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22, 2024

붉은 신호등, 붉은 와인, 붉은 매니큐어


마야와 에이든은 맨해튼 42가와 3 에비뉴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에이든이 빈 택시를 향해 팔을 들었다. 택시가 길 건너 빨간 신호등에 멈췄다. 마야는 깜박거리는 적색 신호등을 보는 순간 전 남친을 처음 만난 날, 그와 노랑 택시에 오르자마자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오늘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만나요.”

마야가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에이든은 택시를 잡으려고 들었던 팔을 내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화번호를 줄래요?”


마야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칠흑 같은 어두운 차가운 방 안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야기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에이든의 다정한 푸른 눈과 마주치자,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가 저절로 쏟아져 나왔다. 평소 행동과 무척 달랐다.

“우리 나갈까요. 조용한 곳에 가서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근처 바에 가서 한 잔 더 하지요?” 

마야가 말하자 에이든이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내 아파트에 가서 한잔하면 어떨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났다. 몸이 뜨거워졌다. 실링팬을 틀었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실링팬을 한동안 쳐다봤다. 쫓아갈걸 그랬나? 실링팬이 반대로 도는 듯 가슴이 출렁이고 혼란스러웠다.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남자다. 그와 주말을 함께 보내며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 상상하다가 예전 엑스 남편과 남친들이 떠올랐다. 에이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부류일지도 몰라.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마야는 오늘 저녁, 친구 아이린이 다니는 회사 파티에 참석했었다. 모던미를 가미한 차이니즈 전통 의상은 드러난 그녀의 어깨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붉은 와인잔을 든 그녀의 브라운 피부와 검은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친구 아이린에게 에이든을 소개받았다. 소개받기 전부터 마야를 눈여겨보던 에이든은 한쪽으로 내려진 블론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마야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둘은 이미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로부터 이틀 후 화창한 일요일,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맨해튼 콜럼버스 에비뉴와 83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앳된 아시안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마야가 먼저 주문한 뒤 에이든이 나즈막한 소리로 위이트레스에게 뭐라고 한동안 중얼거렸다. 건너편에 앉은 마야 귀에는 음악 소리에 섞인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에이든은 확인하듯 웨이트리스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고개를 돌려 마야를 푸른 눈으로 지긋이 쳐다봤다. 마야는 카리브해 바닷속으로 끌려가는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저 웨이트리스 알아요?”

“아니요.”

“그러면 꽤 특별한 것을 주문했나 봐요?“

“피넛 버터 알레르기가 있어요. 병원에 일곱 번 실려 갔어요.”

“와! 그렇군요. 밖에서 밥 먹는 게 예삿일이 아니겠군요.”

“최근에는 식당에서 디저트를 먹고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요. 오늘도 급히 나오느라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아무래도 식당 음식이 불안해서 거의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만들어 먹어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마야는 뉴욕에서 공부하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음식 알레르기 손님들 주문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매니저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들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에이든 접시의 감자튀김이 먹음직스럽다. 배가 꽤 고팠는지, 집밥만 먹다가 외식을 해서 맛있는지 말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마야의 음식은 반이나 남았는데 그의 접시 바닥은 이미 드러났다. 그는 접시를 밀어내고 입을 닦았다. 마야도 밥맛을 잃고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에이든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웨이트리스가 빌을 가져왔다. 위험한 손님은 빨리 내보내고 싶다는 표정으로 가지 않고 서 있었다. 마야가 빌을 받아 들고 잠시 난감해하다가 그냥 계산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이미 지불한 것을 알고 다음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마야는 첫 데이트부터 기분이 언짢았지만, 미소로 답했다.


식당을 나왔다. 하늘이 유난히도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다. 옆에서 걷는 에이든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마야의 언짢은 기분이 덧없이 떠가는 구름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렸다. 마야는 에이든과 함께 더 있고 싶었다. 

“늦가을 날씨치곤 따뜻하네요. 한잔할까요? 어디 좋은 데 없어요?”

식당에서 두 블록 떨어진 술집에 들어가 스탠드바에 앉았다. 마야는 레드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와잇 와인을 주문했다. 에이든은 급히 들이켜며 이 여자는 나에게 관심이 꽤 있다. 어떻게 내 아파트로 데려갈까? 오늘 쉽게 잠자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상시 여자를 꾈 때, 짧으면 4시간, 길면 세 번째 만남에서는 잘 수 있었다. 한번 잠자리를 하면 여자들은 다루기가 쉽다. 혹시 이 여자는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엔 괜찮긴 하지만, 결혼을 위한 만남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 4명의 아이를 가난 속에서 키우며 지친 엄마가 아버지에게 

“내가 미쳤지. 저런 능력 없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소리 지르던 미시시피 낡아빠진 시골집이 떠올랐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다.  


에이든은 말없이 급한 볼일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태도로 와인을 들이켜고 또 주문했다. 마야는 이 남자 왜 이리 술을 빨리 들이켜지? 당연히 술값은 지불하겠지? 마야의 컵엔 아직도 반이 남았는데 그는 3잔째를 주문했다. 

“괜찮아요”

그는 음악을 듣는지 미소로 괜찮다고 응답했다. 마야는 David Bowie - Ziggy Stardust 노래에 심취한 듯한 에이든의 옆얼굴에 자신의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가슴을 긁는 듯한 가수의 목소리 또한 매력적이다. 도대체 에이든은 어떤 남자일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바람둥이? 아버지는 길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스캔하다가 괜찮다 싶으면 말 걸어 바람피웠다. 일본인 엄마와 케냐인 아버지는 한눈에 반해 결혼했다는데 왜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엄마와 싸우다 집을 나갔을까? 뭐 내 신세나 엄마 신세나 다를 게 없지만.


