 싶다. 채린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 관심이 없어졌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집안에서 뒹굴며 그해 겨울을 보내고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날씨가 풀려 쌓인 눈이 녹고 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땅이 밖을 내다보며 숨 쉬는 계절이 왔다. 나는 누워서 벽지를 바라보다가 한 귀퉁이에 핀 곰팡이를 보자 문득 채린이의 생긋 웃는 얼굴에 깔린 주근깨가 떠올랐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몸이 욱신거렸다. 채린이 졸업하고 화실에서 작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화실에서 함께 크로키 하는 친구를 따라나섰다. 채린이의 귀엽던 폭탄 머리는 자라서 처치 곤란하다는 듯 붉은 스카프 속에 바람 빠진 공처럼 짓눌려 있었다.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친구들과 조잘거리는 그녀를 보러 그냥 습관처럼 발길은 화실로 향했다. 


---물 좋은 생선이 들어왔나? 어시장을 기웃거리듯 심심하면 화실에 찾아오는 남자 동기와 함께 꺽다리 우빈이 화실에 들어섰다. 깜짝 놀랐다. 환장할 노릇이다. ‘왜 초대도 하지 않은 내 화실에 무작정 들어오는 거예요.’ 소리 지르며 두 놈 다 내쫓을까?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경고가 떠올랐다. 
“녀석이 좀 이상하다. 검은 눈동자가 흰자위에 붕 떴어. 정상이 아니야. 조심해. 그런 녀석들은 살살 달래서 멀어지게 해야 해. 알았지.”
찌그러지려는 인상을 세련된 차가움으로 애써 바꾸고 예절을 갖춰 우빈에게 살짝 목례했다. 화실 안 분위기가 잠깐 어두운 침묵에 쌓였다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우빈과 있었던 불편한 일들을 떠올리기조차도 귀찮아 없었던 일인 양 행동했다. 몇 번 오다가 말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의 출입을 못 본 척했다.


---하얀 집에서 내가 오래도록 갈망해온 이상형을 만날 줄이야! 그녀의 이름은 사월, 미술대학은 다니지 않았지만, 화실에 모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누드 크로키를 잘한다. 제멋대로인 채린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생활력이 강하고 외모가 준수하다. 그렇고 그런 진부한 예술에 싫증 날 때면 사월은 분위기 쇄신을 해서 친구들을 기쁘게도 한다.
“제가 아는 외국인 부부가 동부 이촌동에 사는데 저를 양딸처럼 잘해줘요. 친구들과 놀러 오라고 하는데 함께 갈래요?”
하며 친구들 서너 명과 음식을 준비해서 외국인 집에도 함께 가는 배려심도 있다. 나는 채린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아니 언제 내 마음에 채린이 들어 온 적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없다. 채린에게 잘못 날아간 사랑의 화살은 운명처럼 방향을 돌려 사월에게 꽂혔다. 나는 사월을 보기 위해 토요일마다 화실에 갔다. 사월의 뒤에 앉아서 그녀의 몸을 더듬듯 누드 크로키를 했다. 그녀의 알몸을 더듬는 상상을 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크로키 하듯 그녀를 안고 매만지고 싶다. 사월에 대해 뜨겁게 타오르는 상념은 나의 몸과 마음을 자동으로 하얀 집 쪽으로 향하게 했다. 지난해 채린에게 접근했던 것과는 반대로, 채린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묵묵히 쿨하게 행동하다가 쓸쓸히 등을 보이며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월이 나의 마음에 들어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사월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볼 때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왜일까? 모든 것이 또 귀찮다. 피곤하다. 또 동면하고 싶다. 주위 녀석들에게 뺏기기 전에 잡으려면 버텨야 하는데. 벌써 눈이 내리려는지 날씨가 끄물끄물한다. 이러다 사월을 놓칠지도 모르겠다. 잠이 쏟아진다.


