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좁은 엘리베이터를 채우던 중국 아주머니들의 요란한 수다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맨해튼 그랜드 스트리트(Grand Street)의 7층 건물 중 2층, 그곳이 나의 첫 뉴욕 거처였다. 위층 의류 공장으로 올라가는 이웃들의 목소리는 엘리베이터가 상승할수록 물속에 잠기듯 아스라해졌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려 하면, 이번에는 창밖 길 건너에서 마주 보고 소리치며 안부를 묻는 우렁찬 외침이 그랜드 스트리트를 흔들었다. 저녁이면 폭풍처럼 건물 안을 채우던 중국 아주머니들의 활기찬 소란을 따라, 나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차이나타운의 붉은 불빛 속으로 섞여 들어가곤 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없던 우리는 천장이 높은 낡은 스튜디오를 남편의 룸메이트와 나눠 썼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다락방 침실이 나왔다. 침실 구석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남기고 간 드럼과 타악기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악기 더미 곁에 누워 있노라면, 마치 떠돌이 유랑 극단 단원이 고된 순회공연을 마치고 천막 구석에 몸을 뉘어 쉬는 듯한 쓸쓸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드디어 잡았어!” 어느 날, 남편이 흙먼지 묻은 빗자루를 들고 흥분해 들어왔다. 브로드웨이와 케널 스트리트 코너, 눈이 휘둥그런 그리스계 주인이 운영하는 도넛숍 앞 길모퉁이에 좌판을 벌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작업용 나무 박스에 고무바퀴를 달고 캔버스 천을 덮어 그럴듯한 손수레를 만들었다. 이른 아침, 안개를 헤치고 몇 블록 떨어진 도넛숍 앞에 섰을 때, 곁에서 노점을 하던 우리 또래 한인 부부의 긴장 어린 눈빛이 남편의 브라질 자수 블라우스를 보더니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나는 브루클린의 옷가게 파트타임 일을 가기 위해 서둘러 지하철 R트레인 안으로 사라졌다.
“Check it out! Check it out!” 남편의 우렁찬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면 중국 아주머니들과 관광객들이 좌판 앞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잘 팔리는 물건이 떨어지면 남편은 늘 곁을 맴돌던 안경 쓴 홈리스에게 심부름값을 쥐여주며 몇 블록 밖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떼어 오게 했다. 심부름값을 받은 그는 신이 나 리커스토어로 달려갔다. 남편은 체면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길 건너 유명 미술재료상인 ‘펄 페인트(Pearl Paint)’를 들르던 동료 화가들이 미안해하며 눈길을 피하든 말든, 남편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 세우곤 했다.
우리의 집주인은 어둡고 침침한 지하실에서 콩나물을 길러 파는 노신사였다. 한 달에 한 번, 월세를 내러 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면 그는 젖은 고무장화를 쿵쾅거리며 다가와 돈을 받고는, 늘 인심 좋게 콩나물을 서너 줌씩 싸주었다. 월세를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단 한 푼도 없었기에, 우리는 그가 준 콩나물로 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무침을 만들며 끼니를 버텼다.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붓을 놓지 않았다.
치솟는 뉴욕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우리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더 변두리의 값싼 거처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엘리베이터를 가득 메우던 중국 아주머니들의 수다 소리, 가난한 이웃들이 서로의 어깨를 마주치며 만들어내던 삶의 온기는 내 기억 속에서 단 한 번도 차이나타운을 떠난 적이 없다. 예술가가 되는 법은 학교나 세련된 갤러리가 아닌, 치열하고도 따스했던 그 길모퉁이에서 가장 먼저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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