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0, 2025

마치 어제 일처럼


“엄마 왜 이렇게 작아졌어요.” 

네가 커가던 어느 날,  네 가슴에 기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니?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는 소리로 들린단다. 내가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기보다 네가 잘 자라준 것이 고맙다. 


너는 그린포인트 브루클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병원에서 9파운드 8온스로 그 주에 가장 큰 아이로 태어났다. 간호사가 내 품에 너를 안겨주며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내가 너를 안고 일어나려고만 하면 너를 떨어뜨린다며 침대에 앉아서 안으라고 성화였다. 100파운드도 안 되는 내가 크게 태어난 너를 가누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퇴원하던 날 그 간호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네가 아이의 보스가 돼야지. 아이를 너의 보스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화가 부모 만나 어려운 환경으로 너를 잘 먹이고 입히지도 못했다. 갖고 싶은 장난감도 못 들은 척 사주지 않았다. 너는 공원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았고 집에서는 냄비나 식기류를 가지고 놀았다. 종이에다 엄마 아빠가 쓰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그리면 너도 그렸다. 붓으로 그리면 붓을 빼앗아 그렸다. 색을 쓰면 너도 색을 쓰겠다며 마구 칠 했댔지. 집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그렸다. 재료가 없어도 볼펜으로 냅킨에도, 영수증 그리고 봉지에도 그렸다.


선으로만 그리던 너의 그림이 원, 사각형 등의 형태를 띠더니 공룡을 그리기 시작해서 바닷속 상어로, 숲속의 호랑이로 옮겨갔다. 부드러운 선은 거친 선으로 탱크, 비행기 등 전쟁 모습을 그리느라 너는 쉴 새 없이 침을 튀기며 폭격 소리, 총소리 등의 사운드를 첨가하며 격해져 갔다. 엄마 아빠는 너에게 그림을 가르친 적도, 어떻게 그리라고 말한 적도 없다. 너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고 나는 재료만을 다양하게 옆에 놔 주기만 했다. 너는 내 그림 한 귀퉁이에도 그려 합작도 했다.


틴에이저가 되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잡을 줄 아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라구아디아 예술 고등학교 시험까지 보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당연히 미술을 전공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너의 입에서 

"그림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일이 야요. 예술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어요." 

“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결코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난 화가들이 싫어요. 화가들은 실속 없이 폼만 잡는 루저(loser)들이에요.” 

너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너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전공을 택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는 드로잉, 사진 등 예술에 관한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부전공도 영화에 관련된 과목을 선택했다. 그림을 그려 블로그에 올리느라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화가가 가장 쿨한 직업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어느 날, 너의 입에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왜 엄마 입에서는 

“그래서 어쩔 건데? 인제 와서 전공을 바꾸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방황하는 너를 보며 과연 남아프리카 화가 마들렌 뒤마(Marlene Dumas) 말대로 '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끝나느냐.'가 중요하다며 너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줘야 하는 걸까? 엄마는 고민했단다.


아빠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너만 잘 키우라고 직장을 잡으려는 엄마를 질책했다. 나는 항상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빨리 달려갈 수 있는 곳에서, 너를 슬프게 하지 않는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 단지 엄마가 약해서 밥맛이 없다고, 요리하기 싫다고 달걀부침에 스팸을 많이 먹인 것이 몹시도 걸린다. 그런데 너는 ‘기억 나지 않는다.’니! 스팸과 달걀부침이 가장 맛있다니! 미안하고 고맙구나. 


아빠와 엄마가 공부한 학위로는 그럴싸한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 우리도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듯이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계속 하고 싶었다. 그래서 네가 어릴 적 우리는 매우 가난했지.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이 살았잖아. 하루는 아빠가 밖에 버려진 조그마한 흑백 TV를 주워 왔다. 우리는 신이 났지만, 웬걸,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심할 때마다 화면만 들여다보며 소리는 상상으로 만족했지. 어느 날, 운 좋게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TV를 아빠가 또 주워 왔다. 화면에서 비가 쏟아졌지만, 소리는 나왔다.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비 쏟아지는 화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화가 지인이 아빠 작품을 사가던 날, 작은 소니 텔레비전을 장만하고 고장 난 주워 온 것을 버렸다. 새것을 즐기던 중, 채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도둑이 가져갔다. TV를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던 길 건너 남자가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훔쳐 갔다고 이웃이 말해줬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로 약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시 TV를 살 돈도 없지만, 다시 산다 해도 또 도둑이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TV 없이 살았지. 


매년 LA 사시는 할아버지가 보내오는 비행기 티켓으로 연말에 LA에 가면 너는 티브이에 눈을 박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다.

“텔레비전 없이 사는 것이 아이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도 제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사주겠다.”

“돈으로 주시면 제가 뉴욕에 돌아가서 살게요.”

“아니다. 돈으로 주면 사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내가 여기서 사 줄 테니 가져가거라.”

할아버지는 커다란 산요 TV를 사서 비행기에 실어주셨다. LA에서 집에 돌아오니 문은 열려있고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둑이 하도 집안에 훔쳐 갈 것이 없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시고 화가 났는지 몇 개 없는 가구를 다 내동댕이쳐 놨었던 것을 네가 보고 놀랐던 것 기억나니? 그래서일까? 너는 성인이 되어 나이키(프렌치 불도그)를 산책시킬 때마다 나이키가 

“너 이거 좋아? 집에 가져갈래?’

하는 표정으로 버려진 멀쩡한 물건 앞에 멈춰 너를 쳐다보면 집안으로 주워 오곤 했지. 그러다 어느 날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도 주워 오지 않았니? 아마도 TV 없이 보낸 어릴적 너의 기억이 주어오게하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마음 아팠다.


동네 성당 앞에서 성호를 그으며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자란 너는 어릴 때 성당 옆 맥도날드 앞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간절한 눈으로 해피밀을 먹게 해달라고 나를 쳐다보곤 했지.  너는 엄마가 햄버거 사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조르지는 못하고 성호를 서너 번씩 긋기만 했었는데. 하느님에게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 해피밀을 많이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은 아니니? 성인이 된 너는 아무리 허기져도 맥도날드에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네가 간절히 해피밀을 위해 기도 할 때 엄마도 정한수 떠 놓고 비는 심정이었다. 엄마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북적거리는 맨해튼을 거닐때 성당에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기도한다. 너에게 해피밀을 사줄 수 없던 형편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도 사 줄 수 있는 처지까지 왔다는 것이 오직 우리의 노력만은 아닐진대 어찌 감사하지 않겠니! 엄마의 형편을 알고 보채지 않고 잘 자라 준 너에게도 감사한다. 