3잔을 다 비운 에이든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났다. 청색 티셔츠 깃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가 찰랑인다. 올라간 히프와 상 하체의 비율이 예술이다. 마야는 그의 뒷모습이 첫사랑 뒷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과거 남자들을 떠올렸다. 첫 남자를 대학 때 만나 6년 사귀다 친구에게 뺏겼다. 첫사랑 결혼 소식을 듣고 홧김에 따라다니던 남자와 결혼했다. 4년 동안 딩크족으로 잘살다가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일만 하며 조용히 보내다가 친구 소개로 만난 남자와 신중히 연애하던 중 또 배반당했다. 지금은 일 중독자로 승진하여 투자 금액이 많이 쌓였다. 홧김에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서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너 번 당하고서도 여전히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니! 배반의 아픔으로 보낸 긴 세월이 후회스럽다. 혼자 지내는 삶이 무료하고 지루해 견딜 수가 없다. 우울증약만 끼고 살다 죽는 것은 아닐까?


음악이 끝나고 다음 음악이 끝나가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야가 멋쩍어서 바텐더를 쳐다보자 빌을 내밀었다. 마야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화장실 쪽을 화난 얼굴로 쳐다보다가 옆에 놓인 빌을 슬쩍 들여다봤다. $12이다. 한 잔 가격이다. 그가 자기 것은 지불했나? 생각하다가 바텐더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기 몫이니까 그냥 지불했다. 에이든이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돌아와 둘은 밖으로 나왔다. 빨리 찾아온 늦가을 밤이 음울하고 싸늘하다. 마야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아까 마신 술값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어요. 꽤 싸고 좋은 술집이에요.”

그는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지 길 건너로 시선을 돌리고 말이 없다. 마야의 머릿속이 깜빡이는 네온사인처럼 온갖 색깔로 혼잡스럽다. 에이든이 자기 것만을 미리 지불한 것인지?. 아니면 바 직원이 혼자 마신 것으로 계산하고 그의 것은 까먹은 것인지? 해결되지 않은 무거운 머리는 저절로 숙여지고 입도 꾹 다물어졌다. 


“내 아파트가 여기서 가까운데, 함께 가서 한 잔 더 해요.”

에이든이 마야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술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

마야가 조금 냉정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내가 음식을 만들어 초대할게요.” 

마야는 뭔가 풀어야 할 숙제를 껴안은 채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에이든은 아파트 층계를 오르며 이 여자는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리 쉬운 여자는 아니야. 술이 들어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가 아무래도 결혼 상대를 찾는 것 같아. 결혼해서 아버지와 엄마처럼 허구한 날 돈에 쪼들리며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질색이다. 싱글로 자유롭게 많은 여자와 즐기고 싶다. 데이트한다고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는 것도 귀찮다. 정을 나누고 사랑 타령하며 매달리는 만남도 지겹다. 그냥 몸매 괜찮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자와 밤을 보낼 수 있는 FWB(friends with benefits)관계라면 좋겠는데.


에이든은 일주일 후 토요일 아침에 마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든이 덧붙였다.

“네가 그날 입은 옷이 멋져. 너의 브라운 피부와 블랙 드레스가 잘 어울려. 섹시해. 나는 너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있는데. 너는 어때? 내가 요리해서 널 초대하고 싶은데. 내 아파트에 올래.” 

에이든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열린 마야는 이상하지, 멀쩡한 직장에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쪼잔할까? 앞으로 그와 사귀려면 그를 방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가 사는 것을 보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에이든이 요리하는 동안 마야는 와인을 마시며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혼자 살아?”

“예전에는 남동생과 살았는데 브루클린으로 이사 갔어.”

“난 한번 이혼했는데 너는?

“아니, 아직 적합한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직장 다니며 돈 모아 이 아파트를 사고 모기지도 다 끝냈어. 그러느라고 괜찮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고.”

“너 좋은 직장에 아파트도 소유했겠다. 인물도 그만하면 여자가 많을 텐데.”

“나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에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야. 잘못된 여자와 엮여 결혼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여자 친구는?”

“거의 3년 동안 사귀지 않았어.”


요리가 취미라는 에이든의 말대로 마야가 들고 간 와잇 와인과 그가 만든 안초비 파스타는 꽤 맛이 있었다. 상을 물리고 둘은 카우치에 앉았다. 에이든은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를 틀었다. 긴장한 마야의 몸을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가 카우치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에이든이 마야 가까이 다가앉았다. 

“너도 나처럼 컴퓨터에 매달려 일하느라 목덜미가 뻣뻣하네. 내가 마사지 해줄게.” 

에이든은 마야의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카락이 꽤 부드럽네. 나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좋아해.”

마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키스하려고 했다. 마야도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 입을 맞추려다가 멈췄다. 그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에이든의 시선이 마야의 다리로 옮겨 갔다.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손이 점점 치마를 들추고 위로 올라왔다. 마야는 몸이 달아올랐다. 그냥 그에게 몸을 맡길까?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 할까? 갈등이 충돌하다가 과거 남자들도 같은 수법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마야가 뒤로 몸을 빼다가 카우치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가 잡아주려고 하는 것을 밀어내고 몸을 곧추 세우고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물었다.

“그동안 많은 여자를 사겼겠네. 어떤 여자들이야?” 

에이든도 떨어져 앉으며 더는 마야를 터치하지 않았다. 사귄 여자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마야는 에이든이 플레이보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내일 엄마가 캘리포니아에서 오기 때문에, 집에 일찍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야 해.”


일주일 후 금요일 4시쯤에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집에서 한잔하지 않을래?”

또 집으로 오라는 그의 말을 듣자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야가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저녁 먹고 지난번 그 술집에서 만나자. 싸고 좋던데.”

에이든은 창문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마야가 길 건너오는 것을 지켜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 수틀에 올라앉았다. 화장실 쪽으로 나이 많은 여윈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삶에 지친 슬픈 눈이다. 천장에 매달린 둥근 등 가느다란 불빛이 그의 광대뼈를 돋보이며 고독감을 더욱 드러냈다. 마야는 에이든을 잡지 못하면 저 노인처럼 한 잔의 술을 놓고 시간을 보내겠지? 그때 에이든의 손이 마야의 무릎을 더듬었다. 마야는 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맥주를 시켰다. 먼저 날과는 다르게 천천히 한 잔만 들이킨 후 마야의 잔이 비자 에이든이 나가자고 했다. 바텐더가 빌을 가져왔다. 에이든은 돈 낼 생각을 하지 않고 한동안 빌을 들여다봤다. 마야가 자기 몫인 10불짜리를 테이블 위에 놓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따라 나와 함께 걸었다. 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마야에게 묻지 않고 자기 아파트 방향으로 걸었다. 마야는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걸었다. 그의 아파트로 가는 골목에서 그가 마야를 빤히 쳐다봤다. 마야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섬광처럼 마야의 눈과 마주쳤다.  재빨리 돌아선 마야는 다시 뒤 돌아 그를 봤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라졌다. 그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는 순간 무서운 광경을 본 것처럼 몸이 오싹했다.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넣고 찻길을 건너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 후 3주 동안 에이든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마야는 연락하고 싶었지만, 예전의 불행을 반복할 것 같은 직감이 그녀의 충동을 억눌렀다.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 금요일에 에이든이 문메시지 했다. 

