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는 뮤지엄을 나와 자연사 박물관 맞은편 길 건너 쉐이크쉑 식당에 들어갔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LA에 사는 주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영미야, 나 어제 일 떠오르면 괴로워. 너의 지혜가 필요해. 너와 이야기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뭔데. 말해봐.”
“내가 요즈음 자꾸 입에서 헛소리가 나온다. 글쎄, 어제 한 모임에 갔어. 다 같이 사진을 찍는데 그중 한 명을 가리키며 ‘나는 애랑은 사진 찍기 싫어. 애 빼고 찍자.’는 말이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모두가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라. 나 어쩌면 좋아.”
“괜찮아.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인데 도로 걷어드릴 수도 없잖아. 잘됐지. 그 여자도 네 마음 알고 너를 멀리하면 너도 좋고 그 애도 좋은 거잖아. 뭐 한방에 인간관계 정리 잘했네. 너를 한두 번 본 사이 아닌 주위 사람들도 네 성질 다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든지 오해하든지 알아서들 하겠지. 그들 맘 가는 대로 너를 생각하라고 해. 모두에게 칭찬 받을수는 없잖아. 욕 좀 먹으면 어떠냐. 그냥 생긴 대로 편하게 살아.”
영미는 주문한 햄버거를 들고 자연사 박물관 앞 벤치에 앉았다. 주영이는 점잖고 우아하게 늙어가고 싶은데 살쾡이처럼 구는 자신을 어찌해야 하냐며 통화는 늘어졌다. 영미는 식어가는 햄버거 포장 안을 들여다보며 먹지 못해 아쉬워서 포장지를 툭툭 쳤다. 통화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끊자. 네 남편이 너를 찾나 보다. 나중에 또 통화하자~”
온기가 빠진 햄버거는 맛이 없었다. 먹다 남은 귀퉁이 빵을 포장지 안에 처넣고 포장지를 구겼다.
“몇 시예요?”
조금 전까지도 비어있던 옆자리에 언제 와서 앉았는지 중년 남자가 묻는다. 영미의 뇌리에 시계가 없으면 전화기로 볼 수 있는 요즈음, 시간을 물어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귀찮다는 듯 전화기에 찍힌 시간을 그에게 보여줬다. 2시 22분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영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그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은 한국에서 왔냐? 다. 흔히 미국 사람들이 아시안에게 묻는 익숙한 질문이다. 영미는 너무나도 오래전에 떠나 가물가물한 한국에 관해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링컨 스퀘어에서 왔어요.”
“그전엔 어디서 살았어요?”
‘어쭈,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를 알고 싶어 간접적으로 돌려서 묻네.’
“브루클린”
“어 나도 브루클린에 살다가 13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그의 브루클린에 살았다는 대답에 영미는 구미가 당겨서 그에게 물었다.
“브루클린 어디?”
“윌리엄스버그.”
“어머, 나도 그곳에 살았었는데. 아직도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이 그곳에 있어요. 그 동네는 화가가 많이 사는데. 혹시 화가?”
“아니 그냥 취미로.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예요. 당신은 화가인가요?”
"아니요, 무용을 전공했죠. 하지만 결혼하고 남편 일을 돕느라 무대는 잊고 살았네요. 대신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그림을 하나둘 모으는 게 낙이 됐고요."
“팬데믹 동안 재택 근무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요즈음은 이틀 출근하니까 살 것 같아요.”
“재택근무가 더 좋지 않아요?”
“난 싫어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수 없어서 우울증이 오는 것 같았어요. 팬데믹 기간을 어떻게 잘 보냈나요?”
이 남자가 얼마나 외로우면 환갑이 넘은 여자에게 말 걸어 우울증 이야기까지 할까? 영미는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야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팬데믹을 조용히 즐겼지요. 오늘은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은행에 갔다가 여기까지 걸어온 거예요.”
거친 부분을 끌로 갈아 낸 듯한 다듬어진 둥근 하얀 얼굴의 부드러운 인상이다. 목소리 또한 스윗하다. 나이는 글쎄, 마흔여덟 살? 잘 모르겠다.
“이제는 뉴욕시에서 나 같은 백인이 오히려 마이너리티가 되고 있어요.”
베이지색 바지에 연 쑥색 반소매 티셔츠, 운동화 차림이다. 그의 부드러운 인상이 영미를 편안하게 했다.
서로가 과거에 살았던 곳이 같고 현재 사는 곳의 거리가 20블록 떨어져 있다. 둘 다 그림을 좋아한다. 갑자기 가까워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로를 더 알기 위해 더 많은 말이 오갔다. 제임스는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다. 영미는 낯선 남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려고 쳐다보며 말했다.
