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 2023

여름 안개 저편에


“서미,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혹시 복학생 기영씨?”

“맞아.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학교 다닐 때 뒤에서 들려오던 익숙한 소리라서요. 반가워요. 어디예요?”

“나 뉴저지 여동생 집에 놀러 왔어.”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 해줄게.”

“그럼, 내일 3시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30여 년 만에 기영의 전화를 받다니! 왜 전화상으로는 말할 수 없다는지? 그와 오래 더 이야기 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서미의 가슴이 뛸 만큼 희미한 기억 저편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래전, 그와 첫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날은, 추위가 지루하게 이어지다 갑자기 따뜻해진 화창한 5월 초였다. 방과 후, 집에 일찍 가기 싫어서 캠퍼스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기영이 멈췄다. 서미 옆에 앉으며 물었다.

“누구 기다려?”

“아! 네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오랜만에 좋은 날씨야.”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체취를 바람이 실어 날랐다. 싫지 않은 잘 익은 사과 향이다. 숱 많은 곱슬머리, 진 듯 만 듯한 쌍꺼풀, 움푹 팬 볼, 광대뼈 위에 살짝 뿌려진 주근깨와 각진 턱의 작은 얼굴을 자세히 봤다. 매력적이다. 그는 긴 다리를 쭉 펴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신통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서미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그윽한 눈이 촉촉하다. 

“이제 길고 지루한 겨울은 끝난 것 같아.” 

낮으면서도 깊고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서미의 감성을 자극했다.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가 복학한 지 일 년이나 지났건만 그동안 그의 매력을 알아채지 못했다니! 서미는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한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들어선 듯 오감이 활짝 열렸다. 나이 많던 복학생인 그가 어려워 멀리한 탓도 있다. 수업 시간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매력적인 소리라고 생각하며 서너 번 뒤돌아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의 외모가 근사하다고는 생각한 적은 없었다. 


“뒤에 타. 정류장까지 태워다줄게.”

기영은 나무에 기대놓은 자전거에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타래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귀여운 아가씨를 태우고 달리고 싶어서야. 꽉 잡아,”

서미는 그의 허리를 잡고 등에 머리를 묻었다. 푹 익은 사과주를 단숨에 들이킨 듯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전거는 정류장 쪽으로 가다가 서지 않고 한강 쪽으로 달렸다. 서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등에 파묻혀 오랫동안 그렇게 멀리 아주 먼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는 한강 다리 밑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더니 철퍼덕 누웠다.

“서미 이리 와서 누워봐. 시원해.”

얼떨결에 서미도 그 옆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서미, 사귀는 사람 있어?”

“아니요.”

사귀는 남자가 있냐고 물어본 후 그는 말이 없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하던 남자 옆에 누워 있다니! 그것도 어색함 없이 참 기이한 일이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람과 시작하는가 보다.’


그 5월 초 화창한 날이 빚어낸 갑작스러운 만남 이후 서미는 그가 말 걸어주기만을 기다리며 조바심치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무척 바쁜지 서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6월 마지막 주 방학이 시작되기 전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잘 지냈어. 여름방학에 무슨 계획 있어?”

“글쎄, 별로.”

“전화번호 줄래. 연락할게.”


서미는 그가 전화해서 데이트하자고 말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콧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방 청소를 했다. 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두문불출하고 전화기 옆에서 서성댔다. 전화벨이 울렸다. 

“너구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실망하며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빨리 전화를 끊었다. 나흘째 되던 날,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전화기가 고장 났나를 확인했다. 다섯째 날, 혹시 하도 당황해서 전화번호를 잘못 불러 준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가 잘못 받아 적은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섯째 날, 전화기를 드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전화기가 정말 고장 난 것이다. 아버지를 닦달해서 고치고 나니 그에게 전화번호 준 날로부터 구 일째 되는 날이었다.


서미는 기영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보내던 어느 날, 일하는 아줌마가 왠 남자가 문밖에 있다고 했다. 창문을 열고 위층에서 내려다보니 기영이 집 앞 가로등에 기대어 있었다. 

“어머, 말도 안 돼.”

서미는 놀라서 내다보던 머리를 안으로 들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수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 엉망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창피했다. 