“우리 집으로 올래?” 

“그러지 말고 이따 저녁 먹고 공원으로 나와. 운동도 할 겸 걷자.”

에이든은 공원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 가는 몸매의 매력적인 39세, 명문 비즈니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할 정도면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잠자리할 수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야가 미리 와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에이든이 엄숙한 표정으로 5분 늦게 나타나 옆에 앉았다. 마야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에이든이 그동안 사귄 여자들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전에 사귄 여자는 자기가 부르면 택시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달려와 자고 갔다는 둥,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6개월 동안 잠자리만 한 여자가 있다는 둥, 와잇, 블랙 그리고 아시안 등등 다 사궈봤다는 둥, 여자들에게 자기가 먼저 자자고 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마야는 이 남자가 왜 과거 여자들이 매달렸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자기에게도 그 예전 여자처럼 하라는 건가? 생각하는데 녹색 야광 목걸이를 한 골든두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하이’ 하고 쓰다듬자, 강아지가 빨리 집에 가서 자라는 시늉인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주인에게 달려갔다.  

“벌써 10시네. 집에 갈 시간이다.” 


그 후 에이든은 마야의 무반응에 애가 타는지 문자메시지를 자주 했다. 마야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에이든과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이 섹스에 관한 것이다. 마야도 한번 결혼 했고 성인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맞춰주다 보면 수위 높아졌다. 노골적으로 수위가 더 높아지면 마야는 어느 타임에 다른 화제로 돌릴까, 고민하다 돌려놓으면 또 그 자리로 유도하는 섹스 이야기에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대답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 멈추었다가 분위기가 나아지면 다시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두고 문자메시지만 하며 에이든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도 더는 자기 아파트로 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 꾸준히 문자메시지만 보냈다. 


직장 다니고 돈만 모으며 외롭게 혼자 산 세월이 꽤 되는 마야는 왠지 에이든을 내치기에는 아까운 느낌이랄까? 너무 외로워서 남자에게 기대고 싶은 심리랄까? 더는 남자에게 차이지 않고 진지한 만남으로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직감이 느껴지면서도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의 약함이 싫었다.


친구 아이린에게 전화했다. 

“에이든이란 사람 서너 번 만났는데 어떤 사람이야? 통 감이 오지 않아서 내가 한동안 남자를 만나지 않고 지냈더니 심리를 잘 모르겠어.”

“일하는 부서가 달라서 잘 모르지만, 아마 예전에 그가 일하는 옆 부서에 있던 차이니스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여자 잘 아는 사이야?”

몇 번 인사는 나눈 적은 있어. 그 소문이 난 얼마 후 그 여자는 다른 직장으로 옮겼어. 직장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 여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알아볼게.” 


며칠 후 아이린에게 연락이 왔다. 

“글쎄 에이든이 그 차이니스 동료를 12년에 전에 회사 회식에서 만나 그냥저냥 직장 동료로 지내다 5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귀었데.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잠자리만 하다가 헤어졌다네. 그 여자가 사랑 타령하며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를 서너 번 반복하자 그녀도 지쳐서 직장도 옮기고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났데. 그 여자 말로는 자기와 사귀면서도 에이든이 주말에는 여자 쇼핑을 다니고 몸매가 그럴싸한 여자만 보면 유혹해서 잠자리했다는구나. 자기와 사귀기 전에도 마켓에서 일하는 흑인 여자와도. 미국에 출장 온 일본 여자, 방문 중인 아시안 여자 등등 접근해서는.”

“아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때문에 여자들과 밖에서 만나 식사하는 것을 꺼려서일지도 몰라. 여러 번 위험한 상황으로 죽을 뻔했다던데.”

“아 그렇지 않아도 그 피넛 버터 이야기도 그녀가 했는데. 식당에서 밥 먹기가 위험하다. 여행도 꺼려진다 등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라는 거야. 밖에서 데이트하며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 않아 만들어 낸 구실이라는 거지. 아파트로 늦은 밤에 불러 잠자리만 하고 이른 아침에 헤어지는 수법을 쓴다는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취약한 여자들 흑인 아시안 등을 헌팅해서는 유혹하는, 결국엔 여자들의 몸만을 노린다는 거지.”


“어머머! 미친놈. 직장과 돈이 없다면 모를까? 그것도 이혼한 여자나 취약한 외국에서 갓 온 아시안이나 블랙만을 상대하며 등쳐먹으려 하다니. 그렇게 살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온다고. 아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발상은 또 뭐야.”

“그거야 외국에서 온 여자들이 혹시나 영주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약점을 겨냥하며 데이트 비용 안 쓰고 잠자리만 하려는 속셈이지. 나름대로 잔머리 굴려 만들어 낸 수작이겠지.”

“세상에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아니 왜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하며 살고 싶을까?”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그 또라이들의 깊은 어두운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니.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아이린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야는 미친놈.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치사한 놈. 되뇌면서도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다. 문자메시지 소리가 울릴 때마다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다 심장에서 막힌 듯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확인하곤 했다. 

“Hi,”

에이든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손이 떨리고 열이 났다.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또 왔다. 

“Are you ok?”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는 꽉 움켜쥔 손에 든 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Are You ok? 다음에 뭔가 더 쓰여있지 않나를 확인하듯 서너 번을 읽은 후 문자메시지를 지웠다. 마야는 손톱을 잡아 뜯다가 빨간 매니큐어를 꺼내 들었다. 러그에 앉아 발톱에 조심스럽게 칠했다. 손이 떨려 붉은색이 발톱 주위로 번졌다. 그 위에 덧칠했다. 더 번졌다.