“나에게는 아마 당신보다는 15살 정도? 나이가 어린 아들이 하나 있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이에요.”
영미의 긴 수다가 이어지려는 중 제임스는 영미가 먹다가 구겨놓은 포장지를 들고 갑자기 일어났다.
“내 아파트가 다음 블록에 있어요. 잠깐 들리지 않겠어요?”
영미는 퍼뜩 생각했다.
‘내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만 헤어지자는 소리인가 보다. 그러면 그렇지, 늙은이 말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있을까?’
영미는 민망한 몸짓으로 그를 따라 일어나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의 아파트 가는 방향과 같다.
제임스는 100년 넘은 브라운스톤 건물 앞에 멈췄다. 영미도 덩달아 멈춰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동안 부동산 쇼핑하면서 눈독 들이며 사고 싶어 했던 탐나는 4층 건물이다. 제임스가 집 문에 열쇠를 꽂으며 영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영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노베이션 중이라서 지저분하지만 잠깐 들어와요.”
영미는 평상시에 눈여겨보던 건물의 내부구조를 어떻게 레노베이션 하나? 몹시 궁금했지만, 길에서 만나 1시간가량 이야기 나눈 낯선 남자 집에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다.
“인제 그만 집에 갈래요.”
“들어와요.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
이 말에 영미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친절한 남자의 순수한 마음을 늙은 여자가 미리 짐작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가 오버랩 되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래도 그렇지 이 늙은 나를 어쩌지는 않겠지? 현실자각을 하자 그가 이끄는데로 문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참나무로 만든 높은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육중한 참나무 문 두 개가 이어져 있다. 실내는 어두웠다. 바닥은 초록색 카페트다. 천정이 무척 높다. 영미는 제임스가 올라가는 층계를 올려다보다가 또 머뭇거렸다.
‘정말 낯선 남자 집에 따라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는 영미에게 제임스가 뒤돌아다 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무모한 기대로 젊은 남자의 호의를 오버해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자연스럽게 집구경이나 하고 나오자.’ 층계를 천천히 올라가 열어놓은 아파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과 달리 어두웠다. 레노베이션 중이라 산만했다. 제임스가 거실과 침실, 부엌과 화장실을 어떻게 고치고 있는지 한차례 설명했다. 아파트는 상상한 것보다 작았다. 그는 리빙룸에 있는 서너 점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중에는 남녀가 껴안고 있는 반 누드의 선정적인 그림도 있었다. 그도 민망한지 그 그림을 옆으로 치웠다. 영미도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현듯 예전에 본 ‘Berlin Syndrome’ 영화가 떠올랐다. 영감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 여행 온 호주 사진작가 클레어 (테레사 팔머)는 그곳에 살고 있는 매력적인 남자 앤디(막스 리멜트)를 만나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앤디가 출근한 뒤 빈집에 홀로 남은 클레어는 외딴 아파트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치려고 애쓴다. 영화의 잔상이 스치자 영미의 감각이 곤두섰다. 시선은 출구를 찾고 귀는 사소한 기척에도 예민해졌다. 이곳은 2층, 창밖으론 행인들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외딴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은 모른다. 그동안 남편이 바빠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잘살고 있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영미는 이대로 이곳에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직감으로 몸이 굳어졌다. 빨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낫겠다는 불안감이 몰려와 긴장했다. 문 가까이 천천히 갔다. 그때 제임스가 다가왔다. 영미 어깨에 손을 얹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투 벗고 소파에 앉아요.”
“아, 됐어요. 집 구경 잘했어요. 답답해서 밖에 나가고 싶어요.”
우리 잠깐만 앉아 있다가 나가요. 와인 마실래요?”
영미는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바에 가서 맥주나 한잔해요. 제가 살게요.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좀 답답해서요.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요.”
영미가 문 핸들을 돌리려고 하자 제임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어줬다.
“그러면 가지 말고 문밖에서 기다려요. 곧 나갈게요.”
영미는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안과는 달리 밝고 따스하고 아늑했다. 늙은 주제에 누가 건드린다고 괜한 오해를 했나? 한편으론 제임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면 어쩔뻔했을까? 아찔했다.