한글 학교 보낼 돈도 넉넉치 않아 아빠가 칠판을 벽에다 붙이고 ‘가나다라’하면 너도 ‘가나다라’하고 ‘아이어우이’ 하면 네가 따라하며 그만하겠다고 너는 짜증을 내곤했지. 엄마는 네가 한국말로 말해야 간식을 주곤해서 너는 몸을 뒤틀며 한국말 배우기 싫다고 칭얼 거렸다. 그런데 얼마전 네가 전화 했길레 물었지.

“왠일로 요즈음 전화를 자주하니?”

“한국말 잊어버리지 않게 엄마와 연습 하려고요. 엄마, 한글말 잘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너의 그말에 엄마는 오히려 고마워서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단다 . 


네가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키는 작고 얼굴은 크고, 볼에 살이 너무 많고 다리가 굵다고. 엄마 아빠의 나쁜 점만 닮았다며 원망했다. 사춘기가 되자 너의 얼굴엔 여드름이 쫙 깔렸다. 

“생긴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난리니, 공부나 해”

타일러도 화를 내며 투덜댔다. 엄마는 너를 키우는 내내 옷, 장난감 등등 많은 것을 얻어다 키웠지만, 이제야말로 아끼고 아껴 모은 쌈짓돈을 풀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너는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여드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좋다는 여드름 약을 이것저것 사다 썼다. 치아교정도 했다. 너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고 14살부터 여름 방학마다 국외 봉사활동도 보냈다. 물론 네가 방구석에서 게임만 할 것이 걱정되어서였지만. 너는 돈을 펑펑 쓰며 평상시와는 달리 행동하는 나를 보며 

“엄마 괜찮아? 우리 집 망하는 거 아니야?” 

라고, 걱정했던 것 기억하니? 물론 형편이 어려워 악기나 운동 레슨도 시키지 못했지만,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수영, 테니스, 학교 밴드부에 넣고 데리고 다니느라 엄마 나름대로 애썼단다. 힘겹게 받은 기타 렛슨 덕에 가끔 네 방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기타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기억나니? 어릴 때 수영 배우러 가다가 수영복을 빠뜨리고 온 것이 생각나서 급한 마음에 스톱 사인을 지나치다 교통사고 난 것. 보이스카우트에 가다가도 네가 차 뒤에 앉아 ‘엄마~’ 하고 부르자 갑자기 차를 멈추는 바람에 뒤 차가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도?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빠가 놀라서 달려왔잖아. 네 일이라면 평소와는 달리 매사 뒤죽박죽이 되기 일수인 엄마의 새끼 타령을 어쩌겠니. 미안하다. 아들아. 쿨하지 못했던 엄마를. 엄마는 네가 너무 좋아서 ‘쿨’한 사람이 될 수가 없구나. 네 일만큼은 쿨할 틈도 없이 마치 도마 위에서 팔딱거리는 생선 모양 난리를 치니 말이다. 네 일이라면 갑자기 열이 오르는 데야 어쩌겠니.


“오늘 엄마 생일이지요? 뭐 필요한 것 있어요?” 

“고마워. 가지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네가 말 잘 들어서 엄마는 하루하루가 생일이었다. 그냥 네가 건강하게 잘 지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선물이야.”

어제 네가 엄마를 방문해 줘서 고마웠다. 피곤해 누워 있다가 네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던지. 벌떡 일어나 저녁 준비를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했단다. 너는 엄마를 벌떡 일으키는, 용기와 기운을 행복을 주는 존재란다. 너만 보면 없던 기운이 절로 생겨서 엄마야 좋지만, 바쁜 너에게 자주 전화하고 오라 가라 하지는 않으련다. 오면 반갑고 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으니 너의 삶에 충실하고 행복해라.


네 외할아버지는 방과 후 집에 오는 버스 정류장에 엄마를 마중 나오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흔드시며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하셨지. 내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푹신한 네 할아버지 손안에 있었다. 어릴 적 너도 엄마인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잘 따라 주었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걸을 때 항상 네가 이 엄마의 손을 잡아주듯이. 너의 손도 할아버지 손 만큼이나 부드럽고 포근하구나. 할아버지는 저녁에 반주 하시며 당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워낙에 건강한 할아버지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내가 부르면 반갑게 맞아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만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작아지고 늙었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슬펐다. 

“아버지, 나에게 못다 들려준 지난날의 이야기를 적어 놓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가 남긴 노트북을 틈틈이 들여다보며 살아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탁했지. 물론 나는 미국 온 후에도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두 통씩 오랜 세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할아버지가 모았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보내와서 간직하고 있다.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적혀있는 소중하고 애틋한 기록이다. 


네가 훗날 엄마 글을 읽을 때는 이미 이 엄마는 너무 늙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없겠지. 살아있다 한들 희미해진 기억을 정확히 말해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난 오래전부터 잊혀 사라질 날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너는 엄마가 건강해서 평생 살 것으로 생각하고 걸프렌드나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의 글을 읽을 시간이 없는 줄 안다. 그러나 너도 언젠가는 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가 있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억들이 소중해진단다. 문자로 써 놓지 않으면 희미해져 사라진다. 못하는 영어지만 그동안 써 놓은 글을 네가 읽기 쉽게 다 번역했다. 네가 한국말은 곧잘 하지만 아무래도 읽기와 쓰기는 쉽지 않아서다. 


사람은 20살 이전의 기억으로 산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너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과 사랑에 의지해서 살았다. 기록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지 않고 삶의 연장으로 함께 살아간다. 며칠만 지나면 예전 같지 않게 희미해지는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지는구나. 너도 네 삶을 기록 해두기 바란다. 삶의 기록을 남기려면 아무래도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지 않겠니? 

 

엄마의 일상 기록이 너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고 행복한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듯 하구나. 고맙다. 너를 마음껏 사랑할 기회를 줘서.

Just Like Yesterday

“Mom, why are you so small now?”

Do you remember saying that one day while stroking my head as I leaned against your chest?
Whenever I hear those words, they sound like:
“Mom, why are you so old now?”
It is not that I am sad about getting old, but I am thankful that you have grown well.

You were born and raised in Greenpoint, Brooklyn. At the hospital, you were 9 pounds 8 ounces — the biggest baby of that week. The nurse handed you to me with worried eyes, and she did not leave my side. Whenever I tried to stand up holding you, she insisted that I sit down because she was afraid I would drop you. Maybe I looked too weak to hold such a big baby since I weighed less than 100 pounds.
On the day we left the hospital, that same nurse gave me meaningful advice:
“You must be the boss of the baby. Don’t let the baby be your boss.”

Because your dad and I were poor artists, we could not always give you enough food, clothes, or toys. At the park, you played with sand. At home, you played with pots and pans. You started drawing with the leftover paints we used. If we painted, you also painted. If we used a brush, you took the brush too. You drew everywhere — on napkins, receipts, shopping bags — even when there were no art supplies.