---첫눈 오는 바람 부는 쌀쌀한 날이었다. 첫눈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우빈도 가지 않고 늦게까지 앉아 친구들의 잡담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친구들과 함께 나도 하얀 집을 나와 눈길을 걸었다. 정오부터 내리던 눈이 쌓여 세상이 하얗다. 하얀 집이 눈에 덮여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앞에 걷는 우빈을 따라잡아 그의 옆에 섰다. 이 남자와 밤새도록 걷고 싶다.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주문을 했다. 
“춥지요?”
우빈이 물었다. 나는 헤어지기 싫어서 괜찮다고 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우빈이 부드럽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몸이 떨렸다. 옆에 걷는 우빈이 느낄 정도로 떨리는 몸을 다잡아 곧추세우려다 미끄러질 뻔했다. 미끄러지려는 나를 우빈이 잡아주면서 살짝 안았다. 넓은 그의 품에 푹 안겨 밤을 새우고 싶다. 
“들어가세요. 다음 토요일에 또 봐요.”
나는 한동안 서 있다가 눈 속으로 사라지는 우빈의 쓸쓸한 넓은 등을 보며  
“내가 저 외로운 사람을 보듬고 사랑해줘야지.”
다짐했다. 

토요일, 오후 2시, 한껏 멋 내고 우빈과의 만남에 부풀어 화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섰다. 채린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의 눈은 우빈을 찾았다. 없다. 그날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화실 안 친구들은 무게 잡으며 분위기 깨는 그가 나타나지 않자 오히려 편한 분위기다. 그해 겨울 우빈은 한 번도 화실에 오지 않았다. 그의 연락처를 묻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 조차 주지 않는 화실 분위기에 질려 묻지 못했다. 나 혼자만 그를 좋아하며 기다린다는 것을 화실 친구들이 눈치챈다면, 나도 우빈처럼 왕따당할 것이 뻔했다. 그가 나타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며 나는 마른 풀잎처럼 말라갔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우빈은 완전히 사라졌다. 스스로 당연히 사라져야 할 아무것도 아닌 잠깐 스친 흔적처럼.

개나리가 피고 새싹이 쑥쑥 커지려고 부산을 떨던 어느 날 우빈이 살이 오른 모습으로 화실에 불쑥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놀라 우빈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가 뚜벅뚜벅 나에게 다가왔다.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했다. 선뜻 그를 따라나섰다. 


---우빈이 갑자기 찾아와서 사월의 손목을 끌고 나갔을 때 화실 안 친구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월은 그날 이후 화실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월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아서 한동안은 그녀의 기척이 어디엔가 남아있는 듯 화실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사월이 직장을 고만두고 우빈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이 우빈이 갑자기 들이닥쳐 사월의 손을 잡고 나간 몇 달 후의 일이다. 사월이 남기고 간 크로키를 정리하다가 ‘우빈이 우리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나에게 뜬금없이 결혼하자고 했듯이 사월에게도 했겠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진심으로 사월이 잘 살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2년쯤 후, 초겨울 누군가 화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코트도 걸치지 않은 사월이 문기둥을 잡고 떨고 있었다. 

“어머, 웬일로?” 

“지나가다 들렀어요”

지나가다 들른 옷차림이 아니다.

“들어와요. 추운데.”

사월의 왼쪽 광대뼈 주위가 퍼렇게 부어있다. 항상 단정히 묶여있던 윤기 나던 머리가 풀려 헝클어져 있다. 언니가 형부에게 맞고 집에 왔던 모습과 같다. 나는 매 맞고 와서 울던 언니를 떠올리며 연민의 시선으로 말없이 사월을 쳐다봤다. 그녀는 나의 눈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식탁에 엎어져 울음을 터트렸다. 어쩜 이리도 언니와 똑같을까?
“그 사람은 겨울만 되면 짐승으로 변해요. 곰처럼 웅크리고 누워만 지내며 주위 사람들을 원망해요. 일어나라고 하면 건드리지 말라고 성질 부리며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려요.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제 목을 조이고 때리면서 살림살이를 집어던져요. 시아버지 밑에서 하는 일도 접고 파자마 바람으로 외출도 하지 않아요. 시부모님은 저에게 참으라며 생활비를 넉넉히 주시지만. 더는 못 살겠어요.”

