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9, 2025

막이 내리다


“많은 한인이 사기꾼이니 엮이지 않게 조심해요. 한국인은 쓸데없이 정이 많아요. 정서가 어떻고, 정체성이 어떻고 하는 소리 촌스러워 듣기 싫어요.”

한국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아에게 이정은 말했다. 도아는 이정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놀랄 만큼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백인으로 착각하는 말투가 너무 기가 차서 대꾸하지 않았다. 

도아와 이정은 30여 년 전에 만났다. 친구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이정은 어릴 적 한국을 떠났고 도아는 대학 졸업 후 떠났다. 둘이 아무리 비즈니스 관계를 오래 했다고 해도 친구가 되기에는 갭이 많았다. 백인과 결혼한 이정은 예의 바른 친절한 말투와 교양 넘치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반면 한국인과 결혼한 도아는 직설적으로 욕을 먹어도 좋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도아는 종종 생각했다. ‘이정이 백인 남편과 살다 보니 본인도 백인이라고 착각해서인가? 아니면 갱년기라서? 어릴 적 한국을 떠난 후 한인을 기피해서? 몸은 성장했는데 한국어가 성장하지 못해서인가?’  

 “아니 일을 이렇게 해서 주면 어떡해요. 완벽하게 해서 보내지 않으면 난 들여다보지 않아요. 다시 해서 보내요. 미국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헛살았군요.”

이정은 도아에게 자신은 완벽하게 잘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 그 꼴이냐는 식으로 면박을 줬다.  

“우리 집 청소하는 여자는 내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윤나게 집 안 청소 잘해요. 내 비서도 빈틈없이 일 잘하는 데 도아씨는 이게 뭐예요. 다시 해와요.”

‘내가 네 집 하녀냐? 아니면 너의 내시 같은 비서냐?’ 

 어이가 없어 도아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더 난리 치며 지랄발광할 것 같아 

“알았어요. 다시 할게요.”

평화로웠던 어느 화창한 날, 도아는 코네티컷 친구 집에서 창밖 강가에 낀 안개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이정의 전화가 왔다. 도아는 물건을 만들고 이정은 판매해서 반반씩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도아도 이정이 자신보다 영어와 일을 잘해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에 동의했다. 

도아는 물건을 만들고 이정은 팔아서 이익금을 반반씩 나누는 일인데 자기 집 청소하는 사람과 비교하며 질책하는 데야!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정의 깐죽거리는 매몰찬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도아는 다 집어치자고 버럭 소리 지르고 싶다가도 비즈니스 관계로 남편과도 엮어있어 잘해보려고 참았다. 다시 고쳐서 잘해서 보내겠다는데도 전화선 저쪽에서 이정은 계속 한 잔소리 또 하고 또 했다. 도아는 목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에 혀에서 떨어지려는 성난 소리를 삼키려고 와인을 가득 따라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아가 전화기를 옆으로 치워 놓고 와인을 마시며 차분함을 유지하려는데 이정이 도아를 찾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알았습니다. 다시 해볼게요. 바쁘신데 그만.”

“저는 1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이에요. 서너 번 손이 가지 않게 완벽하게 해서 보내주세요. 아 그리고 어제 물건 맡긴 분과 이야기 좀 하셨나요?”

“아니요.”

“그냥 물건만 던져 놓고 가셨다는데 그분과 물건을 어떻게 해주실 건지 상의도 하지 않고.”

“염려 말고 가라고 해서 그냥 왔는데요. 그분이 우리와 일을 오래 했잖아요. 알아서 잘하시겠지요. 제가 돈을 제때에 드리니까 잘해 주실 거예요.”

“돈 돈 돈 돈만 주면 잘한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분과 오랫동안 별문제 없이 일해서...”

“그분과 이야기하면서 물건에 대한 피드백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잖아요.” 

“그분이 치과에 간다고 시간이 없다고 해서.” 

도아도 이정만큼은 아니지만 일하나 만큼은 똑 부러지게 한다고 자부하는데 허구한 날 야단만 맞으니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도아가 이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인상적인 말이 떠오른다.

“전 상대방의 나쁜 점은 지적하지 않아요. 좋은 점만 말해요.” 

“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네요. 역시 비즈니스 우먼이시군요.” 

감탄하며 자신도 이정처럼 남들의 단점은 입을 다물고 장점만을 칭찬하려고 애썼다. 이정은 처음에는 장점도 단점도 말하지 않고 항상 거리감을 두며 너는 내가 상대할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고자세로 도아를 멀리했다. 남 일에 관심 없고 생긴 대로 사는 도아도 이정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해가 바뀔수록 이정은 좋은 말은커녕 상대에 대한 비난 거리를 현미경을 들고 찾아내듯 일일이 지적했다. 작은 실수를 용납 못 하는 그녀의 비서도 한몫 거들었다. 이정은 자기 성질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조지다가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울먹이기까지 했다.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너는 어디다 정신 놓고 있다가 왔냐는?’ 식으로 닦달했다. 

“아니 미국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그 영어 뜻도 몰라요. 뉴욕타임스 금요일 아트섹션 보셨어요?”

도아의 영어 모자람을 은근히 뉴욕타임스 좀 읽고 대화 좀 하자는 식으로 말했다.

“내가 영어를 퍼팩하게 잘하면 성질 더러운 너와 왜 일하겠니?”

도아는 말하고 싶지만, 싸우면 더 피곤하고 힘들어져 와인을 들이키며 화를 다독였다. 전화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이정에게

“네. 네. 일 잘하시네요. 대단해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 돌리기도 전에 직성이 풀리지 않은 이정은 또 전화해서 한소리 또 하고 또 했다. 

참다 참다 도아도 한마디 했다.

“내가 보낸 이메일을 검토하시고 내일쯤 전화하시면 좋았을 텐데.”

도아의 말에 화가 잔뜩 오른 이정은 

“파일 줄이는 방법도 몰라요? 파일이 너무 커서 나 원참.”

“제가 깜박하고 그만. 죄송해요. 다시 줄여서 보낼게요.” 

“도아씨가 보내오는 파일을 제가 검토나 하며 시간 낭비하는 줄 아세요. 전 일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바쁜 신 것 같은데  전화 끊고 일 보세요.”