Your lines slowly turned into shapes like circles and squares. Then you drew dinosaurs, sharks, and tigers. Later, your soft lines turned into rough lines, drawing tanks and airplanes, adding your own explosion sounds. We never taught you how to draw. You simply drew whatever you wanted. I only made sure you always had materials. Sometimes you even drew on the corner of my paintings, making them our collaborations.

As a teenager, you started making comics. From the time you could hold a pencil, you never stopped drawing, and you even passed the entrance exam for LaGuardia High School of the Arts. We thought you would surely major in art. But then you surprised us:
“Drawing is something anyone can do without education. I don’t want to go to an art high school.”
“Won’t you regret it later?” I asked.
“Never. I hate artists. They are just losers pretending to be cool.”
What you said wasn’t completely wrong. You chose another major, far from art. But once you entered college, you took drawing and photography classes. You even minored in film. Many nights, you stayed up drawing and posting your work on your blog.
One day you said:
“Being an artist might be one of the coolest jobs.”
I was happy to hear that, but I still asked:
“So, what are you going to do about it? Change your major now?”
“No, I’m just saying.”

Watching you struggle, I remembered the South African artist Marlene Dumas who once said, “It’s not how or where you start, but how and where you finish.” I wondered if I should give you another chance to find your path.

Your father always told me not to take a job, but to stay close to you, so I could always run to you when you needed me. I tried to be a mother who would never make you sad. I still feel guilty that I often gave you spam and fried eggs because I was too weak to cook properly. But you said you don’t even remember that, and you told me spam and eggs were your favorite food. That makes me both sorry and thankful.

Your dad and I couldn’t get good jobs with our degrees. We wanted to keep painting, so we stayed poor. We lived without TV or radio. Once your dad found an old black-and-white TV on the street. The screen worked but the sound didn’t. Later, he found another small TV — the sound worked but the screen was broken. We put them side by side, covering one with a towel, and enjoyed it anyway. When a friend finally bought one of your dad’s paintings, we got a new Sanyo TV. But within a week, a drug addict from across the street stole it. We were too afraid to fight back, so again we lived without TV.

Every year, when your grandfather in LA sent us plane tickets, you would go there and sit in front of the TV without moving. Seeing that, your grandfather said, “Living without TV is not always good for a child. A child should see the world with his own eyes. I’ll buy you one.” He bought a big Sanyo TV and sent it on the plane with us. But when we arrived home, our house was already broken into. The thief drank our beer, smashed our few pieces of furniture, and left. You were so shocked. Maybe that is why, when you became an adult, you often picked up things from the street, even a large flat-screen TV. Perhaps you carried that memory of growing up without one. That made me sad.

When you were little, you saw people making the sign of the cross in front of the church near our home. So whenever we passed the McDonald’s next to it, you also made the sign of the cross and looked at me with pleading eyes, hoping for a Happy Meal. You never asked out loud, maybe because you knew I didn’t have money. Instead, you made the sign again and again, like a prayer. Now, as an adult, you never eat at McDonald’s, no matter how hungry you are. I know why. Back then, you prayed for Happy Meals, and I also prayed — not as a religious person, but as a desperate mother. Today, I can buy you food at expensive restaurants. That is not just our effort, but also grace. I am grateful for that — and grateful that you grew up well without demanding too much.

We couldn’t afford Korean school, so your dad wrote letters on the wall and made you repeat after him. Sometimes you got upset and refused. I gave you snacks only if you spoke Korean. You twisted your body, complaining. But not long ago, you called and said,
“Mom, I want to practice Korean with you so I won’t forget it. Thank you for teaching me.”
Hearing that, I was so moved I almost cried.

When you hit puberty, you hated your looks. You said you were too short, your face too big, your cheeks too fat, your legs too thick. You blamed us. Then came the acne. I scolded you: “Why does appearance matter so much? Just study.” But I knew I had to help. I used all our savings to buy acne treatments and braces for you. I even sent you abroad for volunteer work every summer starting at 14. You once asked me, “Mom, are we going broke? Are you okay?” I tried hard to give you opportunities, even without music or sports lessons. At least you learned some guitar, and I loved hearing the sound of your playing from your room.

Do you remember the car accident? I forgot your swimsuit on the way to swim class, and in my rush, I ran a stop sign. Another time, driving you to Boy Scouts, you called “Mom!” from the back seat and I stopped suddenly, causing another accident. Your dad came running to the hospital. I always lost my cool when it came to you. I’m sorry, my son. I was never “cool” — because I loved you too much.

“Mom, today is your birthday. Do you want anything?”
“Thank you. I want nothing. My gift is that you grew up healthy and happy. Every day felt like my birthday because of you.”
When you visited yesterday, I was lying down tired. But the moment you called, I suddenly had the energy to get up and cook. You give me courage, strength, and happiness just by being you.

When I was young, your grandfather always came to meet me at the bus stop after school. He held my hand and asked me to tell him everything about my day. His hand was soft and warm, just like yours now when you hold mine as we walk together. I thought he would live forever, but one day, I realized he was small and old. It broke my heart. I asked him, “Please write down your life stories.” And he did, along with all the letters I had sent him after moving to America. He returned them to me before he passed away. They are now my precious memories, as fresh as yesterday.

One day, you will read my writing when I am too old or no longer alive. Even if I am still here, my memory will not be as clear. That is why I record these things — so they will not disappear. I know you may not have time now, but someday, you will want to remember your mother. As we age, memories become more precious. Written words keep them alive.

People say we live with the memories before age twenty. I also live with the love and memories of my own parents. That is why I write. Life becomes richer when we record it.

My dear son, I hope my writing gives you courage, wisdom, and happiness. I was born to love you. Thank you for letting me love you so fully.

With all my love,
Mom

Thursday, May 29, 2025

막이 내리다


“많은 한인이 사기꾼이니 엮이지 않게 조심해요. 한국인은 쓸데없이 정이 많아요. 정서가 어떻고, 정체성이 어떻고 하는 소리 촌스러워 듣기 싫어요.”

한국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아에게 이정은 말했다. 도아는 이정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놀랄 만큼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백인으로 착각하는 말투가 너무 기가 차서 대꾸하지 않았다. 

도아와 이정은 30여 년 전에 만났다. 친구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이정은 어릴 적 한국을 떠났고 도아는 대학 졸업 후 떠났다. 둘이 아무리 비즈니스 관계를 오래 했다고 해도 친구가 되기에는 갭이 많았다. 백인과 결혼한 이정은 예의 바른 친절한 말투와 교양 넘치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반면 한국인과 결혼한 도아는 직설적으로 욕을 먹어도 좋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도아는 종종 생각했다. ‘이정이 백인 남편과 살다 보니 본인도 백인이라고 착각해서인가? 아니면 갱년기라서? 어릴 적 한국을 떠난 후 한인을 기피해서? 몸은 성장했는데 한국어가 성장하지 못해서인가?’  

