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의 재회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렸다. 브루클린 G 트레인 나소 애비뉴 역 입구에서 한 중늙은이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로 눈을 부릅뜬 채 누군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퇴근 시간, 지하철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사람들을 프랭크는 하나하나 뚫어지게 노려봤다. 대머리 밑, 미간의 굵은 두 줄 주름이 더욱 깊게 패였다. 휘둥그레 뜬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하이, 프랭크.”
찰리가 인사를 건넸지만 프랭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빗물이 그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돋보기안경을 뿌옇게 흐렸고, 안경알에는 빗방울이 맺혔다. 오래전 큰맘 먹고 장만한 듯한 양복은 그동안 한 번도 세탁하지 않았는지 기름때로 번들거렸다. 왁스 칠을 한 것처럼 낡은 재킷 위로 빗물은 감히 스며들지 못하고 굴러떨어졌다. 프랭크는 작은 키와 가는 다리와는 대조적으로, 상체는 마치 방탄조끼라도 입은 듯 가슴이 툭 불거져 있었다. 누군가 양복 안주머니에 든 것을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 듯 양팔로 가슴을 꼭 껴안은 형상이었다.
몸의 일부처럼 늘러붙은 검은 양복 단추 사이로 검은 조끼가 보였다. 조끼 안 꾀죄죄한 누런 와이셔츠 위에 자주색 바탕, 미색 다이아몬드 문양이 새겨진 넥타이를 맨 그를 보며 찰리는 생각했다. '낡긴 해도 갖출 것은 다 갖췄군!'
찰리는 5년 전 집을 장만하느라 사채업자인 프랭크에게 돈을 빌렸고, 제때 모두 갚았다. 그런데 요즈음 다시 사정이 좋지 않아 프랭크에게 급전을 부탁하러 나온 참이었다.
찰리가 프랭크와 만나는 장소는 1906년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그린포인트 세이빙 뱅크(Greenpoint Savings Bank) 건물 안이었다. 프랭크는 웅장한 건물 내부, 높은 돔 천장 아래에서 가슴을 한껏 부풀리며 마치 은행 주인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렸다. 그는 양복 단추를 조심스럽게 풀고, 귀중한 보물이라도 꺼내듯 천천히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수첩 역시 그의 양복만큼이나 낡아 있었다. 모서리는 닳아서 둥그스름해졌고 종이는 누렇게 바랬다. 수첩은 고무줄로 가로세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고무줄을 풀더니, 수첩을 코앞까지 대고 기록을 찾았다. 찾는 기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원상태로 고무줄을 가로세로 여러 번 감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려는 듯 가슴을 두서너 번 탁탁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끼 안주머니에서 또 다른 수첩을 꺼냈다. 조금 전과 똑같은 행동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기록을 찾았는지 이름을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슬쩍 일그러뜨리며 찰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에게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막으려 코를 손으로 가린 채 기다리던 찰리는,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음, 5년 동안 밀리지 않고 잘 갚았군. 좋아. 얼마가 더 필요한가?”
그 한마디에 찰리는 속으로 외쳤다. ‘이젠 됐구나.’ 찰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멀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6년 전 과거 회상
찰리는 6년 전인 1986년 1월, ‘어떻게 돈을 벌어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지역 주간지인 〈그린포인트 가제트(Greenpoint Gazette)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매물로 나온 상가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는 곧장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이 든 여직원이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다가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여기 신문에 나온 매물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찰리가 공손히 물었다. “지금 같이 갈 수는 없어요. 주소를 줄 테니 한번 가보고 마음에 들면 다시 와서 이야기하죠.” 여자는 명함 한 장과 함께 약도를 그려주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4층 건물이었다. 첫 번째 문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마치 주인을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열렸다. 왼쪽 벽에는 황동 우편함들이 주르륵 붙어 있었다. 우편함 밑에 적힌 세입자들의 이름을 쭉 훑어보니, 성(Last name)이 대부분 ‘~스키(~ski)’로 끝나는 폴란드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1층 내부를 살피니 천장이 엄청나게 높았다. ‘나쁘지 않군(Not bad).’ 찰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다시 부동산 사무실 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말도 안 돼’ 하며 돌아섰다가도, ‘아니야, 어쩌면 될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돌리기를 서너 번이나 반복했다. ‘두드리면 열린다. 비록 항상 열리지는 않을지라도, 두드려보기는 해야지.’ 부동산 사무실 문 앞에서도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왔다 갔다 망설였다. ‘까짓것, 갈 데까지 가보자! 아니면 마는 거지.’ 마침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집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당장 수중에 돈이 없어요. 시간을 좀 주시면련 마련해 보겠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피곤에 지친 파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찰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좋아요. 원주인은 이미 사망했고 상속인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상속인 여섯 명을 다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동안 자금을 마련해 오세요. 부족한 돈은 우리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동네 사채업자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소. 대신 가계약은 맺어야 합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100달러만 내면 건물을 잡아두겠소.”