“제 바쁜 시간을 뺏지 않게 완벽히 해서 보내세요.”

“네 다시 해서 보낼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도아가 먼저 전화 끊으려니까 이정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나 봐요?”

“스트레스받는 일? 없는데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이정은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피하려는 도아가 얄밉다는 듯 마지못해 끊었다. 도아는 와인을 들이키며 이정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씹고 또 씹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완벽하게 잘한 것이고 남이 하는 일은 무조건 맘에 들어하지 않으니. 함께 잘해보려거든 상대방 처지와 입장을 고려해서 일이 되게끔 하지 않고, 못한다고 초등학생 야단치듯 하니. 남이 하는 일은 이를 잡듯이 뒤지고도 모자라 자기보다 더한 비서라는 인간도 현미경을 들고 잡아낸 것을 트집 잡으려고 달려드는데 도아는 지쳤다. 

도아의 마시는 와인 양이 하루하루 늘어 갔다. 자다가도 이정의 악다구니가 떠오르면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몸은 점점 말라갔다. 그들 앞에서는 트집 잡히는 일 이외는 없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생각한 다음 따져도 되는데 받자마자 전화해서 지랄발광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트집만 잡으며 도아의 목을 조였다. 성에 차지 않으면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을 앞뒤로 뒤집다가 칼집을 내듯이 쿡쿡 찌르며 따진다. 급기야는 성에 차지 않은지 ‘너는 지금까지 인생을 헛살았다.’는 식으로 나왔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상대하기 끔찍해서 어찌어찌 달래서 전화를 끊고 나면 다시 전화해서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는 자세로 또 휘두른다. 도아는 ‘나도 질기지. 저런 인간과 상대하는 나는 인간도 아니다.’며 속으로 한탄했다.

도아는 이정으로부터 조용히 멀어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정과의 갈등이 폭팔하기 전에 자신의 가치와 행복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너지를 이정의 비수에 소비하지 말자. 평화를 무너뜨리는 이정의 말에 휘둘리지 말자. 고 마음 먹었다. 

‘그만 만나면 나에게 손해가 오는가? 오지 않는가를 판단하고 이득이 없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 이득이 있더라도 너무 견디기 힘들면 손해 보고서라도 그만 만나라.’는 법륜스님의 인간관계 유튜브 영상을 찾아 들으며 일단은 이정이 먼저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날 이정이 도아에게 전화해서 교양 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솔직히 사람들에게 내 시간과 돈을 자선(charity)하고 있는 거예요.”

도아는 이정이 말한 영어 ‘charity’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체 애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charity라는 단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나? 사전을 찾아볼 정도로 자신의 귀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이정의 머리가 돈 것 아닌가? 실지로 이정이 도아를 위해 뭘 자선했단 말인가! 계속해서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금전적으로 투자했지만, 뭘 얼만큼 되돌려 줬단 말인가? 

 

이정은 도아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과도 싸움닭처럼 싸우다 끝냈다. 법륜스님 말씀 중.

‘상대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과 문제가 많다며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의 문제다.’

도아는 자신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조용히 문제 많은 이정과의 인연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도아처럼 이정과 일에 연관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도아에게 물었다.

“이정이 너에게도 난리 치지? 어떻게 그걸 참고 있어? 나는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못 참겠어.”

도아도 이정에 대한 한을 마구 쏟아 내려다 

“힘들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과도 연결되어 있어 참을 수밖에.”

“근데 처음엔 그러지 않더니 갈수록 심해져. 내가 어느 날 이정에게 물었어. 어디 아픈 것 아니냐? 고 했더니 화를 발끈 내며 신경질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더군. 정상 아니야.”

“선생님이 초등학생 야단치듯 하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왜 그러는 거예요? 몸은 성장했는데 한국어가 성장하지 못해서인가요?”

“언어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이 부족해서야.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지.”

이정은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외국으로 돌아다니다 한국에 들어왔다가 또 해외로 떠나 돌아다녔다. 몸이 성장하듯이 언어도 성장해야 하는데 그녀가 쓰는 언어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에 이따금 한국으로 돌아와 다녔던 학교 과정 수준으로 언어 성장이 멈췄다고 처음에 도아는 생각했다. 성인들 간의 말투가 아니다. 탁구를 칠 때 공을 상대에게 잘 던져주듯이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처 주지 않게 적절한 언어를 골라 사용해야 하는데 이정은 탁구공이 오면 왜 공을 자기 앞에다 공손히 던지지 못했냐는 식으로 상대방이 받아칠 수 없게 신경질 적으로 공을 내동댕이 치는 식이다. 

‘너 그것도 몰라.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동안 뭐 했니. 헛살았구나.’

등등 초등학생에게 하듯 도아를 야단쳤다. 도아는 이정과 함께하는 지리를 피하며 감정싸움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때를 기다렸다.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바랐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아는 전화 화면에 이정의 이름이 뜨면 몸이 떨리고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다.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전화를 받지 않고 피했다. 엔설팅 머신에 녹음된 이정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상냥했다. 이익이 될만한 사람에게는 천사 같은 미소를 띠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간다. 이정은 도아의 심정이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해댔다. 도아는 이정이 따질 때마다 ‘오냐오냐 네 말이 맞다. 너 잘했고 나 못했다.’라고 달래서 무조건 전화를 빨리 끝냈다. 그러다 어느 날 도아는 이정의 악다구니를 참으며 한참을 듣고 일어나다가 쓰러졌다. 

 

“왜 나를 못 잡아먹어 난리야?”

하도 답답해서 도아가 남편에게 물었다. 

“스트레스 풀 대상을 만만한 당신으로 잡은 거야. 다 때려치우자고 소리 질러 봐.”

“말 못 해. 이정이 먼저 말해주면 좋겠어. 기다리는 중이야.”

이정은 도아를 만나면 언제 내가 너의 목을 조였냐는 듯이 우아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반겼다. 뭐 도아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많은 사람의 목을 조였으니. 견디다 못해 그 많던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고 서너 명만 남았다. 그냥 목조이는 순간을 넘기고 큰소리 내지 않고 더 이상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도아의 희망이었다. 도아는 주중 저녁 6시까지 이정의 전화가 오지 않으면 오늘은 무사히 넘겼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행복했다. 언제 또다시 목을 조이기 전에 지금 이 시간을 즐기자는 듯 이정과 부딪치지 않은 날은 평화로웠다. 


