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시간에 쫓기는 것을 질색하는 미스 송은 전날 밤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뉴욕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나와 차 뒷좌석에 넣었다. 남자 친구 남은 어디에 숨어서 찾기를 바라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15분쯤 지난 후 남이 긴 다리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나왔다.
“여행 가방은?”
“이미 뒷좌석에 넣었어요.”
나에게 말하지 않고 그 무거운 것을. 자 그러면 출발합시다. 무슨 음악을 틀어드릴까? 클래식, 재즈, 한국 음악.” 시디를 꺼내 보여주며 고르라고 했다.
“그냥 듣고 싶은 것으로 트세요.”
느린 리듬으로 흐느적거리는 Sade-Smooth Operator 틀고 그는 창문을 올렸다 내렸다. 앞 유리 창문을 잘 닦으려는지 차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발하려는 순간, 남은 바지 뒷주머니를 만지더니 깜빡 지갑을 놓고 나왔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감무소식이다. 한참 후, 부산스럽게 나왔다.
“매일 놓아둔 곳에 지갑이 없어서 찾느라고.”
드디어 그가 엑셀을 밟고 차는 떠났다.
미스 송은 어릴 적부터 신경이 예민했다. 오감을 곤두세운 까칠한 성격으로 부모를 힘들게 했다. 학교생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대학원 졸업 후, 2년 동안,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 강사를 하다가 뉴욕으로 유학 왔다. 석사과정 중 친구의 소개로 LA에 사는 남을 만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남이 뉴욕에 놀러 왔을 때 미스 송은 자기와는 달리 유순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 훤칠한 키, 잘생긴 자기 얼굴에 관심 없는 듯한 소탈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자신의 까칠함을 유모로 받아주는 그의 느긋한 여유에 끌렸다.
두 사람은 남이 두 번 뉴욕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여 년간 전화와 스카이프로 만남을 이어왔다. 둘은 그런대로 통화상으로 잘 통했다. 남의 아버지가 둘의 만남을 알고 미스 송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LA에 오라고 했다. 오늘은 일주일을 그의 집에서 머무른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고 공항 가는 중이다.
운전하던 남이 말했다.
“비행기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우리 저 옆길로 빠져 산타모니카 비치에 잠깐 들렀다 가지요?”
미스 송은 다른 것은 몰라도 비행기와 기차 시간은 놓치지 않으려고 서두른다. 평소, 사람들과 약속도 조바심을 치며 차라리 일찍 나가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성격 탓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개근상도 받았다. 그런데 공항 가면서 비치에 들렀다 가자니! 미스 송은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뒤뜰 야자수 밑에서 그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요. 제 아들의 모자란 점을 감싸주며 잘 살아줬으면 해요. 결혼식은 제가 다 준비할게요.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오시면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미스 송은 미국에 6년이나 먼저 온 남이 미국 생활 선배인지라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을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거니까. 제가 다 알아서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이, 남 기사만 믿으세요. 허허허.”
드넓은 모래밭 저 멀리 바다가 미스 송을 반기듯 넘실거렸다. 파도가 물거품을 몰고 와 놓고 가는 소리에 그녀의 조바심과 긴장이 풀렸다.
“와 좋네요.”
“오길 잘했죠? 우리 저 비치에서 좀 쉬었다 갑시다.”
남은 바닷물 가까운 모래 위에 벌러덩 누웠다. 미스 송은 그의 곁에 앉아 한동안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다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 남을 봤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다. 공항에 빨리 가자고, 말해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신경이 곤두섰다. 일어났다. 치마에 묻은 모래를 탁탁 소리 내 털었다. 남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미스 송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먼바다를 보다가 누워있는 남을 힐긋힐긋 보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정말 잠에 빠진 듯 꼼짝하지 않았다. 미스 송은 LA에 방문한 자기를 관광시키느라 피곤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유난 떤 달 가봐 피곤한 그에게 재촉하지 못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빨리 흘렀다. 도저히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근육이 조여들었다. 참다 참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비행기 시간이~ 여기서 공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미스 송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빨리 가는 길을 아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앉아봐요. 저 푸른 바다를 보며 바람을 느껴보세요. LA는 축복의 땅이에요. 따스한 햇볕 아래 누워 바람이 몸을 감싸면 스르르 잠이 들어요.”
