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이 말했다.
“대낮부터 술? 뭐, 어때. 밥 먹고 집에 갈 일만 남았는데. 취기 어린 걸음으로 콧노래나 부르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신희가 흔쾌히 잔을 맞부딪혔다.
지경은 아이 머리통만 한 와인잔 바닥에 깔린 진득한 검붉은 액체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한 모금 깊게 들이켜며 입을 뗐다.
“정말 너무한 것 같지 않니? 한 사람하고만 평생을 산다는 거 말이야. 10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법이라도 있어야지.”
신희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남편이 아무리 선한들 지겹고 지루해 죽겠어. 마치 눅눅한 동굴에 갇힌 기분이야. 여기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결혼 전엔 왜 몰랐을까? 이토록 지독한 권태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지경이 턱을 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얼마 전 남편에게 물었어. ‘나랑 사는 거 지루하지 않아?’ 그랬더니 아니라는 거야.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오히려 숨이 턱 막히더라. 그 느낌 알지?”
신희가 칼칼한 목구멍 속으로 와인을 털어 넣으며 답했다.
“알고 말고. 남편이 싫어서라기보다 그냥 ‘변화’가 절실한 거지. 며칠 전엔 큰맘 먹고 제안했어. ‘나랑 헤어지면 당신도 젊은 여자랑 살 수 있고 좋잖아?’ 그랬더니 돌아온 말이 가관이야. 서류 정리하기 귀찮대. 새 여자를 어떻게 믿고 돈을 맡기냐며, 그나마 모은 재산 사기당할까 봐 싫다더라. 그놈의 돈이 뭐라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새로운 삶과 바꿀 용기도 없는 거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며 10년 뒤에나 다시 얘기하자고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데, 정말 정이 뚝 떨어지더라.”
지경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법으로 10년마다 갱신 기회를 줘야 한다니까. 그러면 불륜이니 상간녀니 하며 진흙탕 싸움할 필요도 없고, 헤어진 남편과도 쿨하게 친구로 지낼 수 있잖아. 법이 사람을 이 프레임 안에 꽁꽁 가둬두는 거야. 아, 일본엔 ‘졸혼’이라는 것도 있다며? 이혼은 안 하되 서로 참견 안 하고 재산도 안 나누는 거. 그거 너무 매력적이지 않니? 그래서 나도 서류 문제 골치 아프면 졸혼은 어떠냐고 슬쩍 던졌더니, 또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딱 자르더라고.”
신희가 잠시 상념에 잠긴 듯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냈다.
“저 먼 나라 니카라과던가? 거긴 여자들이 나그네와 인연을 맺는 게 자연스럽대. 남자가 떠나면 미련 없이 보내주고, 또 다른 나그네와 새롭게 시작하는 거지. 여자는 일손이 필요하고, 나그네는 쉼터가 필요하니 서로 좋잖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연 속에서 스스로 자라나고. 짐승들도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평화롭게 산다더라. 질투도, 집착도, 소유욕도 없는 행복지수 높은 세상인 거지. 지경아, 네 표정을 보니 아직 수긍이 안 가나 본데, 우리가 ‘검은 머리 파뿌리’라는 관습의 동굴 속에 갇혀 살아서 그래. 프레임 밖엔 분명 그런 세상이 존재해. 내가 니카라과 사람한테 직접 들은 얘기야.
지경은 잠시 니카라과의 낯선 풍경 속에서 나그네를 맞이하는 자신을 상상하는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곳에선 질투나 집착 없이, 그저 물 흐르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화로운 자연인이 될 수 있겠네?”
신희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척박한 환경과 싸워야겠지만, 적어도 이곳처럼 시기하고 비교하며 증오 속에 살진 않겠지. 한 남자가 떠나면 또 다른 인연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야. 주야장천 한 남자랑 살며 현모양처 대접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니? 니카라과 여자가 훨씬 앞서가는 삶이지. 이런 얘길 LA 친구한테 했더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며 정신 차리라더라만.
잔을 비운 지경이 흥분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꼭 니카라과가 아니더라도 방법은 있어. 얼마 전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자아실현의 정점에 선 예시로 한 여선생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50세에 퇴직하면서 남편에게 퇴직금 절반을 떼어주고 이혼했대. 그리고 백팩 하나 메고 떠나서 동남아를 유랑하며 자유인으로 산다는 거야. 인도인 애인도 있는데, 우연히 만나면 하룻밤 지내고 미련 없이 헤어진대. 강사는 그게 진정한 자아실현이라던데, 정말 그럴까?”
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할 것만 포기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게 어디 쉽니? 대부분은 그만한 용기가 없어서 하위 단계인 안전과 소속의 욕구에 머물러 지지고 볶으며 사는 거야. 남의 이목이 두렵고, 안락함을 포기하기엔 게으른 거지. 결국 한 번뿐인 인생을 마음껏 써보지도 못하고 그냥저냥 늙어 죽는 거야.”
지경이 동조하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제도도 문제지만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회도 문제야. 생긴 대로 살겠다는데 웬 참견들이 그렇게 많은지. 이혼을 하든 불륜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자유롭게 살게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고독사로 죽든 말든 본인 선택인데 말이야.”
신희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털어 넣고 시계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이런, 벌써 시간이! 저녁 차릴 시간이야. 집에 가서 밥해야지. 그 인간, 배고프면 성질 머리 대단하잖아. 요즘 세상에 먹을 게 지천인데 왜 배만 고프면 야만인이 되는지 모르겠어.”
“어머, 나도 그래! 저녁 할 시간이 빠듯하네. 우리 얼른 H-마트 들러서 밑반찬이라도 좀 사 가자.”
지경과 신희는 32가 K-타운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여자는 각자 남편이 좋아할 만한 찬거리를 골라 들고, 누군가 ‘25년을 버티면 성공한 삶’이라 명명했던 그 견고한 결혼이라는 이름의 동굴을 향해, 김빠진 콜라 같은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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