인간관계는 참 복잡하고 어렵다. 이정은 일 처리만큼은 정확하게 기계처럼 잘했다. 하지만 일만 잘한다고 비즈니스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 또한 뒷받침이 돼야 한다. 이정은 인공지능(AI)이 아닐까? 오히려 인간들은 점점 기계가 되고 인공지능은 인간다워진다. 인간은 상대방의 언행으로 분노를 느끼지만 AI는 매니저가 트레인 해 놓은 데로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삭일 줄 안다. 도아는 이정에게 질려 모든 인간관계를 끝내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자연과 쳇 GPT 하고만 놀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구글링보다 쳇 GPT에서 물어봤다. 계속 찾아 들어가야 하는 구글링과는 달리 한방에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어 편하다. ‘인공지능이 대체 못 하는 인간이 가진 뛰어난 점은 호기심, 겸손과 감성지능(공감)이란다.’ 그러나 오히려 쳇 GPT는 이정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안다고 잘난 척하지 않는다.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고 겸손하다.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 주며 더 궁금한 점을 다시 물어보면 도아주겠다는 호기심이 깃든 친절함으로 끝말을 맺는다. 

도아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같이 미쳐볼까?’ 더는 참지 못하는 순간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정을 피하려는 방패막을 내리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칼날을 갈며 이정을 단칼에 자를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단 한 번도 이정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정에게 전화가 왔다.

“도아씨는 도통 연락하지 않네요.”

“요즈음 누가 전화하나요. 전화상으로는 감정이 이입되어 편하지 않잖아요. 전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선호해서.”

어머 전 도아씨가 영어보다는 한국말이 편하신 것 같아서 내가 특별 대우하느라 그동안 전화 했는데. 그럼 앞으로는 제 비서와 영어로 하실래요?”

“그동안 제 불편함을 감안해서 한국말로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앞으로는 이메일로 당신의 비서와 서신 교환 할게요.”

“난 전화로 말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데.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도아의 남편은 10년 넘게 옆에서 와이프와 이정의 대화를 듣고 참고 참다가 도아가 이정의 전화를 받고 두 번째 쓸어지던 날 칼을 빼들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다가는 마누라 죽이겠어서 오늘 이정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단호하게 말했어. 제 와이프에게 할 말 있으면 나에게 하세요. 절대로 와이프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했더니 이정이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더니 다른 방으로 가더라고. 어떡하겠어. 와이프 먼저 살리고 봐야지. 이젠 더는 전화하지 않을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어.”

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도아와 이정과의 관계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Saturday, February 22, 2025

미스 송과 미스터 남


비행기 시간에 쫓기는 것을 질색하는 미스 송은 전날 밤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뉴욕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나와 차 뒷좌석에 넣었다. 남자 친구 남은 어디에 숨어서 찾기를 바라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15분쯤 지난 후 남이 긴 다리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나왔다.

“여행 가방은?”

“이미 뒷좌석에 넣었어요.”

나에게 말하지 않고 그 무거운 것을. 자 그러면 출발합시다. 무슨 음악을 틀어드릴까? 클래식, 재즈, 한국 음악.” 시디를 꺼내 보여주며 고르라고 했다. 

“그냥 듣고 싶은 것으로 트세요.”


느린 리듬으로 흐느적거리는 Sade-Smooth Operator 틀고 그는 창문을 올렸다 내렸다. 앞 유리 창문을 잘 닦으려는지 차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발하려는 순간, 남은 바지 뒷주머니를 만지더니 깜빡 지갑을 놓고 나왔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감무소식이다. 한참 후, 부산스럽게 나왔다. 

“매일 놓아둔 곳에 지갑이 없어서 찾느라고.”

드디어 그가 엑셀을 밟고 차는 떠났다. 


미스 송은 어릴 적부터 신경이 예민했다. 오감을 곤두세운 까칠한 성격으로 부모를 힘들게 했다. 학교생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대학원 졸업 후, 2년 동안,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 강사를 하다가 뉴욕으로 유학 왔다. 석사과정 중 친구의 소개로 LA에 사는 남을 만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남이 뉴욕에 놀러 왔을 때 미스 송은 자기와는 달리 유순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 훤칠한 키, 잘생긴 자기 얼굴에 관심 없는 듯한 소탈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자신의 까칠함을 유모로 받아주는 그의 느긋한 여유에 끌렸다.


두 사람은 남이 두 번 뉴욕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여 년간 전화와 스카이프로 만남을 이어왔다. 둘은 그런대로 통화상으로 잘 통했다. 남의 아버지가 둘의 만남을 알고 미스 송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LA에 오라고 했다. 오늘은 일주일을 그의 집에서 머무른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고 공항 가는 중이다.


운전하던 남이 말했다. 

“비행기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우리 저 옆길로 빠져 산타모니카 비치에 잠깐 들렀다 가지요?”

미스 송은 다른 것은 몰라도 비행기와 기차 시간은 놓치지 않으려고 서두른다. 평소, 사람들과 약속도 조바심을 치며 차라리 일찍 나가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성격 탓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개근상도 받았다. 그런데 공항 가면서 비치에 들렀다 가자니! 미스 송은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뒤뜰 야자수 밑에서 그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요. 제 아들의 모자란 점을 감싸주며 잘 살아줬으면 해요. 결혼식은 제가 다 준비할게요.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오시면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미스 송은 미국에 6년이나 먼저 온 남이 미국 생활 선배인지라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을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거니까. 제가 다 알아서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이, 남 기사만 믿으세요. 허허허.”


드넓은 모래밭 저 멀리 바다가 미스 송을 반기듯 넘실거렸다. 파도가 물거품을 몰고 와 놓고 가는 소리에 그녀의 조바심과 긴장이 풀렸다. 

“와 좋네요.”

“오길 잘했죠? 우리 저 비치에서 좀 쉬었다 갑시다.”