 “아니 일을 이렇게 해서 주면 어떡해요. 완벽하게 해서 보내지 않으면 난 들여다보지 않아요. 다시 해서 보내요. 미국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헛살았군요.”

이정은 도아에게 자신은 완벽하게 잘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 그 꼴이냐는 식으로 면박을 줬다.  

“우리 집 청소하는 여자는 내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윤나게 집 안 청소 잘해요. 내 비서도 빈틈없이 일 잘하는 데 도아씨는 이게 뭐예요. 다시 해와요.”

‘내가 네 집 하녀냐? 아니면 너의 내시 같은 비서냐?’ 

 어이가 없어 도아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더 난리 치며 지랄발광할 것 같아 

“알았어요. 다시 할게요.”

평화로웠던 어느 화창한 날, 도아는 코네티컷 친구 집에서 창밖 강가에 낀 안개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이정의 전화가 왔다. 도아는 물건을 만들고 이정은 판매해서 반반씩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도아도 이정이 자신보다 영어와 일을 잘해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에 동의했다. 

도아는 물건을 만들고 이정은 팔아서 이익금을 반반씩 나누는 일인데 자기 집 청소하는 사람과 비교하며 질책하는 데야!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정의 깐죽거리는 매몰찬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도아는 다 집어치자고 버럭 소리 지르고 싶다가도 비즈니스 관계로 남편과도 엮어있어 잘해보려고 참았다. 다시 고쳐서 잘해서 보내겠다는데도 전화선 저쪽에서 이정은 계속 한 잔소리 또 하고 또 했다. 도아는 목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에 혀에서 떨어지려는 성난 소리를 삼키려고 와인을 가득 따라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아가 전화기를 옆으로 치워 놓고 와인을 마시며 차분함을 유지하려는데 이정이 도아를 찾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알았습니다. 다시 해볼게요. 바쁘신데 그만.”

“저는 1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이에요. 서너 번 손이 가지 않게 완벽하게 해서 보내주세요. 아 그리고 어제 물건 맡긴 분과 이야기 좀 하셨나요?”

“아니요.”

“그냥 물건만 던져 놓고 가셨다는데 그분과 물건을 어떻게 해주실 건지 상의도 하지 않고.”

“염려 말고 가라고 해서 그냥 왔는데요. 그분이 우리와 일을 오래 했잖아요. 알아서 잘하시겠지요. 제가 돈을 제때에 드리니까 잘해 주실 거예요.”

“돈 돈 돈 돈만 주면 잘한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분과 오랫동안 별문제 없이 일해서...”

“그분과 이야기하면서 물건에 대한 피드백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잖아요.” 

“그분이 치과에 간다고 시간이 없다고 해서.” 

도아도 이정만큼은 아니지만 일하나 만큼은 똑 부러지게 한다고 자부하는데 허구한 날 야단만 맞으니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도아가 이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인상적인 말이 떠오른다.

“전 상대방의 나쁜 점은 지적하지 않아요. 좋은 점만 말해요.” 

“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네요. 역시 비즈니스 우먼이시군요.” 

감탄하며 자신도 이정처럼 남들의 단점은 입을 다물고 장점만을 칭찬하려고 애썼다. 이정은 처음에는 장점도 단점도 말하지 않고 항상 거리감을 두며 너는 내가 상대할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고자세로 도아를 멀리했다. 남 일에 관심 없고 생긴 대로 사는 도아도 이정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해가 바뀔수록 이정은 좋은 말은커녕 상대에 대한 비난 거리를 현미경을 들고 찾아내듯 일일이 지적했다. 작은 실수를 용납 못 하는 그녀의 비서도 한몫 거들었다. 이정은 자기 성질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조지다가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울먹이기까지 했다.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너는 어디다 정신 놓고 있다가 왔냐는?’ 식으로 닦달했다. 

“아니 미국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그 영어 뜻도 몰라요. 뉴욕타임스 금요일 아트섹션 보셨어요?”

도아의 영어 모자람을 은근히 뉴욕타임스 좀 읽고 대화 좀 하자는 식으로 말했다.

“내가 영어를 퍼팩하게 잘하면 성질 더러운 너와 왜 일하겠니?”

도아는 말하고 싶지만, 싸우면 더 피곤하고 힘들어져 와인을 들이키며 화를 다독였다. 전화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이정에게

“네. 네. 일 잘하시네요. 대단해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 돌리기도 전에 직성이 풀리지 않은 이정은 또 전화해서 한소리 또 하고 또 했다. 

참다 참다 도아도 한마디 했다.

“내가 보낸 이메일을 검토하시고 내일쯤 전화하시면 좋았을 텐데.”

도아의 말에 화가 잔뜩 오른 이정은 

“파일 줄이는 방법도 몰라요? 파일이 너무 커서 나 원참.”

“제가 깜박하고 그만. 죄송해요. 다시 줄여서 보낼게요.” 

“도아씨가 보내오는 파일을 제가 검토나 하며 시간 낭비하는 줄 아세요. 전 일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바쁜 신 것 같은데  전화 끊고 일 보세요.”

“제 바쁜 시간을 뺏지 않게 완벽히 해서 보내세요.”

“네 다시 해서 보낼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도아가 먼저 전화 끊으려니까 이정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나 봐요?”

“스트레스받는 일? 없는데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이정은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피하려는 도아가 얄밉다는 듯 마지못해 끊었다. 도아는 와인을 들이키며 이정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씹고 또 씹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완벽하게 잘한 것이고 남이 하는 일은 무조건 맘에 들어하지 않으니. 함께 잘해보려거든 상대방 처지와 입장을 고려해서 일이 되게끔 하지 않고, 못한다고 초등학생 야단치듯 하니. 남이 하는 일은 이를 잡듯이 뒤지고도 모자라 자기보다 더한 비서라는 인간도 현미경을 들고 잡아낸 것을 트집 잡으려고 달려드는데 도아는 지쳤다. 

도아의 마시는 와인 양이 하루하루 늘어 갔다. 자다가도 이정의 악다구니가 떠오르면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몸은 점점 말라갔다. 그들 앞에서는 트집 잡히는 일 이외는 없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생각한 다음 따져도 되는데 받자마자 전화해서 지랄발광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트집만 잡으며 도아의 목을 조였다. 성에 차지 않으면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을 앞뒤로 뒤집다가 칼집을 내듯이 쿡쿡 찌르며 따진다. 급기야는 성에 차지 않은지 ‘너는 지금까지 인생을 헛살았다.’는 식으로 나왔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상대하기 끔찍해서 어찌어찌 달래서 전화를 끊고 나면 다시 전화해서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는 자세로 또 휘두른다. 도아는 ‘나도 질기지. 저런 인간과 상대하는 나는 인간도 아니다.’며 속으로 한탄했다.