Thursday, October 3, 2024

계약 결혼


신희와 지경이 맨해튼 허드슨 야드(Hudson Yards) 쇼핑몰에서 만났다. 쇼핑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 와인도 한 잔씩 하자.”

지경이 말했다. 

“대낮부터 술? 까짓것 좋아. 한잔하지. 밥 먹고 집에 갈 일만 남았는데.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콧노래 부르며 걷는 것도 좋지.”

신희가 흔쾌히 동의했다.


지경이 아이 머리통만 한 와인잔 밑에 깔린 검붉은 와인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한 모금 들이켠 후 말했다.

“정말 너무 한 것 아니야. 한사람하고만 평생 산다는 것이. 10년마다 갱신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니까.”


신희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 말이 남편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지겨워. 지루해 죽겠다고. 동굴에 갇힌 느낌이야.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결혼 전에는 왜 못 깨달았을까? 이렇게 지루한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걸.”


지경이 턱을 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했다 

“얼마 전, 남편에게 나와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아? 물었더니 지루하지 않다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지겨워 숨이 턱 막히더라고. 그 느낌 알아?”


신희가 칼칼한 목에 검붉은 와인을 들이붓고 

“알고 말고 나도 마찬가지야. 꼭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변화가 필요해. 며칠 전, 큰맘 먹고 남편에게 ‘나와 헤어지면 나보다 더 젊은 여자와 살 수 있어 좋을 텐데?’ 말하니까. 그냥 귀찮다네. 서류 정리하는 것도 귀찮고. 새 여자를 어떻게 믿고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냐며 그나마 모은 재산 사기당할 것이 걱정되어서 싫데. 그깟 돈이 뭐라고 한번 사는 인생 새로운 삶과 바꿀 수 없다는 건지? 다들 결혼하면 그냥 그렇게 사는 가라네. 10년 후에나 다시 생각해 보자며 침실로 가 버리더라.”


지경이 반색하며

“그러니까 내 말이 법으로 10년마다 결혼 갱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회를 줘야 한다니까. 안 그래? 그러면 불륜이네 마네, 내연녀냐 상간녀냐고 따지고 싸울 필요 없이 헤어진 남편과도 친구 관계로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 것 아니야. 법이 문제야. 법이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프레임 안에 가둬 놓는다니까. 아! 일본엔 졸혼이 있다는데. 굳이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 서로의 생활을 참견하지 않고 재산도 나누지 않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지? 그래서 내가 서류 문제가 골 아프면 이혼하지 말고 졸혼하면 어떠냐니까 그것도 싫다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래.”


신희가 깊은 생각에 잠시 빠진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저 먼 나라 니카라과던가? 거기에 사는 여자들은 지나가던 나그네가 쉬었다 가고 싶어 하면 함께 산데. 남자가 떠나면 미련 없이 보내주고 또 지나가는 다른 나그네와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데. 혼자 사는 여자가 농사지을 남자가 필요하기도 하고. 나그네도 가던 길 쉬었다 갈 수도 있고.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줄줄이 태어나 밭농사 도와줄 수 있게 성장하고. 일석삼조가 아니라 일석칠조 잖아? 굳이 아이들 손타게 키울 필요도 없데. 아이 때부터 스스로가 기어나가 먹을 거 챙겨 먹는다니. 스스로 자라나는 거지. 사람뿐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아침에 나가 돌아다니며 주워 먹다가 귀소본능으로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함께 잔데. 개, 소, 돼지, 닭, 온갖 동물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않고 잘 지낸대. 짐승도 사람들도 네 것이니 내 것이니 싸우지 않고. 서로에게 스트레스받을 일 없어서 아마 행복지수가 높을 거야. 지경아, 어째 네 얼굴이 그다지 수긍이 가지 않는 표정이다. 우리가 결혼 서약할 때, 흰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약속으로 남의 이목과 편견이 두려워 동굴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빨리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프레임 밖 세상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야. 내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이야기를 니카라과에 사는 사람에게 직접 들었거든.”


지경이 니카라과 아낙네와 나그네를 상상하는지 한동안 꿈속에서 헤매는 자세로 있다가.

“그럼, 그곳에서는 질투도 집착도 남녀 간의 싸움도 없이 그냥 물 흘러가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며 평화롭게 자연인으로 살 수 있겠다?” 


신희가 뭘 좀 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론 질병과 싸워야 하는 환경에서 살겠지만, 이곳에서처럼 질투와 시기하고, 비교하고, 집착하고 증오하며 살지는 않겠지. 한 남자가 떠나면 다른 남자가 언젠가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처럼 한 남자와 주야장천 살아야 현모양처 자처하며 조신한 여자 대접받는 사회보다는 니카라과 여자가 훨씬 앞서가는 삶을 사는 거 아니야? 굳이 주위 사람에게 조신한 여자로 대접받으며 살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LA에 사는 친구에게 했더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다.’며 정신 차리라더라.” 

 

와인잔을 거의 비운 지경이 생각났다는 듯 흥분한 목소리로

“현실적으로 니카라과인지에 가서 살 수는 없고 이곳에서도 노력하면 그렇게 살 수 있어. 얼마 전, 매슬로의 욕구단계설 (Maslow's hierarchy of needs)이란 유튜브 강의를 들었어. 강사가 한 이야기인데 피라미드처럼 올라가는 매슬로의 5단계(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는데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 예로 학교 선생이었던 한 여자를 들더라. 그 선생은 50세에 퇴직하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던 남편에게 이혼 조건으로 퇴직금의 반을 줬다네. 그리고 작은 백팩 하나 메고 한국을 떠났데. 동남아시아에서 떠돌며 배가 고프면 알바하면서 자유인으로 산데. 게다가 자유인, 인도 애인도 있다네. 가끔 둘이 우연히 만나면 하룻밤 함께 지내고 헤어지고 지금까지 떠돌아다닌대. 강사 말이 이런 여자야말로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한 사람이라는 거야. 과연 그럴까?