남은 바닷물 가까운 모래 위에 벌러덩 누웠다. 미스 송은 그의 곁에 앉아 한동안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다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 남을 봤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다. 공항에 빨리 가자고, 말해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신경이 곤두섰다. 일어났다. 치마에 묻은 모래를 탁탁 소리 내 털었다. 남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미스 송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먼바다를 보다가 누워있는 남을 힐긋힐긋 보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정말 잠에 빠진 듯 꼼짝하지 않았다. 미스 송은 LA에 방문한 자기를 관광시키느라 피곤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유난 떤 달 가봐 피곤한 그에게 재촉하지 못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빨리 흘렀다. 도저히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근육이 조여들었다. 참다 참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비행기 시간이~ 여기서 공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미스 송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빨리 가는 길을 아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앉아봐요. 저 푸른 바다를 보며 바람을 느껴보세요. LA는 축복의 땅이에요. 따스한 햇볕 아래 누워 바람이 몸을 감싸면 스르르 잠이 들어요.”

“주무셨어요?”

“아녜요. 잠깐 생각에 빠졌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미스 송을 좋아해요. 결혼 하라는데. 미스 송은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결혼하실 건가요?”

“아니 그 이야기는 뉴욕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왜 결혼 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시간이.”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시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비행기 시간이. 공항에 가서 수속도 해야 하는데. 늦은 것 아닌가요?”

“염려 마시라니까요. 제가 LA에 6년 살면서 수시로 비행장을 들락거렸습니다. 일찍 가봐야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뿐이 없어요.”

미스 송은 비행기를 놓친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의 널널한 얼굴에 대고 까칠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도 저는 빨리 공항에 가고 싶어요.”

“그럼 가도록 하지요.”


남은 공항 근처 맥도날드 간판을 보자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여긴 왜 또?”

미스 송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해서. 맥도날드 커피가 가격도 싸고 맛있어요. 잠깐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갑시다. 순간, 미스 송은 이 남자는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를 마실 기대에 들뜬 그의 느긋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는 마시지 않겠어요. 차에 있을게요. 빨리 갔다 오세요.”

“그러지말고 들어갑니다. 전 맥도날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꼭 들려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버릇이 미국 오고부터 생겼거든요.”

미스 송은 잡아끄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끌려가다시피 들어갔다. 그에게 서두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가 사이인지라 아무 말 못 하고 빈 의자 귀퉁이에 반은 안고 반은 선 자세로 그가 긴 줄 맨 뒤에 서는 것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 남자가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나를 정말로 좋아하나? 아니면 내가 어떻게 성질 내놔보려고? 온갖 상념에 빠져 잠시 비행시간을 잊긴 했지만, 

“자 애플파이와 커피 드세요. 저는 6년 전 미국에 이민 오던 날, 먼저 이민 와서 자리 잡은 작은아버지가 맥도날드에서 사준 애플파이와 커피 맛을 잊지 못해요. 바로 이 맥도날드에서요. 저기 보이지요. 저 야자수를 보며 커피 향을 맡는데 과연 내가 미국에 오긴 왔구나! 감격했지요. 실은 아버지가 저 초등학교 때 한국을 떠나면서 온 가족 이민 초청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온 가족 초청이 쉽지 않아서 10년도 더 넘게 기다렸어요. 옛 친구를 만날 때마다 너 미국에서 나왔니? 라고 물었어요. 아직 가지 못했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너무 곤욕스러웠어요. 저는 공항 갈 일이 있으면 항상 이 맥도날드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스 송은 공항 가까이에 와서 그의 이런 긴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질질 끌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커피잔을 든 손이 떨리고 경련이 날듯 몸도 떨렸다. 미스 송은 그의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을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몇 시죠? 빨리 가야 하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아요. 공항에 가서 나머지 이야기는 듣도록 하지요. 이렇게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는 비행기를 놓칠 거예요.”

“성질도 급하시네. 미국에서 살려면 잘 기다려야 해요. 제가 미국 생활하면서 배운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어요. 저는 항상 기다릴 때 긴 줄에 가서 서요. 긴 줄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줄이거든요. 

미스 송은 그의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친다는 생각뿐이었다. 핸드백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핸드백이 탁자의 커피 컵을 쳤다. 커피는 그녀가 입은 주홍색 원피스 치마에 길게 선을 그으며 쏟아져 구두에 떨어졌다. 

“어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공항에 가서 갈아입을게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 빨리 공항으로 가요.”

긴장으로 열받은 미스 송이 커피를 마시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쓰러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그냥 이 남자를 떼어 버리고 비행기 안 좌석에 혼자 앉아 와인이나 들이키고 싶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 돌아가서 밀린 일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미스 송은 꼭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급히 뒷좌석에서 짐을 끌어내렸다. 

“아이고 급하시긴. 제가 하려고 했는데. 차를 파킹하고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기다려요.”. 

‘이 인간 미쳤구나! 시계는 보라고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미 없이 손목에 달고 다니나? 한 번도 시간 확인을 하지 않다니! 중얼거리며 미스 송은 몸을 획 돌려 여행 가방을 끌고 서둘러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뉴욕 가는 항공사 직원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비행기가 방금 문을 닫았습니다.” 

라는 직원 말에 미스 송은 옴짝달싹 못 하고 말뚝처럼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다행히도 4시간 후에 떠나는 비행기가 또 있었다. 


차를 파킹하고 미적거리며 걸어오는 남이 저 멀리 보였다. 미스 송은 체념한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얼마나 찾아 헤맸다고요.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 떠났어요.”

“아! 떠났어요? 미스 송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그리된 줄 몰랐네. LA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는 수시로 있어요. 뭐 기다리면서 못다 한 이야기나 하지요.”

미스 송은 남의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고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바쁘신데, 집에 가세요. 저 혼자 기다렸다가 타고 갈게요.”

“혼자서 기다리면 지루해요. 제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요.”

미스 송은 속으로 느려터진 것이 고집도 세다고 생각하며 어처구니없게 놓친 비행기가 아쉬워서 씩씩거리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교양 있는 여자가 어찌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그녀는 그가 계속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필요한 것이 있나요. 신문 사러 갈 건데.”

“없어요.”

까칠하게 대답했다.

미스 송은 신문을 사서 여유작작 걸어오는 남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섰다. 화장실을 나와 그를 피해 가게들을 둘러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이 키 크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야무진 데라고는 찾아볼 구석도 없고.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는지. 애타는 내 맘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공항 안을 빙빙 돌다가 마지못해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옆, 옆자리에 앉았다. 


