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5, 2023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춥고 지루했던 겨울이 외투를 풀어 헤치고 멀어져 간다. 봄은 화사한 차림으로 겨울이 떠난 자리에 앉았다. 화창하고 따뜻한 토요일이었다. 영미는 보통 때 같으면 은행에 들렀다가 곧바로 집으로 향했지만, 무작정 걷고 싶었다. 맨해튼 76가와 5 애비뉴에 있는
New-York Historical Society에 들렸다. 이곳에 영미가 좋아하는 산책로 벤치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작은 사람이 앉아있는 그림이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막연히 기다리는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아려왔

영미는 뮤지엄을 나와 자연사 박물관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쉐이크쉑 식당에 들어가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LA에 사는 주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영미야, 나 어제 일 떠오르면 괴로워. 너의 지혜가 필요해. 너와 이야기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뭔데. 말해봐.”

“내가 요즈음 자꾸 입에서 헛소리가 나온다. 글쎄, 어제 한 모임에서 다 같이 사진을 찍는데 그중 한 명을 가리키며 ‘나는 애랑은 사진 찍기 싫어. 애 빼고 찍자.’는 말이 나도 모르게 갑자기 입에서 튀어 나왔다. 모두가 나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라. 나 어쩌면 좋아.”

“괜찮아.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인데 도로 걷어드릴 수도 없잖아. 잘됐지. 그 여자도 네 마음 알고 너를 멀리하면 너도 좋고 그 애도 좋은 거잖아. 뭐 한방에 인간관계 정리 잘했네. 너를 한두 번 본 사이 아닌 주위 사람들도 네 성질 다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든지 오해하든지 알아서들 하겠지. 그들 맘 가는 대로 너를 생각하라고 해. 모두에게  칭찬 받을수는 없잖아. 욕 좀 먹으면 어떠냐. 그냥 생긴 대로 편하게 살아.” 

영미는 주문한 햄버거를 들고 자연사 박물관 앞 벤치에 앉았다. 주영이는 점잖고 우아하게 늙어가고 싶은데 살쾡이처럼 구는 자신을 어찌해야 하냐며 통화는 늘어졌다. 영미는 식어가는 햄버거 포장 안을 들여다보며 먹지 못해 아쉬워서 포장지를 툭툭 쳤다. 통화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끊자. 네 남편이 너를 찾나 보다. 나중에 또 통화하자~”

온기가 빠진 햄버거는 맛이 없었다. 먹다 남은 귀퉁이 빵을 포장지 안에 처넣고 포장지를 구겼다. 


“몇 시예요?”

조금 전까지도 비어있던 옆자리에 언제 와서 앉았는지 중년 남자가 묻는다. 영미의 뇌리에 시계가 없으면 전화기로 볼 수 있는 요즈음, 시간을 물어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귀찮다는 듯 전화기에 찍힌 시간을 그에게 보여줬다. 2시 22분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영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그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은 한국에서 왔냐? 다. 흔히 미국 사람들이 아시안에게 묻는 익숙한 질문이다. 영미는 너무나도 오래전에 떠나 가물가물한 한국에 관해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링컨 스퀘어에서 왔어요.”

“그전엔 어디서 살았어요?”

‘어쭈,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를 알고 싶어 간접적으로 돌려서 묻네.’ 

“브루클린”

“어 나도 브루클린에 살다가 13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그의 브루클린에 살았다는 대답에 영미는 구미가 당긴 듯 그에게 물었다.

“브루클린 어디?”

“윌리엄스버그.”

“어머, 나도 그곳에 살았었는데. 아직도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이 그곳에 있어요. 그 동네는 화가가 많이 사는데. 혹시 화가?” 

“아니 그냥 취미로.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예요. 당신은 화가인가요?”

“아니요. 무용을 전공했어요.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결혼 후 남편의 사업을 도왔어요. 사업이 자리 잡히자, 몇몇 화가들의 작품 수집도 했어요.”

“팬데믹 동안 재택 근무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요즈음은 이틀 출근하니까 살 것 같아요.”

“재택근무가 더 좋지 않아요?”

“난 싫어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수 없어서 우울증이 오는 것 같았어요. 팬데믹 기간을 어떻게 잘 보냈나요?” 

이 남자가 얼마나 외로우면 환갑이 넘은 여자에게 말 걸어 우울증 이야기까지 할까? 영미는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야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팬데믹을 조용히 즐겼지요. 오늘은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은행에 갔다가 여기까지 걸어온 거예요.”

거친 부분을 끌로 갈아 낸 듯한 다듬어진 둥근 하얀 얼굴의 부드러운 인상이다. 목소리 또한 스윗하다. 나이는 글쎄, 마흔여덟 살? 잘 모르겠다.