영미와 제임스는 한 블록 떨어진 바에 들어갔다. 안은 어둡고 시끄러웠다. 영미가 길가 의자에 앉자고 했다. 햇볕이 쏟아졌다. 제임스가 의자를 그늘로 밀고 영미에게 앉으라고 했다. 제임스 얼굴에 햇볕이 내리쬈다. 영미는 제임스에게 그늘진 자기 가까이 의자에 옮겨 앉으라고 손짓했다. 둘은 옆으로 붙어 앉았다. 밝고 안전한 곳에 앉은 영미는 기분이 좋아져 제임스가 묻는 말에 조잘조잘 떠들었다.
“영미, 당신은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해요?”
뜬금없는 질문이 훅 끼어들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남편의 얼굴이 스쳤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 하지만 치아 보철물을 만들던 정교한 손놀림만큼이나 일상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했다. 부(富)는 쌓였으나 대화는 휘발된 삶이었다. 그런 영미에게 제임스의 질문은 웅덩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브래드 피트? 아니면 톰 크루즈?” “글쎄, 너무 옛날 배우라 알려나 모르겠네. 제임스 딘(James Dean). 당신 이름을 들으니까 그가 생각나더라고.” “오, 제임스 딘! 그라면 잘 알죠. 이 근처 68가에 살았었잖아요.”
제임스가 장난스럽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나, 제임스 딘이랑 좀 닮지 않았나요?” “말도 안 돼. 당신은 귀엽긴 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 배도 조금 나왔고.” “이 뱃살만 빼면 가능성 있지 않을까?”
영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외모보다 그 특유의 반항적인 분위기 말이야. 이번 생엔 이미 늦었고, 다음 생엔 그런 남자와 데이트해보고 싶네.”
제임스가 영미의 배를 살짝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배도 안 나왔고, 분위기도 충분히 근사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 포기하지 말고 데이트해요, 우리처럼.”
'우리처럼'이라는 단어가 영미의 귓가에 닿아 화끈거리는 열기로 번졌다. 주책스러운 상상이라며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오늘 고심해서 고른 옷이 나이보다 젊어 보여 다행이라는 철없는 안도감이 스쳤다.
영미는 자기의 남자 취향을 알아보려는 제임스의 생뚱맞은 질문에 꿈에 부풀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사귀자는 표현으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 아닌가? 긴가민가하며 자신의 무모한 상상에 화끈거렸다. 한편으로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결혼한 여자야. 결혼은 약속이고 책임이 따라. 너는 왜 싱글인데 이 화창한 좋은 날에 나 같은 늙은 여자와 앉아 있니? 젊은 여자 만나서 인생을 즐겨야지. 시간 금방 간다. 나는 우리 아들에게도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애인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젊은 여자 찾아봐. 나 집에 가야 해. 남편 들어오기 전에 저녁 준비하러.”
영미가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달랬다. 제임스가 내겠다고 했다. 영미는 나이 많은 사람이 내는 거라며 재빨리 계산하고 일어났다.
“다음엔 내가 살게. 너의 집까지 함께 걸어가도 되지?”
제임스와 영미는 함께 걸었다. 그와 함께 걷는 것이 부끄럽지만, 젊어진 듯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말없이 영미의 아파트를 향해 10블록 정도 걸었다. 영미의 집까지 10블록을 남겨놓고 제임스가 멈췄다.
“그만 집에 가려고? 고마웠어. 오늘 말 상대 해줘서. 잘 가.”
"언제 한번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데."
제임스의 말에 영미는 그의 어둑했던 아파트를 떠올렸다. 그 밀폐된 공간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은 어쩐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나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요리하는 건 더 싫어하고. 마음만 받을게요."
영미는 짐짓 차갑게 거절했다. 미안한 마음에 건넨 전화번호는 그와의 순수한 연결고리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는, 스스로를 향한 궁색한 변명이었다. 제임스가 팔을 벌려 허그하자고 했다. 영미는 제임스를 허그하며
“You are a good boy.”
평소에 아들에게 했던 습관이 그냥 입 밖으로 나왔다. 제임스는 돌아서서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는 영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영미, 영미, 할 말 있어. 잠깐만 기다려.”
영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홍수가 발생해서 주민을 대피시키던 중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안은 소방관 션위브(Shawn Wiebe)에게 할머니가 건넨 한마디에 션위브는 활짝 웃는다. 센스쟁이 할머니가 한 말 때문이다.
“이렇게 멋진 남자 품에 안긴 건 결혼식 이후 처음인 것 같아. 정말 너무도 기쁘네.”
영미는 그 할머니와 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늙음에 씁쓸했다.