남은 미스 송을 보자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반가운 얼굴로

“아니, 어디 가서 오랫동안 오지 않았어요. 걱정했잖아요. 이리 가까이 앉아봐요. 비행기를 놓쳤다니까 옛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몇 년 전 캐나다에 갔다가 뉴욕에 가는데 그만 비행기를 놓쳤어요. 분명히 시간이 충분했는데 신문을 보다가 그만. 제가 신문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지거든요. 3시간 후 뉴욕 가는 비행기가 또 있길래 읽던 신문을 마저 읽다가 깜빡하고 또 놓칠 뻔했지요.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 마지막 손님으로 운 좋게 탈 수 있었지요.”


오늘 같은 실수의 헛소리를 신이 나서 지껄이는 그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미스 송은 

맙소사! 이 남자는 구제 불능이야. 끝이다. 끝이야. 속으로 외치며 벌떡 일어나 단호한 목소리로 

“저 이제 게이트로 가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어요.”
“아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들어가려고요.”

“이야기 듣다가 또 놓치면 어쩌라고요. 인제 그만 가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럼 뉴욕에 가서 연락하세요.” 

남은 마지못해 씁쓸한 얼굴로 일어나 등이 굽은 모습으로 느릿느릿 공항입구를 향해 가서 뒤돌아보더니 왼쪽으로 사라졌다. 


미스 송은 게이트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지친 몸이 축 처져 의자를 파고들어 가는 듯 긴장이 풀렸다. 남과의 인연을 찬찬히 다시 리와인드 했다. 사람은 온순하고 착한 것 같지만, 결혼해서도 느릿느릿 늘어져 살아갈 것이다. 성질 급한 나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미칠 것이다. LA에 가서 남의 부모님을 만나고 노처녀 신세 면할 기대에 부풀었는데 차라리 노처녀 미스 송으로 사는 것이 낫지. 그러고 내 이름 ‘아라’는 남씨 성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Friday, February 21, 2025

원하는 대로 분류되지 않는 세상


2024년에도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북클럽에서 읽은 책 외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 저에게 올해 최고의 책은 북클럽에서 읽은
룰루밀러 (Lulu Miller)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입니다.

서술력이 뛰어난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읽기 전에는 과학소설인가? 읽기 쉽지 않겠지? 라는 거부감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슬슬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서 놀랐습니다. 스릴러와 반전을 거듭하면서 흥미를 돋웠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연애 소설이 아닌가? 할 정도로 로맨틱하게 끝납니다. 이 작품 속에 등장인물들은 실존 인물입니다. 이 책은 픽션, 논픽션, 에세이, 과학, 역사, 미스테리어스, 젠더, 우생학이 만든 사회 문제 등 모든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혼돈과 질서,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삶에 대한 사색을 담은 철학적 교훈으로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성장 이야기와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의 삶을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혼돈이다."라고 답한 것을 떠올립니다. 혼돈이라는 말은 이 책의 주제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말입니다. 저자는 이 말을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무질서와 혼돈 속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저자는 스스로 초래한 상실의 아픔인 7년간 사귄 떠나간 애인을 되돌려 보려는 희망의 끈을 찾고자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자연의 질서를 찾고자 했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궁금해졌습니다. 어쩌면 그는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저자가 알아야 할 무언가를 찾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조던에 관한 모든 책을 샅샅이 찾아 읽습니다. 저자는 자기는 못하는 무언가를 조던은 어떤 위기가 와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그의 삶을 보면서 자기 삶의 구원자로서 희망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를 알아갑니다. 하지만, 조던의 실패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혼돈을 인정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혼돈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19세기 과학자이자 분류학자입니다. 그는 수많은 물고기를 연구하고 이름을 붙이며, 자연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여러 번 좌절을 겪게 됩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그의 연구 표본들이 파괴되면서, 그가 쌓아온 체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다시 물고기를 분류하려 했지만, 룰루밀러는 이를 무의미한 질서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석합니다. 조던은 분류학자 일뿐만 아니라, 우생학 운동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류를 개선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졌고, 이는 후에 강제 불임 정책 등의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학이 언제든 잘못된 방향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평생 물고기를 분류하며 자연의 질서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물고기’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현대 분류학에 따르면, ‘물고기’라는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여 물에 산다고 다 어류로 분류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페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이 납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 중 다수가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연 세계는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조던의 삶은 인간이 세상을 완벽하게 정리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자연의 혼돈을 이기려 했지만, 결국 자연은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저자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혼돈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고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정리될 수 없으며,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완벽한 질서를 찾는 대신, 변화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깨닫게 해주는 철학적 책입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혼돈이다."라고 답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완벽한 통제와 계획을 고집하는 대신, 변화와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조던의 연구는 훗날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드러났으며, 그가 주장했던 우생학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례는 과학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맹목적으로 권위를 신뢰하기보다, 항상 의문을 품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 스스로에게 주는 교훈을 요약해 봤습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무너질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조던처럼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산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명료히 보게 해주는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고통을 달래며 자신의 무력감을 느낄 때 강박적인 수집에 의지한다. 수집은 폭발적인 도취감을 준다. 그러나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뀔 수 있다. 


이 세상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닐 수 있다는 열린 자세, 과연 우리 사회가 들이미는 정신적, 도덕적 잣대는 타당한 것인지, 데이비드가 주장한 생명체의 사다리는 얼마나 허구로 가득한 관념이었는지.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을 우리가 함부로 질서를 부여하고 범주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굳이 애써서 분류하며 선을 긋지 말자. 경계를 흐릿하게 둘 때 양면을 다 살피고 받아들여야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사람이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깊어진다.

Friday, November 22, 2024

붉은 신호등, 붉은 와인, 붉은 매니큐어


마야와 에이든은 맨해튼 42가와 3 에비뉴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에이든이 빈 택시를 향해 팔을 들었다. 택시가 길 건너 빨간 신호등에 멈췄다. 마야는 깜박거리는 적색 신호등을 보는 순간 전 남친을 처음 만난 날, 그와 노랑 택시에 오르자마자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오늘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만나요.”