“이제는 뉴욕시에서 나 같은 백인이 오히려 마이너리티가 되고 있어요.”

베이지색 바지에 연 쑥색 반소매 티셔츠, 운동화 차림이다. 그의 부드러운 인상이 영미를 편안하게 했다.


서로가 과거에 살았던 곳이 같고 현재 사는 곳의 거리가 20블록 떨어져 있다. 둘 다 그림을 좋아한다. 갑자기 가까워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로를 더 알기 위해 더 많은 말이 오갔다. 제임스는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다. 영미는 낯선 남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려고 쳐다보며 말했다.

“나에게는 아마 당신보다는 15살 정도? 나이가 어린 아들이 하나 있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이에요.” 

영미의 긴 수다가 이어지려는 중 제임스는 영미가 먹다가 구겨놓은 포장지를 들고 갑자기 일어났다. 

“내 아파트가 다음 블록에 있어요. 잠깐 들리지 않겠어요?”

영미는 퍼뜩 생각했다. 

‘내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만 헤어지자는 소리인가 보다. 그러면 그렇지, 늙은이 말 들어주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있을까?’

영미는 민망한 몸짓으로 그를 따라 일어나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의 아파트 가는 방향과 같다. 


제임스는 100년 넘은 브라운스톤 건물 앞에 멈췄다. 영미도 덩달아 멈춰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동안 부동산 쇼핑하면서 눈독 들이며 사고 싶어 했던 탐나는 4층 건물이다. 제임스가 집 문에 열쇠를 꽂으며 영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영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노베이션 중이라서 지저분하지만 잠깐 들어와요.”

영미는 평상시에 눈여겨보던 건물의 내부구조를 어떻게 레노베이션 하나? 몹시 궁금했지만, 길에서 만나 1시간가량 이야기 나눈 낯선 남자 집에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다. 

“인제 그만 집에 갈래요.”

“들어와요.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 

이 말에 영미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친절한 남자의 순수한 마음을 늙은 여자가 미리 짐작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가 오버랩 되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래도 그렇지 이 늙은 나를 어쩌지는 않겠지? 주제 파악을 하자 그가 이끄는데로  문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참나무로 만든 높은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육중한 참나무 문 두 개가 이어져 있다. 실내는 어두웠다. 바닥은 초록색 카페트다. 천정이 무척 높다. 영미는 제임스가 올라가는 층계를 올려다보다가 또 머뭇거렸다. 

‘정말 낯선 남자 집에 따라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는 영미에게 제임스가 뒤돌아다 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늙은이 주제에 젊은 남자의 호의를 오버해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자연스럽게 집구경이나 하고 나오자.’라고 영미는 생각했다. 층계를 천천히 올라가 열어놓은 아파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과 달리 어두웠다. 레노베이션 중이라 산만했다. 제임스가 거실과 침실, 부엌과 화장실을 어떻게 고치고 있는지 한차례 설명했다. 아파트는 상상한 것보다 작았다. 그는 리빙룸에 있는 서너 점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중에는 남녀가 껴안고 있는 반 누드의 선정적인 그림도 있었다. 그도 민망한지 그 그림을 옆으로 치웠다. 영미도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현듯 예전에 본 ‘Berlin Syndrome’ 영화가 떠올랐다. 영감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 여행 온 호주 사진작가 클레어 (테레사 팔머)는 그곳에 살고 있는 매력적인 남자 앤디(막스 리멜트)를 만나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앤디가 출근한 뒤 빈집에 홀로 남은 클레어는 외딴 아파트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치려고 애쓴다. 영화 장면이 떠오르자, 영미는 눈을 굴려 사방을 훑고 귀를 곤두세우며 긴장했다. 2층이다. 밖에서 떠드는 소음이 간간이 들렸다. 영화에서처럼 외딴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은 모른다. 그동안 남편이 바빠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잘살고 있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영미는 이대로 이곳에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직감으로 몸이 굳어졌다. 빨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낫겠다는 불안감이 몰려와 긴장했다. 문 가까이 천천히 갔다. 그때 제임스가 다가왔다. 영미 어깨에 손을 얹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투 벗고 소파에 앉아요.”

“아, 됐어요. 집 구경 잘했어요. 답답해서 밖에 나가고 싶어요.”

우리 잠깐만 앉아 있다가 나가요. 와인 마실래요?”

영미는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바에 가서 맥주나 한잔해요. 제가 살게요.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좀 답답해서요.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요.”

영미가 문 핸들을 돌리려고 하자 제임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어줬다. 

“그러면 가지 말고 문밖에서 기다려요. 곧 나갈게요.” 

영미는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안과는 달리 밝고 따스하고 아늑했다. 늙은 주제에 누가 건드린다고 괜한 오해를 했나? 한편으론 제임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면 어쩔뻔했을까? 아찔했다.  