대충 머리를 빗고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어요? 나 세수도 하지 않았어요. 돌아가세요.”

“잠깐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잠깐이면 돼?”

“안 돼요. 전화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그는 알았다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아니 시간을 줄 테니 준비하란 말도 없이 돌아서다니!’ 서미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가려고 옷을 꺼내 입다가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만 잡생각을 했다. 잠이 들었는가 하면 잔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몽롱한 상태에서 멀리서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전화 왔어요?” 

“아니.” 

"분명히 전화벨 소리가 났는데!" 

그에게서 곧 올 줄 알았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리며 끼니를 걸렀다. 


7월 마지막 주 금요일, 갑자기 기영이 다음 날 만나자고 전화했다. 토요일 아침,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냐는 전화가 다시 왔다. 그와 마주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며칠을 굶은 손이 떨려 커피를 쏟을 뻔했다. 간신히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다시 커피잔을 들었으나 빨라진 심장 박동으로 손이 떨려 도저히 잔을 입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찻잔은 덜거덕 소리를 내며 찻잔 받침 위에 무사히 얹혔으나 그가 보고, 들은 듯했다. 서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찻잔에 그려진 꽃무늬만 멍청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서미는 밥맛이 없었다. 거의 남기고 술기운으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술 마시고 싶어요.”

스탠드바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기영은 맥주를 마시며 강아지를 쓰다듬듯 서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카락이 부드럽네.”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의 손이 목덜미를 만졌다. 

“긴장했군. 내가 긴장 풀어줄게.”

서미는 그의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주무르자, 얼굴이 붉어지며 더욱 긴장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홀에서 블루스를 추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춤춰요.” 

서미가 기영의 손을 잡고 블루스를 추려고 발을 앞으로 들이미는데 그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듯 서미를 끌어안고 윗몸만 약간 움직였다. 서미도 그를 따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기영은 서미에게 손을 내밀며 히죽 웃었다. 서미는 그의 손을 잡고 둘은 말없이 어두움을 걸었다.


‘그럼 우리는 사귀는 건가? 아닌가?’ 서미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기영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너 실연 당했냐? 말해봐. 이러다 애 잡겠다. 일어나~.” 

아무 말 못 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서미에게 엄마는 

“어떤 놈이 우리 귀한 딸을 나무에 오르라더니 오르고 나니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려 놔! 머리 꼴이 이게 뭐니. 이대 앞에 가서 머리도 하고 옷도 사 입고 놀다 오렴.”

“머리 어떻게 할까요?”

미용사가 물었다. 

“뽀글뽀글 막 볶아주세요. 그것이 서미가 자신을 최대로 학대하는 방법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때까지 서미는 기영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서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집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쓸쓸한 가로등을 수시로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9월 첫째 주 서미가 마지막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하고 유학 갈 준비를 위해 안국동에 있는 유학 정보센터에 가려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기영이었다. 둘은 안국동 돌담길을 걷다가 비원에 들어가 궁 안을 어슬렁거렸다. 돌층계에 앉아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치기 쉽지 않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가까이하기엔 먼 사이? 좋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사이?’라고 서미는 생각하다가 영기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지지 않아.”

“아 그렇군요.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싸우고 끝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미는 비원을 나와 어둑해지는 한적한 길을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고 조용히 걸었다 

‘기영에게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눈에 띄는 여자를 보면 멈춰서 이야기를 걸고 길 가다 끌리는 여자가 있으면 전화번호를 받아내 만나다가 싫증 나면 또 다른 만남을 찾는 상대 중의 한 명인가 보다. 그와 잠자리까지 한 선배들도 두어 명 있다던데.’

뭔가 마무리 지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집에 가겠다고 손을 흔들었다.


서미는 기영의 ‘친구 사이’라는 말에 그의 전화를 반신반의 기대하지 않고 유학 준비에 전념했다. 그러던 11월 말경에 기영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서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물었다.

“서미, 나를 어떻게 생각해?” 

“친구 사이라고 먼젓번에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그는 서미의 야무지게 내뱉은 소리를 더듬듯이 말이 없었다. 둘은 다시 침묵 속에서 목적 없이 걸었다. ​​​​​​​​추웠다. 그가 잔기침했다. 어둠 속 저 멀리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붉은 글씨로 ‘모텔’ 사인이 빛났다.