나는 언니가 툭하면 집에 와서 하던 속풀이 녹음을 재현해 듣는 듯했다. 그녀가 속풀이를 계속하게 놔두었다. 사월은 삶을 포기한 듯 한참을 언니와 같은 푸념을 토해내더니 지쳤는지 침대에 가서 누워도 되냐고 물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요.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도 돼요.” 

사월이 자는지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사월이 하얀 집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왜 하필 문 앞에서 붓을 빨고 있었을까?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찰나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있었던 그녀를 하얀 집 문지방을 넘게 한 것이 내 탓일까? 아니면 스스로 문지방을 넘은 사월의 운명이었을까?’ 사월은 다음 날 아침, 내가 잠든 사이 고맙다는 쪽지를 남기고 우빈에게로 돌아갔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월이 멍든 얼굴로 찾아와 울며 자고 간 2년쯤 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외국에서 보내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사월에게서 온 편지다. 
‘채린씨와 헤어져서 돌아와 시부모님의 간청으로 그 해 긴 겨울을 참고 지냈습니다. 어두운 겨울은 지나고 봄은 어김없이 왔습니다. 우리는 여느 부부처럼 잘 지냈습니다. 그해 겨울 그는 또다시 동면했습니다. 시부모님이 그를 순천향 정신병동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습니다만, 소용없었습니다. 본인이 자기 증상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를 게을리하며 거부했습니다. 저는 지쳐서 집을 나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전에 다니던 크라운 호텔에 다시 취직했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하얀 집을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글쎄 이런 말을 하면 채린씨가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하얀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와는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들이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이 그리워 하얀 집 앞을 서성이며 몇 번을 노크할까 망설이다가는 돌아오곤 했습니다. 

우연히 호텔 투숙객 중 미국의 한 신문사의 에디터로 서울에 파견된 외국인을 만났습니다. 나와 나이 차이는 나지만 선하고 차분한 사람입니다. 그가 외롭게 방황하는 저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고 고백했을 때 제가 그이 앞에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한국을 떠나 모두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본사로 돌아올 때 결혼해서 따라왔습니다. 지금은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파견되어 가는 곳을 함께할 예정입니다. 저에게 베풀어준 친절함을 이렇게 편지로 대신합니다.  P.S. 제가 꿈꾸던 그림 작업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안도와 울적함이 교차한 심정으로 편지를 식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며 송골송골 유리창을 타고 내린다. 영화 ‘화양연화’ 주제곡이 빗물처럼 흐른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빗물에 젖은 나뭇잎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궜다. 잘못된 만남의 끈을 잡고 허우적거리며 사는 언니와는 달리 질긴 끈을 잘라내고 새로운 만남으로 작업에 빠져 사는 사월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래, 사월의 말이 옳아. 영화 자막을 거꾸로 되돌리듯 그동안 하얀 집 문지방을 드나들던 쓸개 빠진 놈들이 떠올랐다. 그놈 중 한 명과 엮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사월이 미국으로 떠난 후, 우빈의 부모님이 우빈을 달래서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빈이 나에게 들러붙지 않고 사월을 택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나는 한 번도 못 한 결혼을 사월은 두 번씩이나 하다니! 그것도 또라이지만 부잣집 아들로 허우대가 멀쩡한 한국 남자와 게다가 해외로 떠도는 미국 신문사의 에디터와 결혼해서 오하이오주에서 살며 작업만 한다니! 역시 여자는 키 크고 예쁜 것이 장땡이구나. 

크로키를 함께 하던 친구들도 결혼했거나 한다고 바쁘다. 그림 그리는 일은 뒷전이다. 부부싸움 할 때만 갈 곳이 없다며 화실에 찾아온다. 남자 동기생들도 먹고사느라 바쁜지 오지 않는다. 나는 하얀 집에서 혼자 늙어가며 시들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닐까? 지금 누군가가 찾아와 내 손을 잡아끌며 하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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