신희가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컬컬한 목소리로 

“물론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환경이 뒷받침하긴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포기할 것 포기하고 동남아시아를 떠도는 여자처럼 배낭 하나 메고 떠나면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현할뿐더러 자유인으로 살 수도 있기는 하지.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니?. 대부분 여자가 그 여자처럼 용기가 없으니까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에 머물러 그냥 지지고 볶으며 사는 거지. 게을러서이기도 하고(안전 욕구) 남의 이목(소속욕구)이 두렵기도 하고. 용기가 없어서 매슬로의 욕구단계설 중 하위 단계에 머물러 한 번뿐인 인생 마음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냥저냥 살다 죽는 거지. 


신희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지경이가 

“법도 법이지만 사회 구성원도 문제야. 일단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도 문제이기도 하고, 왜 사람들은 그리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즐기는지. 그 시간에 제 일이나 제대로 하지 않고. 남이야 이혼하든 재혼하든 불륜 행위를 하든 뭔 상관이래. 생긴 대로 살고 싶다는데. 남의 일에 참견하고 불라불라 떠드는 사람치고 제 인생 제대로 사는 인간 못 봤어. 잘못된 결혼제도만을 탓할 게 아니라 본인이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면 사는 거지 뭐. 그냥 자유롭게 살게 놔두면 자유를 즐길 사람은 즐기고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은 혼자 있다가 독거노인으로 죽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신희가 마지막 남은 붉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애 저녁 지을 시간이다. 집에 가서 밥이나 하자. 이 인간 더러운 성질 내기 전에. 한국 남자들은 왜 배만 고프면 짜증 내는지? 야만인도 요즘처럼 먹을 게 지천인 세상에서 안 그런다는데.”


신희가 화들짝 놀라며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저녁밥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우리 H-마트에 들려 밑반찬이나 사 가자.”  


지경이와 신희는 32가 K-타운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각자 남편이 좋아하는 찬거리를 사서 누군가 말한 결혼 25년을 넘기면 성공한 삶이라는 결혼 울타리 안의 동굴을 향해 터벅터벅 김빠진 발걸음을 옮겼다.

Friday, April 19, 2024

엄마의 치마 속


“Hi, I remember you.”

“미안.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가에게 ‘I am from my mother’s belly.’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꽤 인상적이어서 너를 기억해요.”

“어! 그랬어요. 크루즈에 몇몇 없는 동양인인 나를 기억하나? 했는데.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크루즈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남자와 나눈 대화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들의 첫 질문은 

“Where are you from?”이다. 나는 대답한다. 

“I am from my mother’s belly.”

미국에 오래 살면서 수없이 받아 온 질문이 귀찮기도 하고 그냥 심심풀이 땅콩 까먹는 식으로 대꾸한다. 그러면 웃으면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집요하게 내가 태어난 곳이 더 궁금한지 질문은 이어진다. 

“What is your nationality? Japanese?”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Chinese? Korean?”

“I am from Korea.”

라고 대답했건만 질긴 사람들은 나에게 다시 묻는다.

“North Korea? South Korea?”

나는 대답한다.

“I am from East Korea, hahaha. West Korea.”

외국인 대부분은 북한과 남한은 어디서 들어서 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들에게 나는 웃으며 다시 말한다.

“Actually, I am from Best Korea. Haha ha.”


한국이 드라마와 가수 방탄 덕에 많이 알려졌다. 내가 수없이 내뱉던 ‘Best Korea’가 정말 된 것이다. 나의 두 아이는 

“엄마, 고마워요. 한국인으로, 가장 큰 도시 뉴욕에서 남자로 태어나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며 살게 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줘서.”


큰아이가 오래전, 몽골에 여행 간 적이 있다. 어두운 밤에 별을 보며 들판에서 헤매던 중 멀리 몽골인이 사는 집, 게르를 보고 반가웠다. 

“길을 잃었습니다. 길 좀 가르쳐 줄 수 없을까요?”

“잠깐만 기다려야 해요. 지금 코리안 드라마를 보는 중인데 드라마가 끝나면.”

“나 코리언이에요.” 

“아! 반가워요. 그럼 함께 드라마 보고 끝나면 안내해 줄게요.” 


내가 태어난 한국이 ‘잘 살아보세.’ 외침으로 부강국이 되었다. 게다가 드라마와 가수 방탄 등 많은 활동가의 노력으로 세상 곳곳에 널리 알려졌다. 아이들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난 왠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우주에 홀로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은 느낌이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 자리 잡아 보겠다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발버둥 치다 상처받고 피곤해진 작은 짱돌 같은 느낌이랄까?


“정신 차려. 애가 소금에 푹 절인 파김치 같네. 그 못된 성질 다 어디 갔어? 미국 가기 전에는 제 성질대로 안 되면 방바닥을 뒹굴며 난리 치던 애가, 미국 가더니 성질 다 죽고 사람 됐네! 뉴욕 물이 세기는 센가 보다. 미국 가기 잘했지. 공부해서 좋고, 못된 성질 고쳐 좋지, 결혼 비용 안 들었으니, 일석삼조다. 너 한국에서 결혼했으면 돈 엄청나게 깨졌다. 모르긴 해도 유학 비용보다 훨씬 더 들었을걸.” 

오래전, 한국을 방문하니 친정아버지가 기뻐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나의 미국 생활 시작부터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종사촌 언니가 한국 음식이 가득 든 커다란 박스를 뉴욕 가는 나에게 시카고에 사는 시누이에게 전해 달라며 공항에 가져왔다. 

“언니, 시카고가 어디야.”

“뉴욕과 가까운 곳이야. 내 시누이가 가지러 올 거니까 걱정 말고 가져가.” 

JFK공항에 학교에서 마중 나온 말레이시아 여학생이 내 이름이 쓰인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박스에서 한국 음식 냄새가 솔솔 새는 것이 아닌가! 가뜩이나 못 하는 영어가 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등록을 마치고 박스를 가지러 오라고 시카고에 전화했다. 

“시카고에서 뉴욕이 얼마나 뭔 곳인 줄 몰랐어요. 가지러 갈 수 없어요. 우편으로 부치세요.”

차도 없고, 우체국도 모를뿐더러 어떻게 붙일 줄도 모르는 나에게 ‘왜 가져 왔느냐?’며 귀찮다는 듯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었다.


