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5, 2023

도하는 5번 시다였다


도하가 죽었다. 54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엇갈린 소문이 떠돌았다. 남자들 말로는 남편 몰래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동분서주하다가 열받아서. 여자들 말로는 남편의 외도로 속 끓이다가. 친정 식구들은 시부모 구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시집 식구들은 미국에 초청한 친정 식구들이 자리 잡는데 도와달라는 성화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며 쑥덕거렸다.


장례식장 입구, 왼쪽에는 시댁 식구 오른쪽에는 친정 식구가 각각 두 명씩 조의금을 내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 옆에서 ‘죽은 사람은 알 바 없다.’는 듯 봉제협회 화환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시누이 쪽에서 온 것인지 국제결혼 여성 협회 화환도 방끗 웃고 있다. ‘이순자’라고 쓰인 유난히도 긴 붉은 리본이 달린 화환은 역대 대통령 부인이 보낸 것처럼 거만스럽게 떡하니 버티고 있다. 


장례식장 맨 뒤 통로에 서너 명의 남자들이 눈을 부라리며 두리번거렸다. 키 작은 남자가 발돋움하고 옆에 있는 키 큰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가 알아. 도화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은 여자가 맨 뒷줄에 앉아 죽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일어날지. 그냥 잡히기만 해봐라.”

도화 남편은 와이프가 누구에게 돈을 꿔 줬는지 모른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지난 5년간 말을 섞지 않았다. 단지 돈 꿔 간 사람이 죽음을 확인하러 나타날 것이라는 직감뿐이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어쩔 것인가. 증거가 될 만한 종잇조각 하나 없다. 마지막 가는 도화의 소원도 풀어주고 돈 챙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풀어 놓은 친구들이다.


도화는 가난한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가난은 도화가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2차 시험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엄마, 나 2차 시험 볼래요.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이번엔 꼭 붙을 자신 있어요.”

“2차가 뉘 집 개 이름이냐. 공부할 머리는 안되는가 보다. 집어치우고 따라나서라.”

도하는 엄마가 미리 말해 둔 바느질 공장으로 끌려갔다. 평화 시장 5번 미싱사의 5번 시다가 되었다. 온 중일 어깨를 옹크리고 허리 한번 펴보지 못 한 체 완제품 옷의 실밥 뜯는 일을 했다. 공장 떼기 아니랄까 봐 퇴근길에서도 제 몸에 엉겨 붙은 천연색의 실밥을 떼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레벨도 달고 단추도 꿰맸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엔 피멍 든 바늘구멍이 어린 도화를 눈물짓게 했다. 다행히 손재주가 남다른 도하는 박음질하기 직전 과정을 다른 시다들보다 빨리 끝내고 미싱을 타게 됐다. 언니와 오빠의 등록금을 동생의 학원비를 대며 가족을 부양했다.


70년대 초, 미군과 결혼해 LA 근교에 자리 잡은 누나를 둔 경상도 사나이가 있었다. 누나는 남동생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미국에서 재봉질 잘하면 떼돈 벌 수 있다. 바느질 잘하는 신붓감을 데려와라. 너는 용접 기술을 배워 오고.” 

남자는 인물 없는 도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키 작고 반반하진 못해도 심성이 곱고 성실하고 손재주가 뛰어나니 잘 다독여 살면 돈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지 않겠나.” 

누나 명령이라면 거역 못 하는 남자는 눈 꾹 감고 중매쟁이 바느질 공장장 말만 믿고 두 번 만난 도화에게 청혼했다. 


도화의 바느질삯에 의존하며 생계를 연명하던 도화 엄마는 미국에 가서 생활비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서둘러 결혼식 없는 혼인신고를 했다. 도화는 짐짝처럼 LA로 보내졌다. 미국 도착 일주일 만에 평화 시장 미싱을 타던 도화는 한인타운 바느질 공장 미싱을 밟았다. 바느질 공장만 왔다 갔다 하는 도화에게 평화시장이나 한인타운 바느질 공장이나 매한가지로 돈 버는 노예 생활의 연속이었다. 시부모님은 죽어가는 사람 살렸다는 듯 도화에게 유세를 떨었다. 