영미가 집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다. 3시간을 제임스와 함께 있었다. 남편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렸다. 식탁을 정성스럽게 차려 남편과 마주 앉은 영미는 마음이 무거워 죄인처럼 공손했다.
그날 밤 영미는 열병에 시달렸다. 눈이 빠지듯 화끈거리고 온몸이 뜨거웠다. 그다음 날도 침대에 누워 끙끙거렸다. 월요일 2시 22분, ‘하이’ 하는 텍스팅이 제임스에게서 왔다. 영미는 어찌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마냥 누워있었다. 5시 22분경에 다시 ‘영미’ 하는 문자가 왔다. 몸은 뜨겁고 머리는 무거웠다. 영미는 골몰했다.
‘그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 평화가 깨질 것이다. 욕망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욕망은 허상이다. 잠시의 허상을 잡기 위해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면 약점이 되어 평정과 자유를 잃는다. 남겨진 삶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보내자. 내가 지금 가진 것과 있는 곳에 만족해야 한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 제임스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번호를 차단하고 나자,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허탈감에 열이 조금 내렸다.
젊었을 적 타올랐던 불길이 잦아들어 재 속에 숨죽이고 있던 영미의 불씨에 제임스가 젊음의 불을 지른 것이다. 배가 조금 나왔던, 자신의 타입이 아니든 젊다는 것은 아름답다. 신선하다. 영미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른 날과는 달리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봤다. 얼굴에 주름들이 서로 경쟁하듯 더 굵고 길게 흩어져 뻗어있다. 전화 차단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갈라져 이끼 낀 얼굴로 제임스를 다시 만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영미의 머릿속은 제 할 일을 잘해야 한다는 듯 수시로 제임스를 불쑥불쑥 밀어 떠올리게 했다. 젊고 거칠지 않은 남자였다는 기억 이외는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련함으로 가슴이 시렸다. 늙음을 한탄했다. 옆에 앉아서만 이야기해서 제임스의 알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눈이라도 한번 맞춰봤더라면. 그날이 그날 같았던 때와는 달리 너무도 더디 가는 시간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그를 만났던 화창한 날과 같은 토요일이 또 왔다. 영미는 아파트를 나와 외로운 몸짓으로 걸었다. 천천히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리운 눈짓으로 넋 놓고 쳐다봤다. 그나마도 제임스만 한 남자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자신을 자각하면 할수록 늙음이 한탄스럽고 초라했다. 거울을 보면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깜박 멀리 너무 먼 젊음으로 달려가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그냥 몸이 좀 나은 것 같아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지금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어요.”
“조심해. 집에 들어가. 어서. 저녁은 내가 스파게티 할게.”
영미의 늙음도 주름도 눈에 보이지 않는지 지루하지만, 변함없는 남편이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쌓은 크레딧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데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한 인간을 가장 빨리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남녀관계 말고 또 있을까?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지만, 남녀관계로 인한 실수는 한 인간을 되돌릴 수 없는 불행으로 구속할 수 있다.
제임스와의 3시간의 만남 이후, 영미는 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 그날이 그날 같았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영미는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떠돌던 머릿속의 잡념들을 밀어내고 그리움이 들어앉았다. 주영에게 자신 있게 자기주장을 피력하며 수다 떨던 얼마 전의 영미가 아니다. 조용해졌다. 물 흐르듯 움직인다.
제임스가 바람처럼 스치며 던진 불씨는 재 속에 숨죽여 있던 영미의 연정(戀情)을 기어이 깨워 놓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주름이 경쟁하듯 뻗어 나가는 노년의 얼굴이었지만, 마음만은 자꾸만 그 찬란했던 토요일의 거리로 달려나갔다.
전화번호를 차단한 건 평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그를 만나면 삶의 평정은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고, 공든 탑처럼 쌓아온 일상의 신뢰는 허상이 될 터였다. 하지만 번호를 지웠다고 해서 그날의 온기까지 지워지지는 않았다.
이제 영미는 예전처럼 바삐 걷지 않는다. 대신 길가 벤치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시간이 늘었다. 조잘조잘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던 예전의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그 빈자리를 고요한 그리움이 채웠다.
그가 어떤 의도로 다가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치는 바람을 붙잡아 그리움으로 빚어낸 것은 온전히 영미 자신의 몫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불꽃이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처럼 피어났고, 그 덕분에 무의미하게 흐르던 시간이 다시금 소중해졌다.
영미는 이제 그 그리움을 억지로 만지거나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봄볕 아래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멀리서 바람의 몸짓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 '2시 22분'이라는 숫자를 문신처럼 새긴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신만의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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