영미와 제임스는 한 블록 떨어진 바에 들어갔다. 안은 어둡고 시끄러웠다. 영미가 길가 의자에 앉자고 했다. 햇볕이 쏟아졌다. 제임스가 의자를 그늘로 밀고 영미에게 앉으라고 했다. 제임스 얼굴에 햇볕이 내리쬈다. 영미는 제임스에게 그늘진 자기 가까이 의자에 옮겨 앉으라고 손짓했다. 둘은 옆으로 붙어 앉았다. 밝고 안전한 곳에 앉은 영미는 기분이 좋아져 제임스가 묻는 말에 조잘조잘 떠들었다.


“영미, 너는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이다. 영미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은 전혀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영미가 뉴욕에  왔을때만해도 싱글 한국 남자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이스가 없었다. 선배 소개로 결혼한 남편은 운 좋게도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남편은 치과에서 치아 보철물을 만들다가 솜씨가 뛰어나 공장을 차렸다. 주문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수입이 늘어났다. 영미는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해서 남편이 버는 것 이상으로 부를 일궜다. 요즈음 남편은  사업확장을 하느라 바빠 영미와 대화가 거의 없다. 영미가 조잘거리는 말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하나 있는 아들은 자기 삶에 빠져 연락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에 갑자기 제임스가 로맨틱한 감성을 자극하는 질문을 하자 영미는 말문이 막혔다. 제임스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것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에 잠겨 조용해진 영미에게 제임스가 물었다.

“브래드핏?  아니면 톰크루즈?”

“아니, 아니야. 글쎄 오래된 배운데 네가 알지 모르겠다. 제임스 딘(James Dean)이라고 네 이름이 제임스라니까 생각나네.”
“아 제임스 딘 나 알아, 이 동네 68가에 살았어.”

“나는 네가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아서 제임스 딘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영미, 내가 제임스 딘 닮지 않았어?”

“말도 안 돼. 너는 귀엽기는 해도 제임스 딘과는 다르지. 배도 조금 나왔잖아.”

“나 뱃살 빼면 제임스 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꼭 외모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말하는 거야. 나는 나이 들어서 이번 생은 포기했고 다음 생에는 제임스 딘 같은 남자 만나고 싶다.”

제임스는 영미의 배를 살짝 치며

“너는 배도 나오지 않았네. 분위기도 있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데이트 해.”

영미는 자기의 남자 취향을 알아보려는 제임스의 생뚱맞은 질문에 꿈에 부풀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사귀자는 표현으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 아닌가? 긴가민가하며 자신의 주책스러운 상상에 화끈거렸다. 다행히 오늘 입고 나온 옷이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아 괜찮다는 생각이 들다가 모자를 다른 것으로 쓰고 나올 것 그랬나 후회했다. 한편으로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결혼한 여자야. 결혼은 약속이고 책임이 따라. 너는 왜 싱글인데 이 화창한 좋은 날에 나 같은 늙은 여자와 앉아 있니? 젊은 여자 만나서 인생을 즐겨야지. 시간 금방 간다. 나는 우리 아들에게도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애인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젊은 여자 찾아봐. 나 집에 가야 해. 남편 들어오기 전에 저녁 준비하러.”

영미가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달랬다. 제임스가 내겠다고 했다. 영미는 나이 많은 사람이 내는 거라며 재빨리 계산하고 일어났다. 

“다음엔 내가 살게. 너의 집까지 함께 걸어가도 되지?”

제임스와 영미는 함께 걸었다. 그와 함께 걷는 것이 부끄럽지만, 젊어진 듯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말없이 영미의 아파트를 향해 10블록 정도 걸었다. 영미의 집까지 10블록을 남겨놓고 제임스가 멈췄다.

“그만 집에 가려고. 고마웠어. 오늘 말 상대 해줘서. 잘 가.”

“내가 음식 만들어서 너 초대하고 싶은데.”

제임스가 말했다. 영미는 그의 어두운 아파트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둘이 앉아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그건 아니다. 

“나 먹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아. 쿡하는 것도 싫어하고. 고맙지만, 됐어.”

영미는 거절했다.

“그럼, 전화번호 줄래.” 

영미는 차갑게 거절한 것이 미안했다. 친한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주는 것처럼 스스럼 없이 그에게 줬다. 번호를 주지 않으면 순수한 관계를 부인하는 것 같아서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제임스가 팔을 벌려 허그하자고 했다. 영미는 제임스를 허그하며 

“You are a good boy.”

평소에 아들에게 했던 습관이 그냥 입 밖으로 나왔다. 제임스는 돌아서서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는 영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영미, 영미, 할 말 있어. 잠깐만 기다려.”