미국에 유학 간다니까 교수님이 미국에 사는 지인의 전화번호를 줬다. 몇 개월을 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 보기만 하고 망설이다 용기 내 조심스럽게 전화했다.  

“저 서울에서 온 이수임인데요.” 

“난 한국 사람 안 만납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 밀어냈다. 쇠몽둥이로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몸이 굳어져 한동안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붙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연히 한국 아줌마를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나는 서울에서 방금 온 약아 빠진 서울 아가씨는 무서워서 상대 안 해요.” 

깊은 늪으로 빠져들며 허우적거렸다.


외로움에 절은 내가 한국 남자와 차 마실 일이 생길 줄이야! 잘 보이려고 작은 눈을 반짝거리며 열심히 그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이러고 노닥거릴 시간에 돈을 벌면 벌써 꽤 벌었겠네, 미국에서는 시간이 돈이지요.” 

절벽 아래로 등 떠밀려 떨어지는 느낌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미국에 와서 받는 설움에 지쳐 서울에 갈 때마다 친정아버지는

‘너 왜 이렇게 사람이 쪼잔해졌니?’

어려운 결혼과 이민 생활이 나를 쪼잔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힘들 때마다 친정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쉬다가 용돈 두둑이 받아오는 재미로 툭하면 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몇 불에 벌벌 떠는데 그들은 펑펑 써대니, 대조적인 삶이 서러워 더는 갈 곳이 아니라며 발길이 뜸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친정은 새로운 식구인 올케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 친구가 주인 행세를 하며 엄마가 알뜰히 모아놓은 재산을 축내며 나를 반갑지 않은 나그네로 취급했다. 친정은 더는 끼어들 수 없는 타인들의 무대로 바뀌며 씁쓸한 기억으로 멀어졌다. 


오랜 이민 생활, 수없이 절벽으로 떨어졌다가는 기어 올라오고, 친정과도 멀어지며 서서히 파김치가 되어갔다. 드디어는 건포도처럼 말라 굳어지고 쪼그라들다가 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그 돌멩이가 닳고 닳아 먼지가 되었다. 나는 이따금 먼지로 누군가의 발밑에 깔려 설 수 없는 느낌이다. 답답하다. ‘내가 왜 이곳에 웅크리고 있는 걸까?’ 자신에게 반문한다.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배나 더 긴데도 미국에 살면 살수록 끝 간 데 없이 넓은 미국이란 나라를 통 모르겠다. 부모 돌아가시고 난 후 한국은 설움의 땅으로 내가 알던 곳이 더는 아니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가는 곳이라던데? 엄마 품 안이 나의 집이다. 


어린 시절 항상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엄마는 나를 시골집에 보내곤 했다. 곧 뒤따라오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차를 타고 내려서는 십 리 길을 꼬부랑거리고 가면 시골집이 보였다. 걸어가는 강가 벼랑은 끝없이 깊고 강물은 나를 삼킬 듯 출렁였다.


고모는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번쩍 안아 냇가로 데려가 냇물을 끼얹어 주며 목욕 시켜줬다.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물에 말아 오이지에 고추나물 그리고 조개젓으로 밥을 먹으면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엄마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서울서 온 나를 반기는 친구들과 뛰어놀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산등성이 무덤가에 서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혹시나 엄마가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엄마는 없다. 꿈에서 본 엄마는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 나를 찾아올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가겠다고 며칠을 울곤 했다. 나를 찾아오다가 엄마가 강가 벼랑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상상이 더욱 울게 한듯하다. 며칠을 울고 나면 엄마 곁에 갈 수 있었다. 엄마의 치마폭에 들어가  좋아서 흘리는 눈물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치마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곁에 있는 나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온종일 울지 않고 뛰어놀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엄마는 없다. 나도 모르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의 엄마가 살아왔듯이 그녀를 닮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Friday, January 26, 2024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다. 서희는 가을 청색 코트 속에 다운 조끼를 입고 검은 머플러로 목을 감았다. 그녀 몸에서 내세울 것이라고는 튼실한 다리다. 제일 잘하는 것도 걷는 것이다. 서희는 ‘강을 끼고 걷다가 대서양을 만나 해안선을 낀 작은 도로로 계속 걸어가면 플로리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검은 개가 갑자기 짖으며 달려왔다. 그 바람에 서희는 기겁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며 개 주인을 찾았다. 개 주인은 떨어진 곳에서 개 줄을 들고 ‘개야 물어라.’는 태도로 놀라는 서희를 보며 즐기는 듯 느긋했다. 당장이라도 물것 같은 개를 노려보며 파랗게 질린 서희는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네 개가 나를 물려고 하는데 개를 부르지 않고 뭐하니? 아홉 시가 지나면 개 줄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오히려 개 주인은 개새끼를 걱정하는 투의 뻔뻔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지껄였다. 

“선글라스에 마스크와 모자를 쓴 너의 이상한 모습을 보고 개가 놀라서 짓는 거잖아.” 

개들은 개 주인을 똑 닮아 못된 주인이 키운 개는 사납게 짖으며 달려든다. 개가 가까이 와서 인사하듯 동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착한 개 주인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다. 우울증 주인 개 또한 우울증인지 다른 개하고는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배회한다. ‘개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주머니에 먹을 것을 넣고 다니다가 달려들려는 개를 멀리 쫓기 위해 던져줄까?’ 궁리와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개 줄을 해야만 하는 오전 9시 이후로 산책 시간을 바꾸었는데도 못된 개 주인들은 개를 풀어놓는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듯이 서희에게는 개를 무서워하며 싫어하는 사정이 있다.