찰리는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셈 치고 100달러를 건넨 뒤 영수증을 받아 나왔다. 고된 삶의 무게를 질질 끌며 방황하던 찰리의 발걸음은, 그 계약 이후 마치 모터라도 달린 듯 분주해졌다.
1년 후 잔금 날
그로부터 일 년 뒤인 1987년 1월 17일,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찰리는 질척거리는 길을 걷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변호사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창 안을 들여다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사무실 안에는 부동산 브로커와 복잡하게 얽힌 매도인 측 사람들, 타이틀 컴퍼니(부동산 소유권 보증회사) 직원, 그리고 변호사가 모여 있었다.
프랭크는 매도인에게 수표를 넘겨야 할 타이밍에 맞춰 점잖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홈리스에게서나 날 법한 악취가 바람을 타고 실내로 훅 쓸려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냄새는 점점 더 역해졌다. 하지만 사무실 안 사람들은 이 자산가와 오랜 인연이 있는 듯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찰리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창문이라도 열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직원이 조금만 참으라는 듯 그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 당시 신용 기록(Credit) 없이 상업용 건물 융자를 얻으려면 은행 이자가 13.5%에 달했다. 그런데 프랭크는 10%만 요구했다. 은행 이자보다 오히려 조건이 좋았던 것이다. “한번 돈을 빌려서 잘 갚고 나면, 언제든 이 집을 담보로 또 빌려줄 겁니다.” 옆에 있던 부동산 브로커가 거들었다.
프랭크는 어린 시절 동네 극장에서 표를 받는 일부터 시작해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채놀이였다. 적은 돈이 이자를 낳고 그 이자가 다시 새끼를 치며 큰돈으로 불어났고, 건물을 한 채 두 채 사 모으면서 부를 일구었다. 돈맛은 더 큰 돈을 불렀고, 그의 낡은 검은 양복 가슴은 방탄조끼를 입은 듯 날이 갈수록 부풀어 올랐다.
부를 축적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자 삶의 희망이었다. 톱니바퀴가 쉴 새 없이 돌아가듯 사채업은 그의 관성이 되어버렸다. 그의 오감은 오로지 눈 뜨면 들어올 돈과 새로 내어줄 돈놀이에만 쏠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늘 돈이 돌고 도는 세상만 바라보는 듯 멍해 보였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를 찾았고, 그는 이자와 원금을 제때 갚을 만한 인물을 물색하는 생각과 행동에만 몰두했다. 찰리에게 ‘프랭크’라는 존재는 돈, 이자, 사채업자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런 이미지가 없는, 백지와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길거리를 배회하는 그의 모습을 본 이후였다. 수금이 제때 되지 않는 날이면 프랭크는 초췌한 얼굴로 그린포인트 사거리를 배회했다. 마치 도망간 누군가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눈을 번뜩이면서 말이다.
프랭크의 죽음과 결말
그 역시 처음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부를 모았을 것이다. 한때는 결혼을 하려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힘들게 모은 재산을 행여 잃게 될까 봐 늘 두려워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으로, “여자는 돈을 삼키는 기계야.” 라며 재산 관리를 잘하라는 듯 찰리에게 슬쩍 내뱉곤 했다.
당연히 그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일가친척도 없었다. 쓰는 재미는 모른 채 모으는 재미만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 사랑도, 외로움도, 슬픔도 느끼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멈추지 않고 돌아가던 돈 모으는 기계. 그것이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찰리가 송금한 원리금 수표가 은행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프랭크의 변호사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수표 수취인을 ‘프랭크 에스테이트(Frank Estate, 프랭크의 유산 재단)’로 기재해 변호사 사무실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평소에는 왕래조차 없던 필라델피아의 먼 친척 여동생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했다. 돈을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돈을 만들던 톱니바퀴가 멈추자 그 방대한 재산은 뜻밖에도 연고도 없던 먼 친척의 품으로 고스란히 굴러떨어졌다.
모처럼 그는 수의 대신 새 양복을 입고 관 속에 누웠을 것이다. 그 새 양복 안주머니에도 그 낡은 수첩들이 들어 있었을까? 어찌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움켜쥐던 방탄조끼 같은 가슴을 다 비워내고, 그처럼 납작한 가슴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었을까. 찰리는 프랭크가 너무 억울한 나머지 저승으로 가지도 못하고, 바르도(Bardo, 이승과 저승의 중간 세계)를 헤매며 자신이 빌려준 돈이 제때 들어오는지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법적 저당권 말소 서류인 '저당권 해지 증서(Satisfaction of Mortgage)'를 손에 쥐고서야 찰리는 비로소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핼로, 프랭크.” 찰리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살려고 문을 두드린 건 나였고, 문을 열어준 건 너였다.”
비 내리는 그린포인트 사거리에는, 아직도 낡은 검은 양복 차림의 프랭크가 빚쟁이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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