마야가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에이든은 택시를 잡으려고 들었던 팔을 내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화번호를 줄래요?”


마야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칠흑 같은 어두운 차가운 방 안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야기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에이든의 다정한 푸른 눈과 마주치자,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가 저절로 쏟아져 나왔다. 평소 행동과 무척 달랐다.

“우리 나갈까요. 조용한 곳에 가서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근처 바에 가서 한 잔 더 하지요?” 

마야가 말하자 에이든이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내 아파트에 가서 한잔하면 어떨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났다. 몸이 뜨거워졌다. 실링팬을 틀었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실링팬을 한동안 쳐다봤다. 쫓아갈걸 그랬나? 실링팬이 반대로 도는 듯 가슴이 출렁이고 혼란스러웠다.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남자다. 그와 주말을 함께 보내며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 상상하다가 예전 엑스 남편과 남친들이 떠올랐다. 에이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부류일지도 몰라.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마야는 오늘 저녁, 친구 아이린이 다니는 회사 파티에 참석했었다. 모던미를 가미한 차이니즈 전통 의상은 드러난 그녀의 어깨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붉은 와인잔을 든 그녀의 브라운 피부와 검은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친구 아이린에게 에이든을 소개받았다. 소개받기 전부터 마야를 눈여겨보던 에이든은 한쪽으로 내려진 블론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마야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둘은 이미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로부터 이틀 후 화창한 일요일,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맨해튼 콜럼버스 에비뉴와 83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앳된 아시안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마야가 먼저 주문한 뒤 에이든이 나즈막한 소리로 위이트레스에게 뭐라고 한동안 중얼거렸다. 건너편에 앉은 마야 귀에는 음악 소리에 섞인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에이든은 확인하듯 웨이트리스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고개를 돌려 마야를 푸른 눈으로 지긋이 쳐다봤다. 마야는 카리브해 바닷속으로 끌려가는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저 웨이트리스 알아요?”

“아니요.”

“그러면 꽤 특별한 것을 주문했나 봐요?“

“피넛 버터 알레르기가 있어요. 병원에 일곱 번 실려 갔어요.”

“와! 그렇군요. 밖에서 밥 먹는 게 예삿일이 아니겠군요.”

“최근에는 식당에서 디저트를 먹고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요. 오늘도 급히 나오느라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아무래도 식당 음식이 불안해서 거의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만들어 먹어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마야는 뉴욕에서 공부하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음식 알레르기 손님들 주문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매니저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들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에이든 접시의 감자튀김이 먹음직스럽다. 배가 꽤 고팠는지, 집밥만 먹다가 외식을 해서 맛있는지 말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마야의 음식은 반이나 남았는데 그의 접시 바닥은 이미 드러났다. 그는 접시를 밀어내고 입을 닦았다. 마야도 밥맛을 잃고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에이든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웨이트리스가 빌을 가져왔다. 위험한 손님은 빨리 내보내고 싶다는 표정으로 가지 않고 서 있었다. 마야가 빌을 받아 들고 잠시 난감해하다가 그냥 계산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이미 지불한 것을 알고 다음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마야는 첫 데이트부터 기분이 언짢았지만, 미소로 답했다.


식당을 나왔다. 하늘이 유난히도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다. 옆에서 걷는 에이든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마야의 언짢은 기분이 덧없이 떠가는 구름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렸다. 마야는 에이든과 함께 더 있고 싶었다. 

“늦가을 날씨치곤 따뜻하네요. 한잔할까요? 어디 좋은 데 없어요?”

식당에서 두 블록 떨어진 술집에 들어가 스탠드바에 앉았다. 마야는 레드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와잇 와인을 주문했다. 에이든은 급히 들이켜며 이 여자는 나에게 관심이 꽤 있다. 어떻게 내 아파트로 데려갈까? 오늘 쉽게 잠자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상시 여자를 꾈 때, 짧으면 4시간, 길면 세 번째 만남에서는 잘 수 있었다. 한번 잠자리를 하면 여자들은 다루기가 쉽다. 혹시 이 여자는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엔 괜찮긴 하지만, 결혼을 위한 만남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 4명의 아이를 가난 속에서 키우며 지친 엄마가 아버지에게 

“내가 미쳤지. 저런 능력 없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소리 지르던 미시시피 낡아빠진 시골집이 떠올랐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다.  


에이든은 말없이 급한 볼일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태도로 와인을 들이켜고 또 주문했다. 마야는 이 남자 왜 이리 술을 빨리 들이켜지? 당연히 술값은 지불하겠지? 마야의 컵엔 아직도 반이 남았는데 그는 3잔째를 주문했다. 

“괜찮아요”

그는 음악을 듣는지 미소로 괜찮다고 응답했다. 마야는 David Bowie - Ziggy Stardust 노래에 심취한 듯한 에이든의 옆얼굴에 자신의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가슴을 긁는 듯한 가수의 목소리 또한 매력적이다. 도대체 에이든은 어떤 남자일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바람둥이? 아버지는 길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스캔하다가 괜찮다 싶으면 말 걸어 바람피웠다. 일본인 엄마와 케냐인 아버지는 한눈에 반해 결혼했다는데 왜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엄마와 싸우다 집을 나갔을까? 뭐 내 신세나 엄마 신세나 다를 게 없지만.


3잔을 다 비운 에이든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났다. 청색 티셔츠 깃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가 찰랑인다. 올라간 히프와 상 하체의 비율이 예술이다. 마야는 그의 뒷모습이 첫사랑 뒷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과거 남자들을 떠올렸다. 첫 남자를 대학 때 만나 6년 사귀다 친구에게 뺏겼다. 첫사랑 결혼 소식을 듣고 홧김에 따라다니던 남자와 결혼했다. 4년 동안 딩크족으로 잘살다가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일만 하며 조용히 보내다가 친구 소개로 만난 남자와 신중히 연애하던 중 또 배반당했다. 지금은 일 중독자로 승진하여 투자 금액이 많이 쌓였다. 홧김에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서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너 번 당하고서도 여전히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니! 배반의 아픔으로 보낸 긴 세월이 후회스럽다. 혼자 지내는 삶이 무료하고 지루해 견딜 수가 없다. 우울증약만 끼고 살다 죽는 것은 아닐까?