“우리 아들 만나지 못했으면 공장 떼기가 감히 미국 구경이라도 해 볼 수 있었겠냐. 너 2,000불 친정에 보냈다며? 누구 맘대로 돈을 보내. 네가 번 돈이라고 네 맘대로 쓸 수 있다는 거야. 미국에 와서 영주권 받아 이렇게 잘 살게 해준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돈을 친정으로 빼돌려.”

오버타임으로 근근이 모은 돈을 시댁 식구 몰래 보낸 것을 들켜 시누이에게 머리채까지 잡혔다. 


“너 미국에 갔다고 미국 사람이 다 됐나 보다. 이 어미는 나 몰라라 하고. 너만 잘 먹고 잘살면 다냐. 왜 제때 돈을 안 보내는 거야.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정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돈 보내기 싫으면 우리 식구 모두 초청해라. 초청만 해주면 우리가 미국에서 빌어먹고 살게.”

천국에라도 가는 듯 희망에 부풀어 도화를 보낸 엄마는 도화 혼자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며 닦달했다. 


양쪽 가족에게 시달리는 와중에 티파니(딸)와 밴지(아들)가 태어났다. 교외에 있는 시누이 집 옆에 커다란 집도 장만했다. 가라지에 미싱 서너 대를 들여놓았다. 아침에 눈 뜨면  아이를 안고 업고 일감을 제시간에 해치우기 위해 미싱을 밟고 또 밟았다. 미싱이 불이 날 정도로  달궈지면 다른 미싱으로 옮겨가며 밟았다. 밥때가 되면 배고프다는 시부모님 성화에 부엌데기로 세상 밖을 나가지 못하고 집 귀신이 되었다. 영어를 읽을 줄 몰라서 운전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는 무지개색 실밥이 풀풀 날렸다. 머리는 산발이었다. 혈색은 누렇게 떴고 병색이 돌았다. 남편도 실밥 묻은 홈드레스를 입은 초라한 아내 모습이 창피한지 외면하고 먼 산 보듯 했다. 도화는 죄인처럼 고개 떨구고 부엌과 가라지만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밑에서 일하는 직공들도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중 은숙만 도화 옆에서 종알거리며 자신의 하소연을 털어놨다. 


까무잡잡한 피부, 커다란 눈과 부푼 가슴을 은근히 자랑하는 은숙은 히스패닉처럼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별일 없이 빈둥거릴 때였다. 교포입네 하고 남자들이 한국에 나가서 예쁜 색시를 데려오곤 했던 70대 초, 미국으로 이민 간 오빠 친구가 한국에 나왔다. 은숙을 본 그는 어려서 봤던 친구 동생의 성장한 색시한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친구를 설득해서 서둘러 결혼하고 은숙을 LA로 데려왔다. 사치스러운 은숙은 미국에 가면 저택에 살며 파티나 하는 줄 알았다. 가난한 부모와 오빠를 졸라 빚을 내 유명 디자이너 파티복 두 벌을 장만해 왔다. 

“아이고, 며느리 인물이 좋네요. 어디서 저런 예쁜 처자를 데려왔담.”

바느질 공장에 다니는 은숙이 시어머니는 동료들의 이구동성에 신이 났다. 은숙은 인물만 멀쩡한 것이 아니라 상냥하고 음식솜씨도 여느 요리사 못지않다.


미국은 은숙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저택은 물론 파티도 없었다. 주말이면 세든 이웃들과 바비큐 하며 맥주 서너 캔을 마시고 떠들다가 끈에 끌려가는 개처럼 월요일에는 일터로 갔다. 기술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미국에 온 남편은 영어를 제대로 못 해 어린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배우지 못한 시어머니는 며느리 인물 자랑하러 다니기에 바빴지만, 점잖은 시아버지는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를 해라. 영어를 못하면 미국에서 어찌 발붙이고 살 수 있겠니?”

“공부라면 지긋지긋해요. 작은아버지 정비소에서 일 배우다가 정비소나 차릴래요. 작은아버지 보세요. 배우지 못했어도 배운 아버지보다 더 돈 잘 벌잖아요.” 

“그럼, 며느리 너라도 영어 학원에 등록해라.”

“저는 공부 머리를 타고나지 않아서. 돈 많이 벌어 대궐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 거예요.”

