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10, 2023

써니사이드

거울에 비친 칙칙한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다. 부스스한 머리털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생기를 잃고 푹 꺼진다. 찌든 무스를 발라 앞머리를 세웠다. 활기를 잃고 다시 눕는다. 거울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타인을 보듯 빤히 쳐다봤다. 눈 밑 다크서클이 더 커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봐줄 만했던 모습이 이렇게 변했다니! 초췌한 내 모습에 내가 섬뜩하다. 흰 셔츠를 입었다. 거울 속의 흰 셔츠 깃이 유난히도 누렇다. 푸른 셔츠로 갈아입고 재킷을 걸쳤다. 조금 나아 보이는 것 같기는 하나 여전히 후줄근하다. 삐죽 나온 깃을 재킷 안으로 밀어 넣고 매만졌다. 거울 속 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이 마치 구겨진 이불 꾸러미 같다. 주머니 바닥에 동전 서너 개가 잡혔다. 

부지런히 옷장에 걸어둔 외투 주머니들을 뒤졌다. 숨어있는 지폐가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뒤지다 지난달에 이미 다 훑었다는 생각이 났다. 책상 위, 유리병에 넣어 둔 동전을 쏟아놓고 쿼터만을 골라 부지런히 주머니에 넣었다. 왜 나는 거들떠보지 않느냐는 듯한 이젤 위 캔버스 시선을 외면한 채 발을 신발에 구겨 넣었다.


바람이 분다. 실제 온도보다 춥다. 외투 깃을 올렸다. 잡념으로 가득 찬 무거운 머리는 자꾸만 앞으로 기운다. 텍스타일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일 년 동안 작업만 해보겠다며 빈둥거렸다. 돈이 바닥났다. 

“오셨어요. 그제 오신다고 하시고 오늘로 일정을 바꾸시기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이미 직원을 채용했는데요.”

출판사에 들어서자마자 보스에게 미리 지시받은 여직원이 앵무새처럼 내뱉는다.

“아! 그렇게 됐군요.”

그동안 생계를 위해 해왔던 지겨운 텍스타일보다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낫겠다며 일하려고 했는데. 게으름 피우다 파트타임 자리도 놓쳤다. 

무거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진작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나의 게으름을 탓하듯 눈 부신 태양 빛이 눈을 찌른다.

선글라스를 썼다. 지하철역 쪽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도 딱히 할 일이 없다. 갤러리들이 오프닝 하는 목요일이다. 서너 군데 들려 공짜 술이나 얻어 마셔야겠다.


지하철이 퀸스를 지나 맨해튼에 들어섰다. 졸음의 안개 속에서 헤맸다. 지하철 문을 박차듯 중년 동양 여자가 닫히는 문에 몸을 끼워 넣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 뒤를 따라 여자 둘이 부리나케 탔다. 내 맞은편 다음 칸 의자에 주르르 앉았다.

“얘, 정희 한동안 작품 활동하지 않았잖아. 갑자기 전시회는?” 

호기심 많은 원숭이 닮은 여자가 방금 문을 박차고 끼어들었던 사과처럼 홍조 띤 여자에게 물었다.

“너 몰랐어. 정희 이혼했잖아. 그림이 뭐라고 이혼까지 하면서. 아이들도 어린데. 남편에게 아이들 주고 나와서 작업한다고 난리 쳤으니 전시회라도 열어서 체면 세워야지.”

“어머머, 언제?”

바나나처럼 매끈한 여자가 두 뺨에 양손을 얹고 놀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한국말 소리에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깊숙이 누이고 자는 척하며 귀 기울였다. 


원숭이 닮은 여자는 계속 질문하고 사과 닮은 여자는 신나서 대답한다. 바나나 닮은 여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경청한다. 사과는 목이 칼칼한지 잔기침을 서너 번 하더니 들고 있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지하철 소음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고 묻히고를 반복한다. 사과는 거울을 꺼내 입술에 딸기색 립스틱을 칠한다. 거울 속 잘 칠해진 입술을 확인한 사과가 바짝 그들 가까이 몸을 들이밀더니. 

“내가 들은 바로는 나이 많은 큐레이터 미국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래.”