영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홍수가 발생해서 주민을 대피시키던 중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안은 소방관 션위브(Shawn Wiebe)에게 할머니가 건넨 한마디에 션위브는 활짝 웃는다. 센스쟁이 할머니가 한 말 때문이다. 

“이렇게 멋진 남자 품에 안긴 건 결혼식 이후 처음인 것 같아. 정말 너무도 기쁘네.”

영미는 그 할머니와 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늙음에 씁쓸했다.

 

영미가 집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다. 3시간을 제임스와 함께 있었다. 남편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렸다. 남편에게 길티 필링이 들었다. 식탁을 정성스럽게 차려 남편과 마주 앉은 영미는 마음이 무거워 죄인처럼 공손했다. 


그날 밤 영미는 열병에 시달렸다. 눈이 빠지듯 화끈거리고 온몸이 뜨거웠다. 그다음 날도 침대에 누워 끙끙거렸다. 월요일 2시 22분, ‘하이’ 하는 텍스팅이 제임스에게서 왔다. 영미는 어찌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마냥 누워있었다. 5시 22분경에 다시 ‘영미’ 하는 문자가 왔다. 몸은 뜨겁고 머리는 무거웠다. 영미는 골몰했다.

‘그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 평화가 깨질 것이다. 욕망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욕망은 허상이다. 잠시의 허상을 잡기 위해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면 약점이 되어 평정과 자유를 잃는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보내자. 내가 지금 가진 것과 있는 곳에 만족해야 한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 제임스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번호를 차단하고 나자,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허탈감에 열이 조금 내렸다.   


젊었을 적 타올랐던 불길이 잦아들어 재 속에 숨죽이고 있던 영미의 불씨에 제임스가 젊음의 불을 지른 것이다. 배가 조금 나왔던, 자신의 타입이 아니든 젊다는 것은 아름답다. 신선하다. 영미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른 날과는 달리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봤다. 주름들이 서로 경쟁하듯 더 굵고 더 길게 얼굴에 생채기를 내며 흩어져 뻗어있다. 전화 차단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갈라져 이끼 낀 얼굴로 제임스를 다시 만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영미의 머릿속은 제 할 일을 잘해야 한다는 듯 수시로 제임스를 불쑥불쑥 밀어 떠올리게 했다. 젊고 거칠지 않은 남자였다는 기억 이외는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련함으로 가슴이 시렸다. 늙음을 한탄했다. 옆에 앉아서만 이야기해서 제임스의 알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눈이라도 한번 맞춰봤더라면. 그날이 그날 같았던 때와는 달리 너무도 더디 가는 시간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그를 만났던 화창한 날과 같은 토요일이 또 왔다. 영미는 아파트를 나와 외로운 몸짓으로 걸었다. 천천히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리운 눈짓으로 넋 놓고 쳐다봤다. 그나마도 제임스만 한 남자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자신을 자각하면 할수록 늙음이 한탄스럽고 초라했다. 거울을 보면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깜박 멀리 너무 먼 젊음으로 달려가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그냥 몸이 좀 나은 것 같아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지금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어요.” 

“조심해. 집에 들어가. 어서. 저녁은 내가 스파게티 할게.”

영미의 늙음도 주름도 눈에 보이지 않는지 지루하지만, 변함없는 남편이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쌓은 크레딧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데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한 인간을 가장 빨리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남녀관계 말고 또 있을까?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지만, 남녀관계로 인한 실수는 한 인간을 되돌릴 수 없는 불행으로 구속할 수 있다.  


제임스와의 3시간의 만남 이후, 영미는 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 그날이 그날 같았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영미는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떠돌던 머릿속의 잡념들을 밀어내고 그리움이 들어앉았다. 주영이에게 분명한 자기주장을 자신 있게 피력하며 수다 떨던 얼마 전의 영미가 아니다. 조용해졌다. 예전처럼 부지런히 바삐 걷지 않는다. 물 흐르듯 움직인다. 먼 곳을 그리운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벤치에 멍청히 앉아 있는다. 


바람처럼 영미를 스치고 지나갔던 제임스가 무슨 의도로 영미에게 다가왔는지는 그의 몫이다. 그냥 스치는 바람을 그리움으로 받아들인 것은 영미 몫이다. 스쳐 지나간 바람일 망정 더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잠자던 불꽃이 살아나 한 여름밤의 달콤한 꿈처럼 영미의 마음에 피어났다. 가는 시간이 아쉽고 소중했다. 영미가 쫓는 그리움을 가까이서 만지고 찔러보고 두들겨 보기보다는 멀리서 그리움의 봄볕 아래서 바람의 몸짓으로 바라본다. 가슴속에 2시 22분을 새기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녀만의 온전히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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