음악이 끝나고 다음 음악이 끝나가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야가 멋쩍어서 바텐더를 쳐다보자 빌을 내밀었다. 마야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화장실 쪽을 화난 얼굴로 쳐다보다가 옆에 놓인 빌을 슬쩍 들여다봤다. $12이다. 한 잔 가격이다. 그가 자기 것은 지불했나? 생각하다가 바텐더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기 몫이니까 그냥 지불했다. 에이든이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돌아와 둘은 밖으로 나왔다. 빨리 찾아온 늦가을 밤이 음울하고 싸늘하다. 마야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아까 마신 술값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어요. 꽤 싸고 좋은 술집이에요.”

그는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지 길 건너로 시선을 돌리고 말이 없다. 마야의 머릿속이 깜빡이는 네온사인처럼 온갖 색깔로 혼잡스럽다. 에이든이 자기 것만을 미리 지불한 것인지?. 아니면 바 직원이 혼자 마신 것으로 계산하고 그의 것은 까먹은 것인지? 해결되지 않은 무거운 머리는 저절로 숙여지고 입도 꾹 다물어졌다. 


“내 아파트가 여기서 가까운데, 함께 가서 한 잔 더 해요.”

에이든이 마야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술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

마야가 조금 냉정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내가 음식을 만들어 초대할게요.” 

마야는 뭔가 풀어야 할 숙제를 껴안은 채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에이든은 아파트 층계를 오르며 이 여자는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리 쉬운 여자는 아니야. 술이 들어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가 아무래도 결혼 상대를 찾는 것 같아. 결혼해서 아버지와 엄마처럼 허구한 날 돈에 쪼들리며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질색이다. 싱글로 자유롭게 많은 여자와 즐기고 싶다. 데이트한다고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는 것도 귀찮다. 정을 나누고 사랑 타령하며 매달리는 만남도 지겹다. 그냥 몸매 괜찮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자와 밤을 보낼 수 있는 FWB(friends with benefits)관계라면 좋겠는데.


에이든은 일주일 후 토요일 아침에 마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든이 덧붙였다.

“네가 그날 입은 옷이 멋져. 너의 브라운 피부와 블랙 드레스가 잘 어울려. 섹시해. 나는 너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있는데. 너는 어때? 내가 요리해서 널 초대하고 싶은데. 내 아파트에 올래.” 

에이든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열린 마야는 이상하지, 멀쩡한 직장에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쪼잔할까? 앞으로 그와 사귀려면 그를 방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가 사는 것을 보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에이든이 요리하는 동안 마야는 와인을 마시며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혼자 살아?”

“예전에는 남동생과 살았는데 브루클린으로 이사 갔어.”

“난 한번 이혼했는데 너는?

“아니, 아직 적합한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직장 다니며 돈 모아 이 아파트를 사고 모기지도 다 끝냈어. 그러느라고 괜찮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고.”

“너 좋은 직장에 아파트도 소유했겠다. 인물도 그만하면 여자가 많을 텐데.”

“나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에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야. 잘못된 여자와 엮여 결혼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여자 친구는?”

“거의 3년 동안 사귀지 않았어.”


요리가 취미라는 에이든의 말대로 마야가 들고 간 와잇 와인과 그가 만든 안초비 파스타는 꽤 맛이 있었다. 상을 물리고 둘은 카우치에 앉았다. 에이든은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를 틀었다. 긴장한 마야의 몸을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가 카우치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에이든이 마야 가까이 다가앉았다. 

“너도 나처럼 컴퓨터에 매달려 일하느라 목덜미가 뻣뻣하네. 내가 마사지 해줄게.” 

에이든은 마야의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카락이 꽤 부드럽네. 나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좋아해.”

마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키스하려고 했다. 마야도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 입을 맞추려다가 멈췄다. 그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에이든의 시선이 마야의 다리로 옮겨 갔다.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손이 점점 치마를 들추고 위로 올라왔다. 마야는 몸이 달아올랐다. 그냥 그에게 몸을 맡길까?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 할까? 갈등이 충돌하다가 과거 남자들도 같은 수법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마야가 뒤로 몸을 빼다가 카우치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가 잡아주려고 하는 것을 밀어내고 몸을 곧추 세우고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물었다.

“그동안 많은 여자를 사겼겠네. 어떤 여자들이야?” 

에이든도 떨어져 앉으며 더는 마야를 터치하지 않았다. 사귄 여자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마야는 에이든이 플레이보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내일 엄마가 캘리포니아에서 오기 때문에, 집에 일찍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야 해.”


일주일 후 금요일 4시쯤에 마야는 에이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집에서 한잔하지 않을래?”

또 집으로 오라는 그의 말을 듣자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야가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저녁 먹고 지난번 그 술집에서 만나자. 싸고 좋던데.”

에이든은 창문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마야가 길 건너오는 것을 지켜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 수틀에 올라앉았다. 화장실 쪽으로 나이 많은 여윈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삶에 지친 슬픈 눈이다. 천장에 매달린 둥근 등 가느다란 불빛이 그의 광대뼈를 돋보이며 고독감을 더욱 드러냈다. 마야는 에이든을 잡지 못하면 저 노인처럼 한 잔의 술을 놓고 시간을 보내겠지? 그때 에이든의 손이 마야의 무릎을 더듬었다. 마야는 와인을 시키고 에이든은 맥주를 시켰다. 먼저 날과는 다르게 천천히 한 잔만 들이킨 후 마야의 잔이 비자 에이든이 나가자고 했다. 바텐더가 빌을 가져왔다. 에이든은 돈 낼 생각을 하지 않고 한동안 빌을 들여다봤다. 마야가 자기 몫인 10불짜리를 테이블 위에 놓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따라 나와 함께 걸었다. 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마야에게 묻지 않고 자기 아파트 방향으로 걸었다. 마야는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걸었다. 그의 아파트로 가는 골목에서 그가 마야를 빤히 쳐다봤다. 마야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섬광처럼 마야의 눈과 마주쳤다.  재빨리 돌아선 마야는 다시 뒤 돌아 그를 봤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라졌다. 그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는 순간 무서운 광경을 본 것처럼 몸이 오싹했다.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넣고 찻길을 건너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 후 3주 동안 에이든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마야는 연락하고 싶었지만, 예전의 불행을 반복할 것 같은 직감이 그녀의 충동을 억눌렀다.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 금요일에 에이든이 문메시지 했다. 