“어머머, 그러면 혹시 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원숭이는 놀라서  큰소리로 말한 제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주위를 살핀다

“그건 아니고. 이혼하고 아무래도 화가로 유명해지려면 미술 잡지에 평을 받아야 하잖아. 써니사이드에서 그 남자와 동거한대.”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아니야?’ 써니사이드 라는 말에 졸던 내 귀가 활짝 열렸다. 써니사이드에서 늙은 미국 놈과 사는 여자가 누구지? 누구더라? 생각하며 몸을 그들 쪽으로 기울였다.


“그래도 그렇지. 어린아이 둘 내팽개치고 그렇게도 유명해지고 싶을까?”

“정희, 게 대학 때부터 원래 끼가 많았잖아. 유명해지려면 끼가 많든지 아니면 기라도 세든지 해야지 않겠니. 작품만으로는 안되는 세상이잖아. 쉿~  비밀이야.”

누가 그들의 기밀을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획 둘러보다 나에게 시선이 멈추는가 싶더니 서로 눈짓을 교환한 후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내린다고 소란 떨었다. 나는 그들의 목적지가 궁금했다. 써니사이드에 사는 유명해지고 싶어 안달 난 여자도 만나고 싶었다. 누가 알아 혹시 내가 아는 여자일지도.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나도 따라 내렸다.


비가 오려고 꾸물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다. 사람들은 외투 깃을 올리고 부지런히 어디론가 바삐 간다. 나도 깃 속에 몸을 감추고 군중 속에 묻혀 재잘거리며 걷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일상의 족쇄에서 비켜 빠져나와 내딛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거침없다. 마치 세 마리의 새가 새장을 뚫고 나온 것 같다. 날개만 달리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기세다.


다행히 사과가 빨간 코트를 입고 있어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사과는 원숭이, 바나나보다 싱싱해 보인다. 계속 질문하는 호기심 많은 원숭이에게 대답하며 웃는 옆얼굴이 상큼하고 매력적이다. 빨간색이 나에게 따뜻하게 다가온다. 나는 따라갈 수 없는 곳까지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사과의 빨간 외투 뒤 터진 틈새로 드러난 맨다리가 무척이나 희다. 순간, 빨간 외투 옆에서 조용히 걷는 베이지색 반코트를 입은 호리호리한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낯익은 몸짓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스친 듯한 뒷모습이 눈에 익다. 한층 더 호기심이 생겼다. 외투 단추를 꼭 채우고 깃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바짝 따라붙었다.


그들은 대로에 늘어선 가게 안을 기웃거리느라 잠깐씩 멈추곤 했다. 대부분 원숭이가 윈도 안을 들여다보고 지껄이면 사과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바나나는 시종 웃으며 조용히 경청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붐비는 큰길을 벗어나 옆길로 들어섰다. 목적지의 주소를 확인하려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봤다. 바나나가 하얀 검지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레노베이션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건물 앞에는 집수리 재료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다. 그들은 잠깐 망설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건물로 다가갔다.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건물 뒤쪽을 향해 갤러리 사인이 있다. 새로 생긴 갤러리인가보다. 나는 호기심의 실체가 드러날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에 사인 방향으로 주저하듯 발을 천천히 옮겼다. 갤러리 문 앞에서 선글라스를 벗을까? 말까? 망설였다. 검은 털모자를 쓴 당꼬바지 위에 허술한 회색 트위터를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선글라스를 벗고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다. 문 맞은편 작품부터 보며 안쪽으로 발을 서서히 옮겼다. 직사각형의 갤러리 안 오른쪽에 와인병이 놓인 식탁이 보였다.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떠들었다. 


조용히 미소 짖고 사람들 말에 경청하는 바나나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내가 한때 좋아했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녀를 바나나의 모습에서 봤다. 스물하나였던 그녀는 바나나처럼 조용하고 피부가 하얬다. 가까이 다가서면 핏기 없는 하얀 얼굴 밑 핏줄이 보이는 듯했다. 꽁꽁 언 강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싸늘한 모습이었다. 아! 생각난다. 별명이 ‘얼음공주’라고 했던 것이. 그녀의 조곤조곤한 속삭임을 귀담아들으려면 귀 기울여야 했던 여자다. 


눈 쌓인 겨울 어느 날, 그녀를 만났다. 커다란 모자가 달린 회색 울코트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길 잃은 토끼 같았다. 

“할아버지 집에 엄마 심부름 가야 해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함께 가도 되나요?”