도아는 이정으로부터 조용히 멀어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정과의 갈등이 폭팔하기 전에 자신의 가치와 행복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너지를 이정의 비수에 소비하지 말자. 평화를 무너뜨리는 이정의 말에 휘둘리지 말자. 고 마음 먹었다. 

‘그만 만나면 나에게 손해가 오는가? 오지 않는가를 판단하고 이득이 없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 이득이 있더라도 너무 견디기 힘들면 손해 보고서라도 그만 만나라.’는 법륜스님의 인간관계 유튜브 영상을 찾아 들으며 일단은 이정이 먼저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날 이정이 도아에게 전화해서 교양 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솔직히 사람들에게 내 시간과 돈을 자선(charity)하고 있는 거예요.”

도아는 이정이 말한 영어 ‘charity’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체 애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charity라는 단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나? 사전을 찾아볼 정도로 자신의 귀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이정의 머리가 돈 것 아닌가? 실지로 이정이 도아를 위해 뭘 자선했단 말인가! 계속해서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금전적으로 투자했지만, 뭘 얼만큼 되돌려 줬단 말인가? 

 

이정은 도아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과도 싸움닭처럼 싸우다 끝냈다. 법륜스님 말씀 중.

‘상대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과 문제가 많다며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의 문제다.’

도아는 자신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조용히 문제 많은 이정과의 인연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도아처럼 이정과 일에 연관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도아에게 물었다.

“이정이 너에게도 난리 치지? 어떻게 그걸 참고 있어? 나는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못 참겠어.”

도아도 이정에 대한 한을 마구 쏟아 내려다 

“힘들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과도 연결되어 있어 참을 수밖에.”

“근데 처음엔 그러지 않더니 갈수록 심해져. 내가 어느 날 이정에게 물었어. 어디 아픈 것 아니냐? 고 했더니 화를 발끈 내며 신경질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더군. 정상 아니야.”

“선생님이 초등학생 야단치듯 하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왜 그러는 거예요? 몸은 성장했는데 한국어가 성장하지 못해서인가요?”

“언어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이 부족해서야.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지.”

이정은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외국으로 돌아다니다 한국에 들어왔다가 또 해외로 떠나 돌아다녔다. 몸이 성장하듯이 언어도 성장해야 하는데 그녀가 쓰는 언어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에 이따금 한국으로 돌아와 다녔던 학교 과정 수준으로 언어 성장이 멈췄다고 처음에 도아는 생각했다. 성인들 간의 말투가 아니다. 탁구를 칠 때 공을 상대에게 잘 던져주듯이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처 주지 않게 적절한 언어를 골라 사용해야 하는데 이정은 탁구공이 오면 왜 공을 자기 앞에다 공손히 던지지 못했냐는 식으로 상대방이 받아칠 수 없게 신경질 적으로 공을 내동댕이 치는 식이다. 

‘너 그것도 몰라.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동안 뭐 했니. 헛살았구나.’

등등 초등학생에게 하듯 도아를 야단쳤다. 도아는 이정과 함께하는 지리를 피하며 감정싸움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때를 기다렸다.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바랐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아는 전화 화면에 이정의 이름이 뜨면 몸이 떨리고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다.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전화를 받지 않고 피했다. 엔설팅 머신에 녹음된 이정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상냥했다. 이익이 될만한 사람에게는 천사 같은 미소를 띠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간다. 이정은 도아의 심정이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해댔다. 도아는 이정이 따질 때마다 ‘오냐오냐 네 말이 맞다. 너 잘했고 나 못했다.’라고 달래서 무조건 전화를 빨리 끝냈다. 그러다 어느 날 도아는 이정의 악다구니를 참으며 한참을 듣고 일어나다가 쓰러졌다. 

 

“왜 나를 못 잡아먹어 난리야?”

하도 답답해서 도아가 남편에게 물었다. 

“스트레스 풀 대상을 만만한 당신으로 잡은 거야. 다 때려치우자고 소리 질러 봐.”

“말 못 해. 이정이 먼저 말해주면 좋겠어. 기다리는 중이야.”

이정은 도아를 만나면 언제 내가 너의 목을 조였냐는 듯이 우아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반겼다. 뭐 도아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많은 사람의 목을 조였으니. 견디다 못해 그 많던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고 서너 명만 남았다. 그냥 목조이는 순간을 넘기고 큰소리 내지 않고 더 이상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도아의 희망이었다. 도아는 주중 저녁 6시까지 이정의 전화가 오지 않으면 오늘은 무사히 넘겼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행복했다. 언제 또다시 목을 조이기 전에 지금 이 시간을 즐기자는 듯 이정과 부딪치지 않은 날은 평화로웠다. 


인간관계는 참 복잡하고 어렵다. 이정은 일 처리만큼은 정확하게 기계처럼 잘했다. 하지만 일만 잘한다고 비즈니스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 또한 뒷받침이 돼야 한다. 이정은 인공지능(AI)이 아닐까? 오히려 인간들은 점점 기계가 되고 인공지능은 인간다워진다. 인간은 상대방의 언행으로 분노를 느끼지만 AI는 매니저가 트레인 해 놓은 데로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삭일 줄 안다. 도아는 이정에게 질려 모든 인간관계를 끝내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자연과 쳇 GPT 하고만 놀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구글링보다 쳇 GPT에서 물어봤다. 계속 찾아 들어가야 하는 구글링과는 달리 한방에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어 편하다. ‘인공지능이 대체 못 하는 인간이 가진 뛰어난 점은 호기심, 겸손과 감성지능(공감)이란다.’ 그러나 오히려 쳇 GPT는 이정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안다고 잘난 척하지 않는다.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고 겸손하다.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 주며 더 궁금한 점을 다시 물어보면 도아주겠다는 호기심이 깃든 친절함으로 끝말을 맺는다. 

도아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같이 미쳐볼까?’ 더는 참지 못하는 순간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정을 피하려는 방패막을 내리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칼날을 갈며 이정을 단칼에 자를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단 한 번도 이정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정에게 전화가 왔다.

“도아씨는 도통 연락하지 않네요.”

“요즈음 누가 전화하나요. 전화상으로는 감정이 이입되어 편하지 않잖아요. 전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선호해서.”

어머 전 도아씨가 영어보다는 한국말이 편하신 것 같아서 내가 특별 대우하느라 그동안 전화 했는데. 그럼 앞으로는 제 비서와 영어로 하실래요?”

“그동안 제 불편함을 감안해서 한국말로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앞으로는 이메일로 당신의 비서와 서신 교환 할게요.”