“개새끼” 서희가 태어나 처음 내뱉은 욕이다. ‘엄마, 아빠’라는 말만 간신히 할 줄 알던 나이의 서희가 등에 주사 놓는 의사를 향해 욕인지도 모르고 했던 말이다. 아마 서희가 개한테 물리고 나서 ‘이놈의 개새끼가.’ 화가 나서 내뱉은 어른들의 말을 듣고 따라 한 듯하다. 아버지는 본인을 빼닮은 서희를 무척 예뻐했다. 번쩍 들어 올려 깎아도 수염이 금세 올라오는 까칠한 뺨에 비벼대곤 하셨다. 서희는 따가워 발버둥 치며 아버지의 껄껄 웃는 소리를 듣곤 했다. 사랑을 독차지한 서희에 대한 시기심 때문인지 키우던 개가 어른들이 잠시 한눈판 사이 잠자는 서희를 으슥한 곳으로 물고 가서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 개에게서 떼어 낸 화가 몹시 난 아버지에게 개는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졌다. 아직도 서희의 다리에 흔적이 서너 군데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개만 보면 살살 기듯이 걷는다. 아무리 개 주인이 ‘우리 개는 물지 않는다. 착하다.’는 말을 해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개는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기에 어느 때, 어디에서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달려들어 성추행당했다는 뉴스도 종종 듣지도 않는가.

서희가 개를 멀리하는 사정이 있듯이 승미는 개라면 끔벅 죽듯이 사랑하는 사정이 있다. 

승미는 여덟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억척스러운 엄마가 반찬 장사해서 큰 언니를 대학 졸업시켜 약사로 만들었다. 엄마가 반찬 장사하는 시장통 골목 들어서는 길가에 약국을 차렸다. 맏딸인 큰언니는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언니가 약국에서 번 돈이 승미에게 오기까지는 목 빼고 기다려도 인절미는 구경도 못 하고 콩고물이나 할 틀 정도로 오빠와 언니들의 학비 대기에도 벅찼다. 항상 언니들이 물려준 옷과 신발을 그리고 반찬 장사하는 엄마와 바쁜 언니들 틈바구니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희와 승미는 그 넓은 미국에서도 뉴욕 그리고 같은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다. 승미는 개를 끌고 배회하고 서희는 산책 중이었다. 무릎 뚫린 빛바랜 청바지에 주황색 오리털 재킷을 입은 승미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다른 개와 달리 승미 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사색하는 표정이었다. 개를 한국억양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서희는 승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둘은 서로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어느 날 깊은 생각으로 사색하던 개가 서희에게 다가와 빤히 바라봤다. 개를 끔찍이 싫어하는 서희지만 이 개만은 특이해서 물어봤다.

“개가 생각이 많은가 봐요?”

서희의 물음에 귀찮다는 듯 승미는 개를 부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 후로 개는 서희를 볼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아는체했다. 승미가 개를 불러도 개가 서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자 개 줄을 묶으려고 다가왔다.

“개 이름이 뭐예요?”

“나이키예요.”

승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 사람이 이 동네에 사는 줄 몰랐어요. 반가워요. 개가 조용하네요. 사색하는 철학자 같아요.”

둘의 인연은 개 끈으로 연결되었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승미가 상냥한 미소로 다가와 커피를 내밀며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친절을 받으며 서희는 기뻤다. 커피로 시작한 승미는 만날 때마다 인절미, 만두, 김치, 등등 그녀가 손수 만들었다며 가져다줬다. 둘은 가까워졌다.

서희가 생각하기에 승미의 개 사랑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유난스러웠다. 세상에 승미 자신과 나이키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이키에게 인사하고 가세요. 우리 아들이 섭섭한 눈으로 쳐다보잖아요.”

돌아서 가는 서희를 승미가 불러세워 커다란 눈을 부릅뜨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야단치듯 말하곤 했다. 서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어질 때 인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 ‘나이키에게 인사하고 가라니!’ 산책하며 개에게 시달리던 서희가 이제는 인간에게도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승미와의 인연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나이키를 ‘우리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키의 존재가 그녀의 남편과 딸의 존재 이상인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도 없이 나이키를 끌고 서희 집 문을 두들기지를 않나.

‘우리 아들이 서희씨 집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버텨서요.”

“그럼, 나이키를 뒤뜰에 풀어 놓고 차 마시고 가세요.”

“나이키는 내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를 찾으며 울어요. 여기에 함께 있고 싶어요.”

승미는 식탁에 두발을 올린 나이키를 쓰다듬으며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며 차와 함께 내놓은 과자와 넛을 입에 넣어줬다. 서희는 상전이 따로 없는 풍경을 보고 뭐라지도 못하고 참으며 오래전 한국에서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광버스 뒤에 앉은 젊은 여자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전화 해댔다. 

“우리 딸 잘 있지? 밥 먹였어? 엄마 보고 싶어 할 텐데? 아이고 우리 딸 보고 싶어라. 쭛쭛쭛” 

딸을 바꾸라더니 전화기에 대고 뽀뽀를 해대며 난리를 떨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딸이라는 게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아이 업는 포대기로 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네를 태우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이라고 부르는 강아지 주인에게 참다못한 한 할머니가 

“사람이 어쩌다가 개를 낳았소?” 

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승미가 나이키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쇼핑이다. 쇼핑 갈 일이 있으면 함께 가자고 전화했다. 서희는 바람도 쐴 겸 운전하는 승미가 가자는 데로 따라다녔다. 

"예쁜 옷을 잘 고르네요."

서희가 말하자

“언니 친구 중 부잣집 딸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항상 예쁜 옷을 입고 집에 놀러 오면 곁눈질하며 부러워했어요. 살면서 그 언니가 입었던 블라우스가 항상 눈에 아른거려서 쇼핑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옷을 잘 고르는 경지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한 줄 알아요? 남편 눈치 보며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거 예쁘지 않아요? 서희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사요. 입던 옷들은 모두 버려요. 그리고 새로 다 바꿔요. 내가 도와줄게요."

"전부 다요!" 

서희는 놀랐지만, 너무도 강경한 그녀의 말투에 알았다고 했다.

“아주 단순한 디자인과 색상으로 검정, 회색, 베이지색이나 흰색 바지와 치마 그리고 카디건 스웨터, 청바지와 발목부츠, 검은 뿔테 안경은 기본으로 있어야 해요. 좋은 옷을 입고 싶어도 그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잖아요." 

서희는 전문가 다운 승미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의 부실한 가슴을 가리는 Tug neckline 셔츠, 작은 키를 커버하는 Boot cut 바지, 아예 세탁소에 함께 가서 바지 기장을 줄이는 도움까지 받았다. 서희는 늘어나는 카드 빚으로 속이 쓰렸지만, 발바닥이 불나도록 승미를 따라다녔다. 승미는 손재주가 많고 눈썰미도 예리했다. 윈도에 걸린 옷을 지나치며 힐끗 보기만 해도 만들어 입을 정도다. 음식도 먹어보기만 하면 그대로 만들어 초대하곤 했다. 