내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서 강을 끼고 꼬불거리며 한참을 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 그녀를 잡아주려고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던가!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눈 녹은 웅덩이를 토끼처럼 팔짝 뛰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그녀는 조금 전 갤러리 건물을 가리키던 바나나의 하얀 손가락처럼 할아버지 집을 가리켰었다. 나는 그녀의 할아버지 집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지금처럼 한동안 서성거렸다. 그녀가 머리통만 한 배를 들고나와서 내 손에 안겨주던 모습이 바나나를 닮았다.


써니사이드에서 나이 든 큐레이터와 동거한다는 여자인가보다. 머리는 무스를 발라 한껏 세우고 발목까지 오는 검정 면 드레스 위에 은목걸이를 늘어트렸다. 엄청 쎄보인다. 사과 말대로 끼와 기를 겸비한 인상이다. 그녀 옆에 늙수그레한 키 큰 허연 미국인이 우뚝 솟아있다. 그가 유명한 큐레이턴가 보다. 어디선가 본 늙은이다. 술을 얻어먹으려고 들락거리던 갤러리에서 마주친 눈에 익은, 동양 여자들을 몰고 다니던 영감탱이다. 


사과는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와 이야기하다 고개를 젖히며 매력적인 자기 외모를 과시하듯 크게 웃는다. 젊음이 시들기전 싱그러운 모습이다. 천정을 향해 치켜든 뭉툭한 코가 귀엽다. 꽃잎 같은 빨간 입술이 불빛 아래서 요염하게 열렸다 닫힌다. 원숭이는 조금 전 문 앞에서 만난 당꼬바지 남자와 떠든다. 그러다가 그 남자를 바나나에게 넘기고 나이 지긋한 커플에게 다가가며 와인잔을 수시로 작은 입에 가져간다. 


바나나는 고개 숙이고 원숭이에게 넘겨받은 남자 말에 경청하고 있다. 왼팔에 쑥색 가방을 들고 오른손엔 책을 들었다. 검은 바지와 베이지색 반코트 위에 명품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노처녀 모습이다. 시선을 주지 않는 척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조금 가까이 갔다. 원숭이가 바나나에게 다가서며 뭐라고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가 했더니 방금 문을 열고 들어선 검은색과 흰색 격자무늬 코트를 입고 샤넬 백을 멘 번들거리는 얼굴로 웃는 여자를 쳐다본다. 나도 그 틈을 놓칠세라 바나나를 자세히 봤다. 긴가민가 확실치가 않다. 방금 들어온 명품을 두른 여자를 반기느라 바나나가 내 가까이에 왔다. 화장기 없는 얇은 쌍꺼풀 눈이다. 쌍꺼풀 수술을 했다면 모를까 예전 그녀의 눈이 아니다. 카메라를 든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며 모두 모이라고 했다. 여자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바나나를 원숭이가 손짓으로 불렀다. 가장자리에 서서 부끄러운 시선으로 서 있는 불빛 받은 바나나는 예전의 내가 좋아한 여자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와인 한잔을 급하게 들이켜고 또 한잔을 들고 바나나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접근했다. 그러나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화가,”

아니다. 나는 화가라고는 말할 수 없는 백수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 저는~”

입 밖에 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릴 때 사과가 바나나에게 다가왔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바나나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내 시선을 느꼈던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응시하던 그녀가  사과에게 고개를 돌리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녀들이 우르르 갤러리 문을 나갔다. 나도 무심결에 따라나섰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대낮보다 붐비지 않고 한산했다. ‘이젠 집으로 가는 것이 낫겠지?’ 어찌할까를 망설이며 구둣발로 바닥을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과의 시선과 마주쳤다. 바나나와는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선정적이다. 내 몸은 따듯한 화롯불을 따라가듯 사과의 빨간 코트를 따라 슬슬 걸었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이 한인타운인듯했다. 점심도 먹지 않은 배에서 밥 달라는 신호가 부리나케 왔다. 그들이 32가 입구에 있는 더큰집 식당으로 몰려 들어갔다. 사과의 빨간 코트도 주춤하더니 사라졌다. 나는 주머니 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집에 ‘라면이 있던가? 없던가?’ 생각하다가 라면 서너 개 살 돈뿐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씁쓸하게 5번가 쪽으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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