“우리 잠깐 저기 들어가서 쉬었다가 갈까?”

“아니, 그냥 집에 갈래요.”

“단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두려워서 그래.

“그런 게 아니라 집에 9시까지는 들어가야 해요.”

“우리 그럼 지금부터 연애할까?”

“친구 사이든 연인 사이든 어차피 헤어질 건데요. ‘만남은 동시에 이별을 향해 달려간다’잖아요. 

기영은 서미의 집 길목에서 손을 흔들며 들어가라고 했다. 둘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다. 


서미는 기영의 사랑을 구애하며 시간을 죽이다가는 상처받을 수 있겠다고 단정했다. 서둘러 유학을 떠났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때 매달려 시간을 보낼 만큼 그는 서미의 전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잊힌 것이 아니라 서미 가슴 한편에 흠집으로 남았다. 이따금 고국에 대한 향수병처럼 그의 일그러진 미소가 훅하고 떠올라 그녀를 뒤흔들었다.


‘기영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연락했을까?’ 서미는 기운이 솟구쳤다. 먼 곳에 있던 것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이것저것 술안주를 준비했다. 시간이 다 되어 커튼을 젖히고 내다봐도 그는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문밖에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서너 번, 4시가 다 되어 검은 차가 멈추더니 기영이 내렸다. 싱거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서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았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 못 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공손히 인사하며 피자 한 상자를 

내밀었다. 

“브루클린에 유명한 피자집에서 사 왔어요, 줄이 길어서 기다리다 늦었어요.” 

‘아! 기영이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이 여자 저 여자를 찔러봤구나.’ 내가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이 여자는 줬나 보다.


대학 시절, 인생에서 너무도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고도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서로의 형편을 다 알기라도 하는 듯 반가웠다. 식탁에 앉기가 무섭게 서울에 사는 동기 소식을 물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했어. 기억이 희미해져 우리 과 애들 이름도 가물가물해. 오히려 뉴욕에 사는 서미가 더 많이 알지 않아?”

서미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기영의 부인이 서미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서미가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서미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문득 그가 ‘알아는 들은 건지?’ 의심이 가며 맥이 풀려 조용해졌다. 기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지금도 서미가 귀엽지만, 예전에도 귀여워서 인기가 많았는데,”

서미는 그의 시력도 시원치 않아 자기 모습이 안개 속의 여인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왠지 서글펐다. 벌써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늙었단 말인가! 


서미는 기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셔요. 생각나요. 우리 과 모두 철도 길가 아줌마 소줏집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술 내기했던 것 그때 기영씨도 있었잖아요. 여자팀이 이겼는데.”

“아! 생각나지. 그때 서미가 끝까지 취하지 않고 마지막 잔을 비워서 여자팀이 승리했지. 서미 쾌 술이 샜지. 지금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술도 못 마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그리 늙은 나이도 아닌데요.”

“이이 말이 맞아요. 이가 성치 않아 깍두기를 먹고 싶다면 찌개로 만들어 물렁물렁한 무를 씹을 정도로 치아도 좋지 않아요. 몸이 좋지 않아 일찍 은퇴하고 쉴 겸 미국에 여행 왔어요. 서울에 있다가는 간암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간병차 시누이 집에 머무르고 있어요.”

옆에 앉은 참한 부인이 간호사라도 되는 듯 거들었다.


서미는 혹시나 그가 자신처럼 싱글로 미국에 온 것은 아닌가 기대했었다. 그런데 간호사 같은 와이프를 데리고 나타나 귀가 들리지 않아 옛 친구들의 소식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시야가 흐려 내일모레 60인 서미를 귀엽다고 하지를 않나. 간이 좋지 않아 술을 못 마신다. 이가 성치 않아 깍두기를 씹지 못한다니.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추가 멈춘 듯 기영과의 시간이 뚝 멈췄다. 

술판이 무르익을 초저녁 8시, 그는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싱거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서미는 그를 더는 잡지 않았다. 그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무는 해를 보며 배웅했다. 붉은색이 푸른색으로 그리고 검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 창가에 앉아 잔을 비웠다. 

“친구는 헤어지지 않아”

예전에 기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쳐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 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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