두 사람 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은숙은 6개월 동안 빈둥거리다가 돈을 벌어 집도 사고 꿈꾸던 멋진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도화의 바느질 공장을 찾았다. 쌓여있는 원단에서 나는 기름과 염색 냄새 속에서 서너 명의 직공들이 재봉질을 멈추고 은숙을 쳐다보다가 자바시장 사장님이 일감을 가져온 줄 알고 하던 일로 시선을 돌렸다. 도화가 미싱 위에 있던 발을 내려놓고 무표정으로 은숙을 빤히 쳐다봤다. 원단 먼지와 실밥도 한몫하려는지 춤추듯 날아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았다.   

“일 배워보고 싶어 왔습니다.” 

은숙의 낭랑한 목소리에 직공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바느질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화려한 은숙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도화를 쳐다보는 은숙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침묵 속을 떠돌았다. 도화는 마치 동공이 닫혀 보이지 않았던 물체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넋 나간 사람처럼 은숙을 쳐다봤다. 은숙은 그 순간 왜 사람들이 ‘쉬엄쉬엄 일해도 뭐라지 않고 도화가 제 한 몸으로 다 때우는 여자.’라는 동네 소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은숙은 무스탕 똥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남편이 정비소에 들어온 폐차 직전의 차를 고쳐서 은숙에게 선물했다. 주말이면 눈이 부실 정도로 세차도 해줬다. 은숙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 끼고 음악 볼륨에 맞춰 몸을 흔들며 드라이브할 때면 그나마 미국에 사는 실감이 나서 위로받았다. 남편은 은숙의 잔소리만 없다면 매달 집세 내고 나면 몇 푼 남지 않은 생활이지만 행복했다. 은숙은 엔진오일 묻은 작업복을 입고 기름때 낀 손으로 자기 몸을 더듬는 남편이 귀찮고 싫었다. 

“언제 집 사서 날 호강시켜 줄 건데. 당신은 머리 써서 돈 더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쇠털같이 하고많은 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 저 낡은 안락의자처럼 짜부라져만 있으니!”

“내가 안락의자로 당신 밑에 깔려 짜부라져 참고 살다 보니 머리 쓸 틈이 없어서.” 

재치 있게 받아치는 남편은 은숙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주말엔 LA 갈비를 잔뜩 사다 바비큐를 즐겼다. 은숙은 고기 먹는 맛이 미국 사는 재미 중의 또 다른 하나라며 남편에게 속은 결혼을 고기 씹듯이 질근질근 씹었다.


도화가 또 임신했다. 은숙에게 시집 식구 모르게 임신중절 수술을 하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은숙은  LA 한인타운에 있는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프리웨이를 달리며 도화에게 충고했다.

“왜 그렇게 죽어 살아요. 일만 하지말고 바람도 쐬고 멋도 부려요. 누구를 위해 돈을 버는데요.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 인줄 알아요. 시집 식구와 맞서 싸워서 자신의 위치를 다져야 해요. 옆에서 보고 있자니 부아가 나서 못참겠어요. 이혼해도 혼자 아이 키우며 살 수 있는 능력 있잖아요.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딴 주머니 좀 차고 지금부터라도 돈을 모아요. 운전면허증도 따고 시민권도 받아서 친정 식구를 초청해요. 시집 식구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게 힘을 키우세요. 도와줄게요.”

바닷가 프리웨이를 달리는 차 창 밖으로 파도가 하얀 거품을 물고 해변으로 달려왔다. 자기를 외면하는 남편과 닦달하는 시부모 그리고 머리채 잡으려는 시누이가 달려드는 듯했다. 해변을 치고 멀어져가는 물거품이 마치 도화의 쓰린 마음을 쓸어주고 위로하며 물러나는 듯했다. 친정 식구가 오면 자기편에 서서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은숙의 도움으로 시민권을 받자마자 도화는 친정 식구를 초청했다. 이민 온 어느 가정이나 겪는 일이지만 먼저 온 사람이 부모 형제 불러들여 화목하게 사는 가정이 거의 없다.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 미국으로 불러 달랠 때는 간을 빼 줄 듯이 잘하다가 막상 오면 이민 생활 자리 잡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사이가 틀어진다. 잘한 일은 자기가 잘해서 잘 됐고 안 된 일은 초청한 형제자매가 도와주지 않아서 안 됐다고 탓하며 부모 형제자매가 패가 갈라져 서로 헐뜯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오빠는 옥수수와 피클, 방울양배추 등 미니 채소 재배하는 사업을 하겠다고 자금을 도와달라고 했다. 여자 동생은 한국에서 사귀던 백수를 끌고 와서 꽃 장사를 해보겠다며 냉동 트럭 살 돈을 보태달라고 했다. 

