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와 에이든은 맨해튼 42가와 3 에비뉴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에이든이 빈 택시를 향해 팔을 들었다. 택시가 길 건너 빨간 신호등에 멈췄다. 마야는 깜박거리는 적색 신호등을 보는 순간 전 남친을 처음 만난 날, 그와 노랑 택시에 오르자마자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오늘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만나요.”
마야가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에이든은 택시를 잡으려고 들었던 팔을 내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화번호를 줄래요?”
마야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칠흑 같은 어두운 차가운 방 안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야기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에이든의 다정한 푸른 눈과 마주치자,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가 저절로 쏟아져 나왔다. 평소 행동과 무척 달랐다.
“우리 나갈까요. 조용한 곳에 가서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근처 바에 가서 한 잔 더 하지요?”
마야가 말하자 에이든이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내 아파트에 가서 한잔하면 어떨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났다. 몸이 뜨거워졌다. 실링팬을 틀었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실링팬을 한동안 쳐다봤다. 쫓아갈걸 그랬나? 실링팬이 반대로 도는 듯 가슴이 출렁이고 혼란스러웠다.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남자다. 그와 주말을 함께 보내며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 상상하다가 예전 엑스 남편과 남친들이 떠올랐다. 에이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부류일지도 몰라.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마야는 오늘 저녁, 친구 아이린이 다니는 회사 파티에 참석했었다. 모던미를 가미한 차이니즈 전통 의상은 드러난 그녀의 어깨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붉은 와인잔을 든 그녀의 브라운 피부와 검은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친구 아이린에게 에이든을 소개받았다. 소개받기 전부터 마야를 눈여겨보던 에이든은 한쪽으로 내려진 블론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마야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둘은 이미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로부터 이틀 후 화창한 일요일,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맨해튼 콜럼버스 에비뉴와 83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앳된 아시안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마야가 먼저 주문한 뒤 에이든이 나즈막한 소리로 위이트레스에게 뭐라고 한동안 중얼거렸다. 건너편에 앉은 마야 귀에는 음악 소리에 섞인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에이든은 확인하듯 웨이트리스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고개를 돌려 마야를 푸른 눈으로 지긋이 쳐다봤다. 마야는 카리브해 바닷속으로 끌려가는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저 웨이트리스 알아요?”
“아니요.”
“그러면 꽤 특별한 것을 주문했나 봐요?“
“피넛 버터 알레르기가 있어요. 병원에 일곱 번 실려 갔어요.”
“와! 그렇군요. 밖에서 밥 먹는 게 예삿일이 아니겠군요.”
“최근에는 식당에서 디저트를 먹고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요. 오늘도 급히 나오느라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아무래도 식당 음식이 불안해서 거의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만들어 먹어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마야는 뉴욕에서 공부하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음식 알레르기 손님들 주문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매니저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들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에이든 접시의 감자튀김이 먹음직스럽다. 배가 꽤 고팠는지, 집밥만 먹다가 외식을 해서 맛있는지 말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마야의 음식은 반이나 남았는데 그의 접시 바닥은 이미 드러났다. 그는 접시를 밀어내고 입을 닦았다. 마야도 밥맛을 잃고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에이든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웨이트리스가 빌을 가져왔다. 위험한 손님은 빨리 내보내고 싶다는 표정으로 가지 않고 서 있었다. 마야가 빌을 받아 들고 잠시 난감해하다가 그냥 계산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이미 지불한 것을 알고 다음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마야는 첫 데이트부터 기분이 언짢았지만, 미소로 답했다.
식당을 나왔다. 하늘이 유난히도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다. 옆에서 걷는 에이든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마야의 언짢은 기분이 덧없이 떠가는 구름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렸다. 마야는 에이든과 함께 더 있고 싶었다.
“늦가을 날씨치곤 따뜻하네요. 한잔할까요? 어디 좋은 데 없어요?”
식당에서 두 블록 떨어진 술집에 들어가 스탠드바에 앉았다. 마야는 레드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와잇 와인을 주문했다. 에이든은 급히 들이켜며 이 여자는 나에게 관심이 꽤 있다. 어떻게 내 아파트로 데려갈까? 오늘 쉽게 잠자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상시 여자를 꾈 때, 짧으면 4시간, 길면 세 번째 만남에서는 잘 수 있었다. 한번 잠자리를 하면 여자들은 다루기가 쉽다. 혹시 이 여자는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엔 괜찮긴 하지만, 결혼을 위한 만남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 4명의 아이를 가난 속에서 키우며 지친 엄마가 아버지에게
“내가 미쳤지. 저런 능력 없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소리 지르던 미시시피 낡아빠진 시골집이 떠올랐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다.