“난 전화로 말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데.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도아의 남편은 10년 넘게 옆에서 와이프와 이정의 대화를 듣고 참고 참다가 도아가 이정의 전화를 받고 두 번째 쓸어지던 날 칼을 빼들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다가는 마누라 죽이겠어서 오늘 이정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단호하게 말했어. 제 와이프에게 할 말 있으면 나에게 하세요. 절대로 와이프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했더니 이정이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더니 다른 방으로 가더라고. 어떡하겠어. 와이프 먼저 살리고 봐야지. 이젠 더는 전화하지 않을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어.”

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도아와 이정과의 관계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Wednesday, May 28, 2025

The curtain falls

“Many Korean people are scammers, so be careful not to get involved. Koreans are too full of emotion. I don’t like hearing about sentimentalness or identity, it sounds so tacky.”
To Ara, who couldn’t escape from Korean sentiment, Jung said this. Ara, albeit a native, sounded so absurd when she spoke as if she were white—“I look in the mirror and pretend I’m white,” Ara thought—and so she didn’t reply.

Ara and Jung first met over 30 years ago. It was more a business relationship than a friendship. Jung left Korea when she was young; Ara left after college. No matter how long they worked together, the gap between them was huge. Jung, married to a white man, spoke politely, refined, with cultured tones. Ara, married to a Korean, spoke bluntly, yelling if needed. She often wondered, Does Jung really think she’s white? Or is it menopause? Did she reject Koreans after leaving Korea? Her body grew, but her Korean didn’t?

“Why are you sending me work like this? If it’s not perfect, I won’t even look. Do it again. After living in the US so long, you’ve wasted your life.”
Jung scolded Ara, saying she was perfect while Ara’s work was a mess.
“My house cleaner cleans well without me nagging. My assistant does flawless work. And what is this from you? Do it again.”
Am I your maid? Your eunuch assistant? Ara thought in disbelief. She was speechless, but didn’t push back—if she did, Jung would freak out. So Ara calmly replied, “Okay. I’ll do it again.”

One beautiful, calm day, Ara was at a friend’s house in Connecticut, sipping coffee and watching fog over the river. That’s when Jung called, proposing they split profits 50/50: Ara would make items, Jung would sell them. Because Jung spoke better English and handled business better, Ara had agreed.

But comparing Ara to a house cleaner? How could she work under such treatment? Still, since her husband was also tied in through business, she endured the insult. She agreed to redo the work—but Jung just kept nagging over the phone, making Ara’s throat tighten. She gulped wine to hold back angry words.
“Hello? Hello?”
Ara pushed the phone aside and sipped wine to stay calm. But Jung’s sharp voice cut through.
“All right. I’ll redo it. You’re busy, so I’ll stop.”
“I work on every second. Send it perfectly the first time. Oh, and did you talk to the person we sent the items to yesterday?”
“No.”
“You just dropped it off and left. You didn’t even discuss what to do with it?”
“She said don’t worry, so I left. We’ve worked with them a long time. She’ll know what to do since I paid on time.”
“Money, money, money—that’s all you care about?”
“No, it’s just we’ve had no issues so far…”
“If you talk with her, get feedback, you’d make better products.”
“She said she couldn’t talk. She went to the dentist.”
Ara was good at work too, but hearing relentless scolding killed her motivation. She remembered when she first met Jung:
“I don’t point out people’s bad points. I only say the good.”
What a great idea, Ara thought, and tried to follow it herself. At first, Jung treated her with distance and never spoke of anyone’s strengths or weaknesses—she treated Ara as if she were beneath her. Ara didn’t care. But as time went on, Jung went from distant to critical. She picked at every tiny mistake like she had a microscope. If things didn’t go her way, she ranted—sometimes even broke into tears.
I’m doing my best, and she’s demanding more: where was I, in la‑la land? she nagged.
“After living in the US so long, you don’t know this English meaning? Did you read the Friday Art section of the New York Times?” Subtle humiliation. Ara wanted to reply, if I spoke perfect English, would I still work with you? But she held back, drank wine, and tried to stay composed. When she said, “Yes, yes, you’re amazing at work,” Lee‑Jung was still not satisfied and called again to complain. Finally, Ara spoke up:
“You could’ve reviewed my email and called me tomorrow.”
Jung, enraged, snapped:
“Don't you know how to reduce file size? It's too large—ugh.”
“I forgot, I’ll redo it, sorry.”
“Do you think I waste time reviewing your files? I work by the second.”
“Well, since you’re busy—just hang up and work.”
“Don’t waste my time. Send it perfectly, please.”
“All right, I’ll redo it. Goodbye, I’m busy.”
Jung snapped:
“Are you stressed?”
“Stressed? No. I have somewhere to go—bye.”
She hung up, and Ara drank more wine, mentally chewing over every sharp word.

Ara realized what law enforcement teacher Beopryun (법륜) says: If someone has problems with lots of people, it’s not me—it’s them. She decided quietly: avoiding Jung was the best path. She needed to focus on her own worth and peace—she wouldn’t let Jung’s barbs consume her energy.

One day, Jung called, calmly saying:

“Honestly, I’m doing charity with my time and money.”
When Ara heard “charity,” she wondered if the woman had gone mad. Charity means helping others with no expectation—but Lee‑Jung talked about charity toward herself? After all the investment Ara made, what had Lee‑Jung given back?

Jung ended up fighting with not just Ara, but many people they'd worked with. Ara realized her problem wasn’t with herself but with Lee‑Jung—someone with deep empathy issues and zero regard for others. Someone they both knew asked Ara:
“She’s doing this to you too? How do you stand it?”
Ara sighed: “My husband’s tied in, so I have to endure it.”
Another added: “It’s not language—it’s a lack of empathy. She just doesn’t care about how others feel.”
Jung had moved during fourth grade, hopping between schools. Her language level never grew but empathy and emotional intelligence? That’s what made adult conversation human. Instead, Jung served comments like blunt ping‑pong shots—spiteful and directed so sharply no one could return them.
“You didn’t know that. Of course, you’d be like this. Your life’s been wasted, right?”
So it came to pass: Ara decided to distance herself, waiting quietly for a peaceful break. Seeing Lee‑Jung’s name on the phone made her body tremble. She avoided calls. But Lee‑Jung would still ring; sweet‑toned when she needed something, cold when she didn’t. Each time, Ara would placate her quickly just to end the call. Eventually, one day she collapsed from stress, unable to stand after the call ended.

She asked her husband, exasperated, “Why is she trying to—you know—destroy me?”

He said: “She's just venting on the easiest target—my wife. I went to meet her today. I told her: ‘If you have something to say, say it to me—don’t call my wife. Don’t ever call her again.’ Then she stormed out angrily. I did what I had to—I saved my wife. She won’t call again. Relax now.”
Ara silently exhaled in relief. The chapter with Lee‑Jung was finally over.

