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은 청의 참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에 관해 더 알고 싶어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와 마주치지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청이 퇴근할 즈음, 문 앞에 나가 동네 여자들과 수다를 떨며 청을 기다렸다. 청이 멀리서 오는 것을 주시하다가 린이 문을 열어주며 반가워서 장황하게 수다를 늘어놓으려는 순간, 청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층계를 바삐 올라갔다. '아, 왜 그러지 내가 너무 떠들어서 실망했나? 그래 맞아 애들에게, 이웃에게 소리를 질러 되니. 조심해야지.' 린은 평상시처럼 소리를 지르려다가도 아차 하며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멀리서부터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다가오고 그러다가는 어느 날은 갑자기 모른 척 스쳐 가는 청을 보고 린은 헷갈렸다. 드디어 린은 멀리서 오는 청을 보면 그녀의 기분을 빨리 파악해서 인사할까? 말까? 를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황당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떨어져 쌓인 붉은 잎 위에 첫눈이 풀풀 날리던 어느 날, 말이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여자의 쉰 소리다. 청의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다. 린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조와 청이 싸우다 청이 두들겨 맞으면 경찰을 부르려고 전화기를 들고 아파트 문을 조금 열고 귀 기울였다. 조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소리 지른 흔적이 없었던 것 마냥 건물 안이 고요했다. 린은 '조용한 청이 그럴 리가 없다.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아파트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소리 지르면 그때는 조도 떠날지 모른다. 상담도 열심히 받고 약도 거르지 말고 먹어야 한다.’ 청은 자신에게 주문하듯 중얼거린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던 날이 있었다. 참다못한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쳤고, 청은 결국 정신병원 폐쇄병동 신세를 져야 했다. 남편 조는 아파트에서 쫓겨나 이 아파트를 간신히 구해 놓고 청이 병원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 전전 아파트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병원을 들락거렸고 딸아이는 키울 수 없다는 조치에 따라 조의 부모 집에 맡겨졌다.
청이 소리를 지른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어느 날, 울부짖는 소리가 또 났다. 린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굳은 몸짓으로 귀 기울였다. 내용을 들으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울부짖음이 건물을 울렸다. 소리가 멈춘 듯하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한 달이 가고 빠르면 보름 만에 다시 청은 울부짖었다. 소리가 멈추면 건물 안은 오래된 히팅 파이프 가르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건물 안 사람들은 청이 지르기 시작하면 쥐 죽은 듯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가끔은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하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행동을 취하는 사람은 없다. ‘때가 왔구나. 또 시작이구나’ 건물 안의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왜 요즈음 이렇게 괴롭고 힘들까? 청은 이삿짐 깊숙이 넣어놓은 예전에 다른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청색 소음 방지용 패드를 꺼냈다. 문안과 문밖 틈새에 놓았다. ‘왜 내가 소리를 질렀단 말인가!’ 청은 얼굴이 달아올라 가슴이 옥죄었다. 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어 괴로웠다. 고개를 들고 건물을 드나들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먼저 살았던 건물에서도 소리 지르다가 테넌트들이 불평해서 쫓겨났던가. 이 건물에서는 오랫동안 살고 싶다. 한동안 참았는데 울화가 치밀어 그만… 또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왜 이렇게 태어났단 말인가. 중얼거리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키 크고 서글서글한 큰 눈을 가진 청의 아버지는 인상이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좋아했다. 아버지는 봄과 여름이면 잠도 자지 않고 돌아다녔다. 옷을 사들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벌였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곰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먹기만 했다. 마치 겨울잠 자는 곰처럼 몸이 불었다. 아버지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벚꽃이 화창한 어느 날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키 크고 잘생긴 아버지가 죽기 살기로 따라다니자 만난 지 5개월 만에 청을 임신한 몸으로 결혼했다. 청이 태어나자 아버지의 증세는 더욱 악화했다. 근근이 다니던 직장도 잃었다. 꿈 많던 소녀였던 엄마 또한 아버지의 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우울증세를 보였다. 견디다 못한 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이 상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린은 거침없이 떠들며 즐겁다가도 청의 아파트를 지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까치발로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청의 문앞 바닥 문틈 아래 길게 늘어진 청색 패드는 축 늘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청이 소리를 지르고 난 후 건물 안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찌그러져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패드를 볼 때마다 청의 음울한 모습이 떠올라 청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청이 층계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면 창문을 열고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나가곤 했다.
청의 가늘던 몸이 점점 불었다. 불어난 몸 위에 예전보다 더 많은 옷을 껴입어 청의 모습은 마치 성난 곰 같다. 털모자를 푹 눌러 쓰고 중얼거리며 땅만 보고 걸었다. 노란 털모자 위에 검은 갭 모자를 눌러쓰고 등에 백팩을 맸다. 하루가 달라지게 옷도 더 껴입고 등에 진 백팩이 더욱 부풀어졌다. 어쩌다 청 옆을 스치면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증세가 심상치 않다. 만나면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청의 남편과도 눈 마주치기가 불편했다.
청은 조용히 문을 닫고 잽싸게 새벽길을 나섰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또 비명을 지르고 만 청을 보며, 남편 역시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풍선 줄을 결국 놓아버린 사람처럼 말을 잃은 채 벽만 바라보았다. 그냥 먼곳으로 가서 죽고싶다. 오늘은 왜 이리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울까? 한 블록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회사 앞에 이르렀다. 회사에 너무 일찍 왔다. 한 블록을 다시 돌아 회사 문 앞에 또 왔다. “아직 이르다. 죽고 싶다.” 청이 중얼거리며 깊은 고뇌에 빠져 땅을 보고 또다시 블록을 돌려고 발을 떼려는 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청은 공중으로 가볍게 떴다가 무겁게 떨어졌다. 그리고 소음 방지용 패드처럼 널브러져 조용했다.
청이 자신이 일하던 운송회사 트럭에 치여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린은 굳어버린 채 마룻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제 저 아래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건물 안 사람들은 청이 소리를 지르다가 멈췄다고 생각하는지 조용하다. 그녀가 다시 소리 지르기를 기다리는 듯 고요하다. 누구도 문을 열고 내다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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