에이든은 말없이 급한 볼일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태도로 와인을 들이켜고 또 주문했다. 마야는 이 남자 왜 이리 술을 빨리 들이켜지? 당연히 술값은 지불하겠지? 마야의 컵엔 아직도 반이 남았는데 그는 3잔째를 주문했다.
“괜찮아요”
그는 음악을 듣는지 미소로 괜찮다고 응답했다. 마야는 David Bowie - Ziggy Stardust 노래에 심취한 듯한 에이든의 옆얼굴에 자신의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가슴을 긁는 듯한 가수의 목소리 또한 매력적이다. 도대체 에이든은 어떤 남자일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바람둥이? 아버지는 길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스캔하다가 괜찮다 싶으면 말 걸어 바람피웠다. 일본인 엄마와 케냐인 아버지는 한눈에 반해 결혼했다는데 왜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엄마와 싸우다 집을 나갔을까? 뭐 내 신세나 엄마 신세나 다를 게 없지만.
3잔을 다 비운 에이든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났다. 청색 티셔츠 깃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가 찰랑인다. 올라간 히프와 상 하체의 비율이 예술이다. 마야는 그의 뒷모습이 첫사랑 뒷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과거 남자들을 떠올렸다. 첫 남자를 대학 때 만나 6년 사귀다 친구에게 뺏겼다. 첫사랑 결혼 소식을 듣고 홧김에 따라다니던 남자와 결혼했다. 4년 동안 딩크족으로 잘살다가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일만 하며 조용히 보내다가 친구 소개로 만난 남자와 신중히 연애하던 중 또 배반당했다. 지금은 일 중독자로 승진하여 투자 금액이 많이 쌓였다. 홧김에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서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너 번 당하고서도 여전히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니! 배반의 아픔으로 보낸 긴 세월이 후회스럽다. 혼자 지내는 삶이 무료하고 지루해 견딜 수가 없다. 우울증약만 끼고 살다 죽는 것은 아닐까?
음악이 끝나고 다음 음악이 끝나가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야가 멋쩍어서 바텐더를 쳐다보자 빌을 내밀었다. 마야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화장실 쪽을 화난 얼굴로 쳐다보다가 옆에 놓인 빌을 슬쩍 들여다봤다. $12이다. 한 잔 가격이다. 그가 자기 것은 지불했나? 생각하다가 바텐더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기 몫이니까 그냥 지불했다. 에이든이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돌아와 둘은 밖으로 나왔다. 빨리 찾아온 늦가을 밤이 음울하고 싸늘하다. 마야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아까 마신 술값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어요. 꽤 싸고 좋은 술집이에요.”
그는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지 길 건너로 시선을 돌리고 말이 없다. 마야의 머릿속이 깜빡이는 네온사인처럼 온갖 색깔로 혼잡스럽다. 에이든이 자기 것만을 미리 지불한 것인지?. 아니면 바 직원이 혼자 마신 것으로 계산하고 그의 것은 까먹은 것인지? 해결되지 않은 무거운 머리는 저절로 숙여지고 입도 꾹 다물어졌다.
“내 아파트가 여기서 가까운데, 함께 가서 한 잔 더 해요.”
에이든이 마야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술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
마야가 조금 냉정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내가 음식을 만들어 초대할게요.”
마야는 뭔가 풀어야 할 숙제를 껴안은 채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에이든은 아파트 층계를 오르며 이 여자는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리 쉬운 여자는 아니야. 술이 들어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가 아무래도 결혼 상대를 찾는 것 같아. 결혼해서 아버지와 엄마처럼 허구한 날 돈에 쪼들리며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질색이다. 싱글로 자유롭게 많은 여자와 즐기고 싶다. 데이트한다고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는 것도 귀찮다. 정을 나누고 사랑 타령하며 매달리는 만남도 지겹다. 그냥 몸매 괜찮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자와 밤을 보낼 수 있는 FWB(friends with benefits)관계라면 좋겠는데.
에이든은 일주일 후 토요일 아침에 마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든이 덧붙였다.
“네가 그날 입은 옷이 멋져. 너의 브라운 피부와 블랙 드레스가 잘 어울려. 섹시해. 나는 너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있는데. 너는 어때? 내가 요리해서 널 초대하고 싶은데. 내 아파트에 올래.”
에이든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열린 마야는 이상하지, 멀쩡한 직장에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쪼잔할까? 앞으로 그와 사귀려면 그를 방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가 사는 것을 보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에이든이 요리하는 동안 마야는 와인을 마시며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혼자 살아?”
“예전에는 남동생과 살았는데 브루클린으로 이사 갔어.”