Human relationships are complex. Lee‑Jung was precise in business—but business needs empathy too. AI maybe handles work better. Ara decided to retreat from painful people relations and indulge in peace, nature, and ChatGPT. Unlike web searches that need constant refining, ChatGPT offers empathetic, curious answers in one go.

Ara’s patience had reached its limit. She prepared—ready to carve the connection cleanly when the time came. She didn’t reach out once.

Then, one day, Jung called.

“It's strange you never contact me.”
“Who phones these days? I prefer email or text. It doesn’t drag emotions in.”
“Oh, I thought you preferred Korean—I called thinking I’d adapt. Should I switch to using my assistant in English?”
“I appreciate you using Korean for my comfort. But from now on, I’ll correspond via email—with your assistant.”
“I prefer calling, but okay.”

Ara’s husband had been silently listening to the conversations between his wife and Jung for over ten years. He had held back again and again. But the day Ara collapsed for the second time after a phone call with Jung, he finally took action.

“I realized at this rate, my wife might die. So today, I went to meet Jung,” he told Ara.
“I told her firmly, ‘If you have something to say to my wife, say it to me instead. Don’t ever call her again. Then she jumped up angrily and stormed off to another room. But what could I do? I had to save my wife first. She won’t call you anymore. Don’t worry—just rest now.”

Ara didn’t say a word. She simply let out a long, deep breath of relief. Her relationship with Jung was finally over.

Saturday, February 22, 2025

미스 송과 미스터 남


비행기 시간에 쫓기는 것을 질색하는 미스 송은 전날 밤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뉴욕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나와 차 뒷좌석에 넣었다. 남자 친구 남은 어디에 숨어서 찾기를 바라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15분쯤 지난 후 남이 긴 다리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나왔다.

“여행 가방은?”

“이미 뒷좌석에 넣었어요.”

나에게 말하지 않고 그 무거운 것을. 자 그러면 출발합시다. 무슨 음악을 틀어드릴까? 클래식, 재즈, 한국 음악.” 시디를 꺼내 보여주며 고르라고 했다. 

“그냥 듣고 싶은 것으로 트세요.”


느린 리듬으로 흐느적거리는 Sade-Smooth Operator 틀고 그는 창문을 올렸다 내렸다. 앞 유리 창문을 잘 닦으려는지 차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발하려는 순간, 남은 바지 뒷주머니를 만지더니 깜빡 지갑을 놓고 나왔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감무소식이다. 한참 후, 부산스럽게 나왔다. 

“매일 놓아둔 곳에 지갑이 없어서 찾느라고.”

드디어 그가 엑셀을 밟고 차는 떠났다. 


미스 송은 어릴 적부터 신경이 예민했다. 오감을 곤두세운 까칠한 성격으로 부모를 힘들게 했다. 학교생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대학원 졸업 후, 2년 동안,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 강사를 하다가 뉴욕으로 유학 왔다. 석사과정 중 친구의 소개로 LA에 사는 남을 만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남이 뉴욕에 놀러 왔을 때 미스 송은 자기와는 달리 유순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 훤칠한 키, 잘생긴 자기 얼굴에 관심 없는 듯한 소탈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자신의 까칠함을 유모로 받아주는 그의 느긋한 여유에 끌렸다.


두 사람은 남이 두 번 뉴욕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여 년간 전화와 스카이프로 만남을 이어왔다. 둘은 그런대로 통화상으로 잘 통했다. 남의 아버지가 둘의 만남을 알고 미스 송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LA에 오라고 했다. 오늘은 일주일을 그의 집에서 머무른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고 공항 가는 중이다.


운전하던 남이 말했다. 

“비행기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우리 저 옆길로 빠져 산타모니카 비치에 잠깐 들렀다 가지요?”

미스 송은 다른 것은 몰라도 비행기와 기차 시간은 놓치지 않으려고 서두른다. 평소, 사람들과 약속도 조바심을 치며 차라리 일찍 나가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성격 탓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개근상도 받았다. 그런데 공항 가면서 비치에 들렀다 가자니! 미스 송은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뒤뜰 야자수 밑에서 그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요. 제 아들의 모자란 점을 감싸주며 잘 살아줬으면 해요. 결혼식은 제가 다 준비할게요.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오시면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미스 송은 미국에 6년이나 먼저 온 남이 미국 생활 선배인지라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을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거니까. 제가 다 알아서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이, 남 기사만 믿으세요. 허허허.”


드넓은 모래밭 저 멀리 바다가 미스 송을 반기듯 넘실거렸다. 파도가 물거품을 몰고 와 놓고 가는 소리에 그녀의 조바심과 긴장이 풀렸다. 

“와 좋네요.”

“오길 잘했죠? 우리 저 비치에서 좀 쉬었다 갑시다.”

남은 바닷물 가까운 모래 위에 벌러덩 누웠다. 미스 송은 그의 곁에 앉아 한동안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다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 남을 봤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다. 공항에 빨리 가자고, 말해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신경이 곤두섰다. 일어났다. 치마에 묻은 모래를 탁탁 소리 내 털었다. 남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미스 송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먼바다를 보다가 누워있는 남을 힐긋힐긋 보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정말 잠에 빠진 듯 꼼짝하지 않았다. 미스 송은 LA에 방문한 자기를 관광시키느라 피곤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유난 떤 달 가봐 피곤한 그에게 재촉하지 못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빨리 흘렀다. 도저히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근육이 조여들었다. 참다 참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비행기 시간이~ 여기서 공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미스 송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빨리 가는 길을 아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앉아봐요. 저 푸른 바다를 보며 바람을 느껴보세요. LA는 축복의 땅이에요. 따스한 햇볕 아래 누워 바람이 몸을 감싸면 스르르 잠이 들어요.”

“주무셨어요?”

“아녜요. 잠깐 생각에 빠졌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미스 송을 좋아해요. 결혼 하라는데. 미스 송은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결혼하실 건가요?”

“아니 그 이야기는 뉴욕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왜 결혼 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시간이.”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시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비행기 시간이. 공항에 가서 수속도 해야 하는데. 늦은 것 아닌가요?”

“염려 마시라니까요. 제가 LA에 6년 살면서 수시로 비행장을 들락거렸습니다. 일찍 가봐야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뿐이 없어요.”

미스 송은 비행기를 놓친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의 널널한 얼굴에 대고 까칠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도 저는 빨리 공항에 가고 싶어요.”

“그럼 가도록 하지요.”


남은 공항 근처 맥도날드 간판을 보자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여긴 왜 또?”