“너 하라는 미싱질은 하지 않고 언제 시민권을 따서 친정 식구를 부른 거야. 누구 맘대로. 두고 보자 하니까 이게 못 하는 짓이 없네.”

시부모의 폭언 수위가 높아졌다. 옆집 사는 손위 시누이는 머리채를 낚아챌 기세로 툭하면 달려왔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남편은 골 아프다고 집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는 한인타운에서 네일 가게 하는 여자와 눈이 맞아 딴 살림을 차렸다. 시부모와 시누이는 상냥하고 싹싹한 내연녀 편으로 돌아섰다. 단지 도화를 내치지 못하는 것은 도화가 미싱만 밟으면 내연녀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도화도 그녀 나름대로 오래전부터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노인 아파트에 살며 나랏돈을 타 먹는 친정엄마는 툭하면 집에 왔다. 

사둔 어른이 있거나 말거나 고개만 까딱이고 공처럼 부푼 몸뚱이를 찰파닥 뉘었다. 천정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희 집에 들어서면 눈이 탁 트이는 것이 사람 사는 것 같다. 네 오빠와 동생도 빨리 돈 벌어서 이런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릴 적부터 말이 없는 도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했다가는 꼬리를 물고 기회다 싶어 쌈짓돈 끌어낼 묘안을 꺼내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 골프채가 망가졌는데. 내 몸이 성한 데가 없다. 한약이라도 한 첩 먹으면 나을까? 아이고 무릎이야. 도인이(여자 동생) 냉동차가 고장 났다는구나. 지나가(오빠 큰딸) 이혼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 한인타운에 조그만 네일 가게라도 하겠다는데. 네 오빠가 돈이 있어야지.”

등등 늘어놓으며 돈 나올 길이 없을까? 도화의 눈치를 살폈다.


남편이 도화와 더 멀어진 데는 친정 식구도 한몫했다. 미국에 와서 자기에게 힘을 실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 남편 앞에서 도화를 끌어 내리기에 급급했다. 

“도화야, 너는 미국에 온 지 꽤 됐는데 도로표지를 읽지 못해 프리웨이를 타지 못한다며. 네 동생 도인이는 오자마자 차를 몰고 프리웨이를 싱싱 달리는데. 네 꼴이 그게 뭐냐. 머리라도 제대로 빗던지. 이 서방 바람나도 할 말 없겠다.” 


은숙은 재봉질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카지노 딜러가 되겠다고 남편과 이혼하고 라스베이거스로 갔다는 소식이 돌았다. 도화의 아이들은 대학으로 떠났다. 남편은 이혼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는 뻔뻔한 태도로 네일 가게 셔터맨을 하며 두 집 살림했다. 이따금 시부모를 본다는 핑계로 와서 돈을 집어 갔다. 시누이 남편은 심장마비로 쓰러져 갑자기 죽었다. 시누이는 보험금을 타서 친구들과 쿠르즈 여행 다니느라 바빴다. 두 자식 다 부모에게 살갑게 굴지 않고 크루즈 여행 한 번 가자는 말이 없는 것에 시부모는 섭섭했다. 잔소리와 악다구니가 점점 줄어들더니 드디어는 도화 눈치를 보며 뒷방 늙은이가 됐다. 시아버지가 죽고 그 이듬해 시어머니도 죽었다. 


도화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남편은 내연녀의 네일 가게가 잘 안되는지 집에 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남편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말을 섞지 않다가 눈빛도 마주치지 않았다. 직공들을 관리하고 틈틈이 바쁠 때만 미싱에 발을 올려놨다. 일감도 많이 받지 않고 쉬는 날을 늘렸다. 그동안 틈틈이 익힌 영어 실력으로 마음이 심란할 때는 라스베이거스까지 운전해서 은숙을 만나러 갔다. 은숙과 쇼핑도 가고 외식도 하고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점점 자신만을 위한 삶을 터득했다. 