“우리 집으로 올래?” 

“그러지 말고 이따 저녁 먹고 공원으로 나와. 운동도 할 겸 걷자.”

에이든은 공원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 가는 몸매의 매력적인 39세, 명문 비즈니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할 정도면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잠자리할 수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야가 미리 와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에이든이 엄숙한 표정으로 5분 늦게 나타나 옆에 앉았다. 마야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에이든이 그동안 사귄 여자들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전에 사귄 여자는 자기가 부르면 택시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달려와 자고 갔다는 둥,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6개월 동안 잠자리만 한 여자가 있다는 둥, 와잇, 블랙 그리고 아시안 등등 다 사궈봤다는 둥, 여자들에게 자기가 먼저 자자고 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마야는 이 남자가 왜 과거 여자들이 매달렸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자기에게도 그 예전 여자처럼 하라는 건가? 생각하는데 녹색 야광 목걸이를 한 골든두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하이’ 하고 쓰다듬자, 강아지가 빨리 집에 가서 자라는 시늉인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주인에게 달려갔다.  

“벌써 10시네. 집에 갈 시간이다.” 


그 후 에이든은 마야의 무반응에 애가 타는지 문자메시지를 자주 했다. 마야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에이든과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이 섹스에 관한 것이다. 마야도 한번 결혼 했고 성인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맞춰주다 보면 수위 높아졌다. 노골적으로 수위가 더 높아지면 마야는 어느 타임에 다른 화제로 돌릴까, 고민하다 돌려놓으면 또 그 자리로 유도하는 섹스 이야기에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대답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 멈추었다가 분위기가 나아지면 다시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두고 문자메시지만 하며 에이든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도 더는 자기 아파트로 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 꾸준히 문자메시지만 보냈다. 


직장 다니고 돈만 모으며 외롭게 혼자 산 세월이 꽤 되는 마야는 왠지 에이든을 내치기에는 아까운 느낌이랄까? 너무 외로워서 남자에게 기대고 싶은 심리랄까? 더는 남자에게 차이지 않고 진지한 만남으로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직감이 느껴지면서도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의 약함이 싫었다.


친구 아이린에게 전화했다. 

“에이든이란 사람 서너 번 만났는데 어떤 사람이야? 통 감이 오지 않아서 내가 한동안 남자를 만나지 않고 지냈더니 심리를 잘 모르겠어.”

“일하는 부서가 달라서 잘 모르지만, 아마 예전에 그가 일하는 옆 부서에 있던 차이니스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여자 잘 아는 사이야?”

몇 번 인사는 나눈 적은 있어. 그 소문이 난 얼마 후 그 여자는 다른 직장으로 옮겼어. 직장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 여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알아볼게.” 


며칠 후 아이린에게 연락이 왔다. 

“글쎄 에이든이 그 차이니스 동료를 12년에 전에 회사 회식에서 만나 그냥저냥 직장 동료로 지내다 5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귀었데.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잠자리만 하다가 헤어졌다네. 그 여자가 사랑 타령하며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를 서너 번 반복하자 그녀도 지쳐서 직장도 옮기고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났데. 그 여자 말로는 자기와 사귀면서도 에이든이 주말에는 여자 쇼핑을 다니고 몸매가 그럴싸한 여자만 보면 유혹해서 잠자리했다는구나. 자기와 사귀기 전에도 마켓에서 일하는 흑인 여자와도. 미국에 출장 온 일본 여자, 방문 중인 아시안 여자 등등 접근해서는.”

“아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때문에 여자들과 밖에서 만나 식사하는 것을 꺼려서일지도 몰라. 여러 번 위험한 상황으로 죽을 뻔했다던데.”

“아 그렇지 않아도 그 피넛 버터 이야기도 그녀가 했는데. 식당에서 밥 먹기가 위험하다. 여행도 꺼려진다 등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라는 거야. 밖에서 데이트하며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 않아 만들어 낸 구실이라는 거지. 아파트로 늦은 밤에 불러 잠자리만 하고 이른 아침에 헤어지는 수법을 쓴다는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취약한 여자들 흑인 아시안 등을 헌팅해서는 유혹하는, 결국엔 여자들의 몸만을 노린다는 거지.”


“어머머! 미친놈. 직장과 돈이 없다면 모를까? 그것도 이혼한 여자나 취약한 외국에서 갓 온 아시안이나 블랙만을 상대하며 등쳐먹으려 하다니. 그렇게 살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온다고. 아니 피넛 버터 알레르기 발상은 또 뭐야.”

“그거야 외국에서 온 여자들이 혹시나 영주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약점을 겨냥하며 데이트 비용 안 쓰고 잠자리만 하려는 속셈이지. 나름대로 잔머리 굴려 만들어 낸 수작이겠지.”

“세상에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아니 왜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하며 살고 싶을까?”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그 또라이들의 깊은 어두운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니.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아이린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야는 미친놈.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치사한 놈. 되뇌면서도 에이든의 문자메시지를 기다렸다. 문자메시지 소리가 울릴 때마다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다 심장에서 막힌 듯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확인하곤 했다. 

“Hi,”

에이든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손이 떨리고 열이 났다.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또 왔다. 

“Are you ok?”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는 꽉 움켜쥔 손에 든 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Are You ok? 다음에 뭔가 더 쓰여있지 않나를 확인하듯 서너 번을 읽은 후 문자메시지를 지웠다. 마야는 손톱을 잡아 뜯다가 빨간 매니큐어를 꺼내 들었다. 러그에 앉아 발톱에 조심스럽게 칠했다. 손이 떨려 붉은색이 발톱 주위로 번졌다. 그 위에 덧칠했다. 더 번졌다.

막이 내리다

“많은 한인이 사기꾼이니 엮이지 않게 조심해요. 한국인은 쓸데없이 정이 많아요. 정서가 어떻고, 정체성이 어떻고 하는 소리 촌스러워 듣기 싫어요.” 한국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아에게 이정은 말했다. 도아는 이정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