“주무셨어요?”
“아녜요. 잠깐 생각에 빠졌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미스 송을 좋아해요. 결혼 하라는데. 미스 송은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결혼하실 건가요?”
“아니 그 이야기는 뉴욕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왜 결혼 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시간이.”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시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비행기 시간이. 공항에 가서 수속도 해야 하는데. 늦은 것 아닌가요?”
“염려 마시라니까요. 제가 LA에 6년 살면서 수시로 비행장을 들락거렸습니다. 일찍 가봐야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뿐이 없어요.”
미스 송은 비행기를 놓친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의 널널한 얼굴에 대고 까칠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도 저는 빨리 공항에 가고 싶어요.”
“그럼 가도록 하지요.”
남은 공항 근처 맥도날드 간판을 보자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여긴 왜 또?”
미스 송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해서. 맥도날드 커피가 가격도 싸고 맛있어요. 잠깐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갑시다. 순간, 미스 송은 이 남자는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를 마실 기대에 들뜬 그의 느긋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는 마시지 않겠어요. 차에 있을게요. 빨리 갔다 오세요.”
“그러지말고 들어갑니다. 전 맥도날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꼭 들려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버릇이 미국 오고부터 생겼거든요.”
미스 송은 잡아끄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끌려가다시피 들어갔다. 그에게 서두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가 사이인지라 아무 말 못 하고 빈 의자 귀퉁이에 반은 안고 반은 선 자세로 그가 긴 줄 맨 뒤에 서는 것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 남자가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나를 정말로 좋아하나? 아니면 내가 어떻게 성질 내놔보려고? 온갖 상념에 빠져 잠시 비행시간을 잊긴 했지만,
“자 애플파이와 커피 드세요. 저는 6년 전 미국에 이민 오던 날, 먼저 이민 와서 자리 잡은 작은아버지가 맥도날드에서 사준 애플파이와 커피 맛을 잊지 못해요. 바로 이 맥도날드에서요. 저기 보이지요. 저 야자수를 보며 커피 향을 맡는데 과연 내가 미국에 오긴 왔구나! 감격했지요. 실은 아버지가 저 초등학교 때 한국을 떠나면서 온 가족 이민 초청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온 가족 초청이 쉽지 않아서 10년도 더 넘게 기다렸어요. 옛 친구를 만날 때마다 너 미국에서 나왔니? 라고 물었어요. 아직 가지 못했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너무 곤욕스러웠어요. 저는 공항 갈 일이 있으면 항상 이 맥도날드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스 송은 공항 가까이에 와서 그의 이런 긴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질질 끌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커피잔을 든 손이 떨리고 경련이 날듯 몸도 떨렸다. 미스 송은 그의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을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몇 시죠? 빨리 가야 하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아요. 공항에 가서 나머지 이야기는 듣도록 하지요. 이렇게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는 비행기를 놓칠 거예요.”
“성질도 급하시네. 미국에서 살려면 잘 기다려야 해요. 제가 미국 생활하면서 배운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어요. 저는 항상 기다릴 때 긴 줄에 가서 서요. 긴 줄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줄이거든요.
미스 송은 그의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친다는 생각뿐이었다. 핸드백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핸드백이 탁자의 커피 컵을 쳤다. 커피는 그녀가 입은 주홍색 원피스 치마에 길게 선을 그으며 쏟아져 구두에 떨어졌다.
“어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공항에 가서 갈아입을게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 빨리 공항으로 가요.”