서희는 승미가 쇼핑 중독과 지나친 개 사랑으로 남편과 갈등이 많다는 것을 들었다. 승미가 남편과 싸운 후에는 가출해서 화가 풀릴 때까지 쇼핑하다가 호텔에 머무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호텔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행 갈까 봐요. 우리 함께 여행하지 않을래요?”

서희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잘해주는 승미 말을 모른척할 수 없었다. 

“서희씨가 여행을 많이 했으니까, 일정을 한번 짜 보세요.” 

서희는 집 나온 여자와 여행 간다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여행계획을 짜는 것도 귀찮았다. 그냥 한국 여행사에 전화했다. VIP 용 패키지가 좋다며 권하기에 여러 말 섞기 싫어 그러라고 했다. 플러싱 가는 길에 둘은 여행사에 들렀다. 크레딧 카드로 결제하려고 했더니 캐시나 체크로 내란다. 직원과 몇 마디 실랑이하다 밖으로 나왔다. 몹시 실망한 승미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쳐다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희는 가기 싫은 여행 잘 됐다고 생각하며 담배 한 대 달라고 했다. 둘은 어둡고 스산한 주차장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상반된 생각으로 심드렁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 대다가 집으로 왔다. 

“그냥 여행을 취소하기는 너무 섭섭해요.”

승미가 여행을 가자고 다시 전화했다. 승미의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그냥 여행을 가야 할 것도 같았다. 서희는 실랑이했던 여행사에 전화해 매니저를 바꾸라고 했다. ‘왜 카드를 받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받는단다. 

여행을 많이 다닌 서희에게는 유럽 여행이라는 것이 몇 번 하다 보면 이 나라 저 나라 거의 비슷한 것이 성당 순례인 듯 새로운 느낌이 없었다. 여행사에서 자라는 곳에서 자고, 보라는 것을 보고, 먹으라는 식당에서 먹으며 끌려다닌다. 게다가 낮이 짧은 겨울에 동유럽 여행이다 보니 그냥저냥 모든 것이 시큰둥했다. 하지만 나이키와 쇼핑에 세월을 보냈던 승미는 흥분했다. 옷과 신발을 사서 쟁였다. 여분의 가방을 새로 샀다. 저녁마다 바에서 사람들과 한잔하며 즐기고 싶어 했다. 반대로 서희는 여행할 때는 일찍 자고 일어나는 습관이 그냥 언제부턴가 생겼다. 객지에서 피곤해 몸이 아파지는 것이 늘 두렵기 때문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만 빼고는 집 떠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 자체에 심각성을 두지 않는 ‘그냥’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희는 승미의 물음에 시종 ‘알았어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해요.’로 일관하며 성의 없이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쇼핑만을 즐기는 승미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말해야 할 이유도 굳이 없었다. 여행할 때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거나 동네 시장통을 기웃거리고 동네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것을 즐겼다. 패키지여행은 그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니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취향이 다른 승미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이 두려워서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능성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가 흔히 그렇듯 시간이 지나자,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다. 승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그냥, 알아서 해요. 혼자 하는 일은 딱 부러지듯 하면서 나와 함께하는 여행엔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태도를 왜 반복하는 거예요?”

승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서희는 승미가 화가 나 이성을 잃을 때 나오는 짙은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들으며 놀랐다기보다는 승미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승미가 결혼 전 룸메이트와 다투다 발로 차며 두들겨 팼다는 것을.’ 

잘못하다가는 자기도 발로 차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상상하며 입을 다물었다. 승미는 주위 사람들이 나이키처럼 자기에게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따르지 않으면 화를 벌컥벌컥 냈다. 서희 또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만만치 않았다. 속으로 승미를 비웃었다.

‘세상에서 너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며 통제할 수 있는 나이키나 너를 반기고 따르지 내가 왜 너에게 꼬리를 흔들며 순종해야 하느냐고~‘​​ 

​​

‘서희처럼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모르는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을 만났다니! 게다가 동물을 싫어하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너 같은 인간과는 절대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 속 터져서.’ 

여행 이후 승미는 동물인 나이키는 잘해준 자기의 은공을 알고 말 잘 듣는데 인간에게 공들이고 잘해줘봤자 소용이 없다며 씩씩거렸다. 나이키와 있으면 마음이 편한데 인간들과 있으면 기분이 더럽다. 특히나 서희와 있으면 뭔가 갑갑하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서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공원에서 나이키와 산책했다.

어느 날 길에서 서희와 승미가 마주쳤다. 서희가 손을 흔들며 나이키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화끈한 승미는 쌩하니 그냥 지나쳤다. 나이키는 서희에게 오려고 낑낑거렸고 승미는 나이키를 질질 끌고 갔다. 서희는 멀어져 가는 승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던가?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다.’며. 결혼 전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 결혼 안 하니? 어떤 사람 찾는데?” 

서희는 친구의 질문에 잘못 대답했다가는 

“눈은 높아서 시집도 못 가고 쯧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뒤 잘 보는 남자!” 

“그건 사람이 아니고 개잖아. 얘는 별소리를 다 한다.”

친구가 눈을 흘기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희를 쳐다봤다. 

“개만도 못한 사람도 많잖아. 개만 한 사람이면 다행이지 뭐”

서희는 승미가 나이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이키는 이따금 생각나지만, 승미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지난 과거를 잘못 살았다는 후회를 되씹는 일이라서 승미에 대한 기억을 밀어냈다. 마침내 승미와 서희는 그녀들의 기억에 한동안 묵혀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타인으로 지워졌다.

붉은 신호등, 붉은 와인, 붉은 매니큐어

마야와 에이든은 맨해튼 42가와 3 에비뉴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에이든이 빈 택시를 향해 팔을 들었다. 택시가 길 건너 빨간 신호등에 멈췄다. 마야는 깜박거리는 적색 신호등을 보는 순간 전 남친을 처음 만난 날, 그와 노랑 택시에 오르자마자 키스하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