“난 한번 이혼했는데 너는?
“아니, 아직 적합한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직장 다니며 돈 모아 이 아파트를 사고 모기지도 다 끝냈어. 그러느라고 괜찮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고.”
“너 좋은 직장에 아파트도 소유했겠다. 인물도 그만하면 여자가 많을 텐데.”
“나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에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야. 잘못된 여자와 엮여 결혼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여자 친구는?”
“거의 3년 동안 사귀지 않았어.”
요리가 취미라는 에이든의 말대로 마야가 들고 간 와잇 와인과 그가 만든 안초비 파스타는 꽤 맛이 있었다. 상을 물리고 둘은 카우치에 앉았다. 에이든은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를 틀었다. 긴장한 마야의 몸을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가 카우치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에이든이 마야 가까이 다가앉았다.
“너도 나처럼 컴퓨터에 매달려 일하느라 목덜미가 뻣뻣하네. 내가 마사지 해줄게.”
에이든은 마야의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카락이 꽤 부드럽네. 나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좋아해.”
마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키스하려고 했다. 마야도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 입을 맞추려다가 멈췄다. 그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에이든의 시선이 마야의 다리로 옮겨 갔다.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손이 점점 치마를 들추고 위로 올라왔다. 마야는 몸이 달아올랐다. 그냥 그에게 몸을 맡길까?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 할까? 갈등이 충돌하다가 과거 남자들도 같은 수법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마야가 뒤로 몸을 빼다가 카우치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가 잡아주려고 하는 것을 밀어내고 몸을 곧추 세우고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물었다.
“그동안 많은 여자를 사겼겠네. 어떤 여자들이야?”
에이든도 떨어져 앉으며 더는 마야를 터치하지 않았다. 사귄 여자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마야는 에이든이 플레이보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내일 엄마가 캘리포니아에서 오기 때문에, 집에 일찍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야 해.”
일주일 후 금요일 4시쯤에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집에서 한잔하지 않을래?”
또 집으로 오라는 그의 말을 듣자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야가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저녁 먹고 지난번 그 술집에서 만나자. 싸고 좋던데.”
에이든은 창문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마야가 길 건너오는 것을 지켜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 수틀에 올라앉았다. 화장실 쪽으로 나이 많은 여윈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삶에 지친 슬픈 눈이다. 천장에 매달린 둥근 등 가느다란 불빛이 그의 광대뼈를 돋보이며 고독감을 더욱 드러냈다. 마야는 에이든을 잡지 못하면 저 노인처럼 한 잔의 술을 놓고 시간을 보내겠지? 그때 에이든의 손이 마야의 무릎을 더듬었다. 마야는 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맥주를 시켰다. 먼저 날과는 다르게 천천히 한 잔만 들이킨 후 마야의 잔이 비자 에이든이 나가자고 했다. 바텐더가 빌을 가져왔다. 에이든은 돈 낼 생각을 하지 않고 한동안 빌을 들여다봤다. 마야가 자기 몫인 10불짜리를 테이블 위에 놓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따라 나와 함께 걸었다. 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마야에게 묻지 않고 자기 아파트 방향으로 걸었다. 마야는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걸었다. 그의 아파트로 가는 골목에서 그가 마야를 빤히 쳐다봤다. 마야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섬광처럼 마야의 눈과 마주쳤다. 재빨리 돌아선 마야는 다시 뒤 돌아 그를 봤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라졌다. 그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는 순간 무서운 광경을 본 것처럼 몸이 오싹했다.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넣고 찻길을 건너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 후 3주 동안 에이든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마야는 연락하고 싶었지만, 예전의 불행을 반복할 것 같은 직감이 그녀의 충동을 억눌렀다.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 금요일에 에이든이 문메시지 했다.
“우리 집으로 올래?”
“그러지 말고 이따 저녁 먹고 공원으로 나와. 운동도 할 겸 걷자.”
에이든은 공원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 가는 몸매의 매력적인 39세, 명문 비즈니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할 정도면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잠자리할 수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야가 미리 와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에이든이 엄숙한 표정으로 5분 늦게 나타나 옆에 앉았다. 마야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에이든이 그동안 사귄 여자들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전에 사귄 여자는 자기가 부르면 택시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달려와 자고 갔다는 둥,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6개월 동안 잠자리만 한 여자가 있다는 둥, 와잇, 블랙 그리고 아시안 등등 다 사궈봤다는 둥, 여자들에게 자기가 먼저 자자고 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마야는 이 남자가 왜 과거 여자들이 매달렸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자기에게도 그 예전 여자처럼 하라는 건가? 생각하는데 녹색 야광 목걸이를 한 골든두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하이’ 하고 쓰다듬자, 강아지가 빨리 집에 가서 자라는 시늉인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주인에게 달려갔다.