긴장으로 열받은 미스 송이 커피를 마시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쓰러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그냥 이 남자를 떼어 버리고 비행기 안 좌석에 혼자 앉아 와인이나 들이키고 싶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 돌아가서 밀린 일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미스 송은 꼭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급히 뒷좌석에서 짐을 끌어내렸다.
“아이고 급하시긴. 제가 하려고 했는데. 차를 파킹하고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기다려요.”.
‘이 인간 미쳤구나! 시계는 보라고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미 없이 손목에 달고 다니나? 한 번도 시간 확인을 하지 않다니! 중얼거리며 미스 송은 몸을 획 돌려 여행 가방을 끌고 서둘러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뉴욕 가는 항공사 직원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비행기가 방금 문을 닫았습니다.”
라는 직원 말에 미스 송은 옴짝달싹 못 하고 말뚝처럼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다행히도 4시간 후에 떠나는 비행기가 또 있었다.
차를 파킹하고 미적거리며 걸어오는 남이 저 멀리 보였다. 미스 송은 체념한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얼마나 찾아 헤맸다고요.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 떠났어요.”
“아! 떠났어요? 미스 송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그리된 줄 몰랐네. LA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는 수시로 있어요. 뭐 기다리면서 못다 한 이야기나 하지요.”
미스 송은 남의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고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바쁘신데, 집에 가세요. 저 혼자 기다렸다가 타고 갈게요.”
“혼자서 기다리면 지루해요. 제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요.”
미스 송은 속으로 느려터진 것이 고집도 세다고 생각하며 어처구니없게 놓친 비행기가 아쉬워서 씩씩거리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교양 있는 여자가 어찌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그녀는 그가 계속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필요한 것이 있나요. 신문 사러 갈 건데.”
“없어요.”
까칠하게 대답했다.
미스 송은 신문을 사서 여유작작 걸어오는 남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섰다. 화장실을 나와 그를 피해 가게들을 둘러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이 키 크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야무진 데라고는 찾아볼 구석도 없고.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는지. 애타는 내 맘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공항 안을 빙빙 돌다가 마지못해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옆, 옆자리에 앉았다.
남은 미스 송을 보자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반가운 얼굴로
“아니, 어디 가서 오랫동안 오지 않았어요. 걱정했잖아요. 이리 가까이 앉아봐요. 비행기를 놓쳤다니까 옛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몇 년 전 캐나다에 갔다가 뉴욕에 가는데 그만 비행기를 놓쳤어요. 분명히 시간이 충분했는데 신문을 보다가 그만. 제가 신문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지거든요. 3시간 후 뉴욕 가는 비행기가 또 있길래 읽던 신문을 마저 읽다가 깜빡하고 또 놓칠 뻔했지요.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 마지막 손님으로 운 좋게 탈 수 있었지요.”
오늘 같은 실수의 헛소리를 신이 나서 지껄이는 그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미스 송은
맙소사! 이 남자는 구제 불능이야. 끝이다. 끝이야. 속으로 외치며 벌떡 일어나 단호한 목소리로
“저 이제 게이트로 가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어요.”
“아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들어가려고요.”
“이야기 듣다가 또 놓치면 어쩌라고요. 인제 그만 가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럼 뉴욕에 가서 연락하세요.”
남은 마지못해 씁쓸한 얼굴로 일어나 등이 굽은 모습으로 느릿느릿 공항입구를 향해 가서 뒤돌아보더니 왼쪽으로 사라졌다.
미스 송은 게이트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지친 몸이 축 처져 의자를 파고들어 가는 듯 긴장이 풀렸다. 남과의 인연을 찬찬히 다시 리와인드 했다. 사람은 온순하고 착한 것 같지만, 결혼해서도 느릿느릿 늘어져 살아갈 것이다. 성질 급한 나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미칠 것이다. LA에 가서 남의 부모님을 만나고 노처녀 신세 면할 기대에 부풀었는데 차라리 노처녀 미스 송으로 사는 것이 낫지. 그러고 내 이름 ‘아라’는 남씨 성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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