은숙은 카지노 딜러가 성격에 맞는지 인기가 좋았다. 나이 어린 애인도 생겼다. 허황한 꿈을 꾸며 애인의 사업자금을 대주는지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

“딜러가 수입이 좋다는데. 나에게 빌려 간 돈 이자는 그만두고 원금이라도 한 달에 다문 얼마라도 갚았으면…”

도화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언니 내 손님 중에 한의사가 있는데. 오래전에 부인이 죽었어. 멋쟁이야. 언니도 온몸이 성한 곳이 없지? 나도 지난주에 침을 맞았는데 시원하더라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백 대가리’라고. 언니 알아? 끝내주는 남자야. 주위에 여자가 많다지만, 소문과 달리 젊잖아. 참한 여자 만나서 재혼하고 싶데. 언니도 그렇게 혼자 외롭게 살지 말고 남자 만나요. 남편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야? 오늘 그 남자 오기로 했어. 언니 소개해 준다고 했거든. 만나 봐. 언니도 인생을 즐겨야지.” 


백 대가리가 곧 들이닥친다니! 도화는 할 말을 잃고 서둘러 그 밤에 LA로 차를 몰았다. 바람피우는데 정신이 나간 남편은 잠깐 도화와 함께 일한 은숙을 기억할 리 없다. 은숙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 워낙에 말이 없고 말솜씨가 없던 도화는 고된 시집과 친정살이로 더욱 말을 잃었다. 혀에 걸쇠를 채운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많은 가슴속 응어리는 쌓이고 문드러지고 삭혀져 무감각인 상태가 되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언니 나 골수암이래.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 급전 좀 해줄 수 있어요? 이자 쳐서 곧 갚을게요. 부탁이야.”

시댁, 친정과 남편에게 돈으로 시달리는 도화는 돈거래만은 누구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나마 자기에게 살갑게 구는 은숙이가 암 수술을 해야 한다니. 쌈짓돈을 들고 서툰 운전을 해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서 꿔줬다. 4년 전 일이다. 


은숙은 의사의 오진으로 암 수술할 필요가 없었다고도 하고 급전이 필요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은숙은 빌려 간 돈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답답한 도화가 은숙을 찾아가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예전과 다름없이 도화에게 딴소리만 종알거렸다. 도화가 간신히 입을 열어 돈 갚으라고 말하는 중, 끊고 백 대가리를 만나라니. 그도 역시 도화의 돈을 보고 접근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은숙만은 믿고 마음을 줬는데.

‘너마저도 나를 버리다니!  부모도 남편도 은숙도 그리고 백대가리도 도화의 돈에 목적이 있어 접근한 사람들이다.’

그 밤에 차를 몰고 오며 도화는 잘못 살아 온 자신의 삶을 한탄했다.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차창 밖으로 아침 해가 떴다. 하늘에 피를 토하는 듯한 해를 마주하자, 뇌에 통증이 왔다. 토하고 싶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오열했다.

‘삶은 거친 파도

삶은 거친 바람

삶은 굶주림

삶은 죽음

겨울만을 살다가는

나를 잡아줘.

날아가게 해줘.’

순간의 끝이었다. 


도화는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 가 일주일간 혼수상태에 있었다. 남편이 아들과 딸을 설득하여 산소호흡기를 떼었다.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아들이 도화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안고 울면서 걸어 나왔다. 딸아이는 통곡했다. 거의 부엌과 가라지만을 들락거렸던 도화의 좁은 삶의 동선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왔다. 몇몇은 눈물을 훔치며 진심으로 도화의 죽음을 슬퍼했다. 도화 남편 옆에 내연녀가 알 수 없는 야릇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서 있었다. 도화와 이혼하고 재혼한 부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부부 같다. 도화의 집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려는 준비된 자세로 도화 남편을 살갑게 쳐다보며 챙긴다. 그 뒤로 시누이 친구들인지 한무대기가 각자 무대에 올려진 주인공처럼 붉은 입술로 마구 떠들었다. 


사람들은 오른쪽 통로에서 한 사람씩 도화가 누워 있는 관으로 걸어가서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잠깐 서 있다가 왼쪽 통로로 돌아 나왔다. 노랑머리에 금색 벨트로 허리를 졸라맨 검은 드레스를 입은 은숙이 도화의 관 앞에 섰다. 커다란 검은 진주를 낀 손가락으로 관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도화를 깨우는 것처럼 뭐라고 중얼거렸다. 더는 진절머리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표정으로 누워있는 도화를 한참 이리저리 살피며 들여다봤다. 은숙은 고개를 숙이고 왼쪽 통로로 걸어 나와 조용히 장례식장을 떠났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샤넬 백이 햇빛을 받아 유난히도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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