“벌써 10시네. 집에 갈 시간이다.”
그 후 에이든은 마야의 무반응에 애가 타는지 문자메시지를 자주 했다. 마야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에이든과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이 섹스에 관한 것이다. 마야도 한번 결혼 했고 성인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맞춰주다 보면 수위 높아졌다. 노골적으로 수위가 더 높아지면 마야는 어느 타임에 다른 화제로 돌릴까, 고민하다 돌려놓으면 또 그 자리로 유도하는 섹스 이야기에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대답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 멈추었다가 분위기가 나아지면 다시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두고 문자메시지만 하며 에이든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도 더는 자기 아파트로 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 꾸준히 문자메시지만 보냈다.
직장 다니고 돈만 모으며 외롭게 혼자 산 세월이 꽤 되는 마야는 왠지 에이든을 내치기에는 아까운 느낌이랄까? 너무 외로워서 남자에게 기대고 싶은 심리랄까? 더는 남자에게 차이지 않고 진지한 만남으로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직감이 느껴지면서도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의 약함이 싫었다.
친구 아이린에게 전화했다.
“에이든이란 사람 서너 번 만났는데 어떤 사람이야? 통 감이 오지 않아서 내가 한동안 남자를 만나지 않고 지냈더니 심리를 잘 모르겠어.”
“일하는 부서가 달라서 잘 모르지만, 아마 예전에 그가 일하는 옆 부서에 있던 차이니스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여자 잘 아는 사이야?”
몇 번 인사는 나눈 적은 있어. 그 소문이 난 얼마 후 그 여자는 다른 직장으로 옮겼어. 직장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 여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알아볼게.”
며칠 후 아이린에게 연락이 왔다.
“글쎄 에이든이 그 차이니스 동료를 12년에 전에 회사 회식에서 만나 그냥저냥 직장 동료로 지내다 5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귀었데.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잠자리만 하다가 헤어졌다네. 그 여자가 사랑 타령하며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를 서너 번 반복하자 그녀도 지쳐서 직장도 옮기고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났데. 그 여자 말로는 자기와 사귀면서도 에이든이 주말에는 여자 쇼핑을 다니고 몸매가 그럴싸한 여자만 보면 유혹해서 잠자리했다는구나. 자기와 사귀기 전에도 마켓에서 일하는 흑인 여자와도. 미국에 출장 온 일본 여자, 방문 중인 아시안 여자 등등 접근해서는.”
“아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때문에 여자들과 밖에서 만나 식사하는 것을 꺼려서일지도 몰라. 여러 번 위험한 상황으로 죽을 뻔했다던데.”
“아 그렇지 않아도 그 피넛 버터 이야기도 그녀가 했는데. 식당에서 밥 먹기가 위험하다. 여행도 꺼려진다 등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라는 거야. 밖에서 데이트하며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 않아 만들어 낸 구실이라는 거지. 아파트로 늦은 밤에 불러 잠자리만 하고 이른 아침에 헤어지는 수법을 쓴다는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취약한 여자들 흑인 아시안 등을 헌팅해서는 유혹하는, 결국엔 여자들의 몸만을 노린다는 거지.”
“어머머! 미친놈. 직장과 돈이 없다면 모를까? 그것도 이혼한 여자나 취약한 외국에서 갓 온 아시안이나 블랙만을 상대하며 등쳐먹으려 하다니. 그렇게 살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온다고. 아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발상은 또 뭐야.”
“그거야 외국에서 온 여자들이 혹시나 영주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약점을 겨냥하며 데이트 비용 안 쓰고 잠자리만 하려는 속셈이지. 나름대로 잔머리 굴려 만들어 낸 수작이겠지.”
“세상에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아니 왜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하며 살고 싶을까?”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그 또라이들의 깊은 어두운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니.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아이린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야는 미친놈.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치사한 놈. 되뇌면서도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다. 문자메시지 소리가 울릴 때마다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다 심장에서 막힌 듯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확인하곤 했다.
“Hi,”
에이든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손이 떨리고 열이 났다.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또 왔다.
“Are you ok?”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는 꽉 움켜쥔 손에 든 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Are You ok? 다음에 뭔가 더 쓰여있지 않나를 확인하듯 서너 번을 읽은 후 문자메시지를 지웠다. 마야는 손톱을 잡아 뜯다가 빨간 매니큐어를 꺼내 들었다. 러그에 앉아 발톱에 조심스럽게 칠했다. 손이 떨려 붉은색이 발톱 주위로 번졌다. 그 위에 덧칠했다. 더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