미스 송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해서. 맥도날드 커피가 가격도 싸고 맛있어요. 잠깐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갑시다. 순간, 미스 송은 이 남자는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를 마실 기대에 들뜬 그의 느긋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는 마시지 않겠어요. 차에 있을게요. 빨리 갔다 오세요.”

“그러지말고 들어갑니다. 전 맥도날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꼭 들려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버릇이 미국 오고부터 생겼거든요.”

미스 송은 잡아끄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끌려가다시피 들어갔다. 그에게 서두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가 사이인지라 아무 말 못 하고 빈 의자 귀퉁이에 반은 안고 반은 선 자세로 그가 긴 줄 맨 뒤에 서는 것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 남자가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나를 정말로 좋아하나? 아니면 내가 어떻게 성질 내놔보려고? 온갖 상념에 빠져 잠시 비행시간을 잊긴 했지만, 

“자 애플파이와 커피 드세요. 저는 6년 전 미국에 이민 오던 날, 먼저 이민 와서 자리 잡은 작은아버지가 맥도날드에서 사준 애플파이와 커피 맛을 잊지 못해요. 바로 이 맥도날드에서요. 저기 보이지요. 저 야자수를 보며 커피 향을 맡는데 과연 내가 미국에 오긴 왔구나! 감격했지요. 실은 아버지가 저 초등학교 때 한국을 떠나면서 온 가족 이민 초청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온 가족 초청이 쉽지 않아서 10년도 더 넘게 기다렸어요. 옛 친구를 만날 때마다 너 미국에서 나왔니? 라고 물었어요. 아직 가지 못했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너무 곤욕스러웠어요. 저는 공항 갈 일이 있으면 항상 이 맥도날드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스 송은 공항 가까이에 와서 그의 이런 긴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질질 끌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커피잔을 든 손이 떨리고 경련이 날듯 몸도 떨렸다. 미스 송은 그의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을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몇 시죠? 빨리 가야 하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아요. 공항에 가서 나머지 이야기는 듣도록 하지요. 이렇게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는 비행기를 놓칠 거예요.”

“성질도 급하시네. 미국에서 살려면 잘 기다려야 해요. 제가 미국 생활하면서 배운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어요. 저는 항상 기다릴 때 긴 줄에 가서 서요. 긴 줄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줄이거든요. 

미스 송은 그의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친다는 생각뿐이었다. 핸드백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핸드백이 탁자의 커피 컵을 쳤다. 커피는 그녀가 입은 주홍색 원피스 치마에 길게 선을 그으며 쏟아져 구두에 떨어졌다. 

“어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공항에 가서 갈아입을게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 빨리 공항으로 가요.”

긴장으로 열받은 미스 송이 커피를 마시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쓰러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그냥 이 남자를 떼어 버리고 비행기 안 좌석에 혼자 앉아 와인이나 들이키고 싶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 돌아가서 밀린 일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미스 송은 꼭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급히 뒷좌석에서 짐을 끌어내렸다. 

“아이고 급하시긴. 제가 하려고 했는데. 차를 파킹하고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기다려요.”. 

‘이 인간 미쳤구나! 시계는 보라고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미 없이 손목에 달고 다니나? 한 번도 시간 확인을 하지 않다니! 중얼거리며 미스 송은 몸을 획 돌려 여행 가방을 끌고 서둘러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뉴욕 가는 항공사 직원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비행기가 방금 문을 닫았습니다.” 

라는 직원 말에 미스 송은 옴짝달싹 못 하고 말뚝처럼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다행히도 4시간 후에 떠나는 비행기가 또 있었다. 


차를 파킹하고 미적거리며 걸어오는 남이 저 멀리 보였다. 미스 송은 체념한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얼마나 찾아 헤맸다고요.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 떠났어요.”

“아! 떠났어요? 미스 송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그리된 줄 몰랐네. LA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는 수시로 있어요. 뭐 기다리면서 못다 한 이야기나 하지요.”

미스 송은 남의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고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바쁘신데, 집에 가세요. 저 혼자 기다렸다가 타고 갈게요.”

“혼자서 기다리면 지루해요. 제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요.”

미스 송은 속으로 느려터진 것이 고집도 세다고 생각하며 어처구니없게 놓친 비행기가 아쉬워서 씩씩거리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교양 있는 여자가 어찌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그녀는 그가 계속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필요한 것이 있나요. 신문 사러 갈 건데.”

“없어요.”

까칠하게 대답했다.

미스 송은 신문을 사서 여유작작 걸어오는 남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섰다. 화장실을 나와 그를 피해 가게들을 둘러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이 키 크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야무진 데라고는 찾아볼 구석도 없고.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는지. 애타는 내 맘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공항 안을 빙빙 돌다가 마지못해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옆, 옆자리에 앉았다. 


남은 미스 송을 보자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반가운 얼굴로

“아니, 어디 가서 오랫동안 오지 않았어요. 걱정했잖아요. 이리 가까이 앉아봐요. 비행기를 놓쳤다니까 옛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몇 년 전 캐나다에 갔다가 뉴욕에 가는데 그만 비행기를 놓쳤어요. 분명히 시간이 충분했는데 신문을 보다가 그만. 제가 신문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지거든요. 3시간 후 뉴욕 가는 비행기가 또 있길래 읽던 신문을 마저 읽다가 깜빡하고 또 놓칠 뻔했지요.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 마지막 손님으로 운 좋게 탈 수 있었지요.”


오늘 같은 실수의 헛소리를 신이 나서 지껄이는 그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미스 송은 

맙소사! 이 남자는 구제 불능이야. 끝이다. 끝이야. 속으로 외치며 벌떡 일어나 단호한 목소리로 

“저 이제 게이트로 가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어요.”
“아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들어가려고요.”

“이야기 듣다가 또 놓치면 어쩌라고요. 인제 그만 가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럼 뉴욕에 가서 연락하세요.” 

남은 마지못해 씁쓸한 얼굴로 일어나 등이 굽은 모습으로 느릿느릿 공항입구를 향해 가서 뒤돌아보더니 왼쪽으로 사라졌다. 


미스 송은 게이트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지친 몸이 축 처져 의자를 파고들어 가는 듯 긴장이 풀렸다. 남과의 인연을 찬찬히 다시 리와인드 했다. 사람은 온순하고 착한 것 같지만, 결혼해서도 느릿느릿 늘어져 살아갈 것이다. 성질 급한 나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미칠 것이다. LA에 가서 남의 부모님을 만나고 노처녀 신세 면할 기대에 부풀었는데 차라리 노처녀 미스 송으로 사는 것이 낫지. 그러고 내 이름 ‘아라’는 남씨 성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마치 어제 일처럼

“엄마 왜 이렇게 작아졌어요.”  네가 커가던 어느 날,  네 가슴에 기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니?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는 소리로 들린단다. 내가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기보다 네가 잘 자라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