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3, 2020

소음 방지용 패드


 길고 지루한 겨울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날씨가 포근해졌다. 동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떠든다. 청은 침대에 누워 아이들 노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앞집 강아지가 짖자 옆집 강아지도 따라 깨갱거린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찻길로 나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청은 딸아이가 두발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때가 떠올랐다. 아이가 넘어져 다칠까 봐 자전거 뒤를 붙잡고 따라가다 살짝 놓았다 다시 붙잡고 놓고를 반복하며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쳤다. 아이는 금방 혼자 탈 수 있게 되었다. 
“엄마 나 잘 타지? 이젠 엄마가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탈 수 있어.” 
아이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던가! 한숨을 길게 내 쉰다. 

이웃 여자들과 합창이라도 하는 듯 위층 여자도 창밖에 대고 한몫 거들며 떠든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커지고 춤을 추는 지 오래된 아파트 나무 바닥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꽝, 문 닫는 소리가 건물을 울린다. 사람 사는 정겨운 소리다. 주위가 소란스러워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지붕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단지 딸아이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애달프지만, 착한 남편 조가 지켜주지 않는가. 조가 아침 준비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베개 깊숙이 머리를 파묻고 그의 냄새를 맡는다. 조는 까치발로 조용히 걸어와 커피 컵을 침대 맡에 놓고 살며시 문 닫고 나갔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트리에 불을 밝히고 선물 포장을 풀며 기뻐하는 딸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겠지?'

린은 베이컨을 노릇노릇 구워 오븐 옆 식탁에 놓았다. 강판에 감자를 갈아 만든 해쉬브라운을 뒤집던 주걱을 창문밖에 휘저으며 소리 지른다. 
“조용히 해. 조용히 좀 하라고. 경찰 부를 거야.” 
거대한 몸무게에 의해 한쪽으로 일그러진 차 앞문을 열고 앉아 담배 피우던 옆집 뚱보가 린의 창문을 향해 피우던 담배를 홱 내던졌다. 앞니가 거의 빠져 검은 동굴을 들여다보는 듯한 커다란 입으로 소리쳤다. 
“너나 입 닥쳐. 부르려면 불러봐.” 

린은 마이클 잭슨의 Smooth Criminal을 최고의 볼륨으로 틀었다. 음악에 나오는 총소리에 맞춰 뒤집개를 뚱보를 향해 따따따 총 쏘는 시늉으로 흔들었다. 아파트 문 입구, 옷걸이에 걸려있던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오른손으로는 음악 소리에 맞춰 뒤집개를 휘두르고 왼손으로는 모자를 추켜올리며 문 워크 댄스를 추려고 발을 질질 끌었다. 비닐 바닥 긁히는 소리가 요란한 음악에 잠긴다. 
“엄마, 음악 꺼.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일어나. 아침 먹어. 엄마가 해쉬부라운 만들었다.” 
“엄마, 탄 냄새 나.” 
“아이고머니나! 해쉬브라운이 탔네. 이사를 하든지 해야지 저것들 때문에 아깝게 3개나 탔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침부터. 볼륨 좀 낮추지 못해.” 
남편 찰리가 자다 깨어나 부엌을 기웃거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글쎄 저것들은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어른이나 애나 허구한 날 길바닥에서 떠드네. 모처럼 오붓하게 아침 먹으려고 했더니.” 
찰리는 듣기 싫다는 듯 문을 꽝 닫고 밖으로 나갔다. 린은 음악 볼륨을 낮추고 문 워크 댄스로 뒷걸음질 쳐서 오븐으로 다가와 해쉬브라운을 만들던 뒤집개를 흔들며 춤을 춘다. 
"마이클 잭슨은 천재야. 천재."

 지인들은 항상 밝게 웃는 린을 보고 묻곤 한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야.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봐” 
“복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돈이라도 생긴다면 화낼까? 짜증 내서 몸에 좋을 게 뭐 있다고. 즐겁게 살다 가는 거지. 원래 우리 아버지도 늘 싱글벙글 복권 탄 듯 즐겁게 살다 갔어. 유전인가 봐.” 
린이 밖으로 나가려고 층계를 내려가다가 아래층에 사는 청과 마주쳤다. 이사 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린이예요.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네. 저는 청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청은 수줍은 듯 인사했다.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 커다란 슬픈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인사하는 청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뭔가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청은 바삐 어딘가를 가야 한다는 듯 무거운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갔다.

 청의 아파트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없다. 그녀는 이른 아침에 소리 없이 건물을 빠져나갔다가 저녁 4시경에 찬거리를 사 들고 고양이처럼 층계를 살그머니 올라온다. 어느 날 린이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다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청을 길에서 만났다. 청이 반갑다며 다가와 린을 꽉 껴안았다. 린은 생각지도 못한 청의 반가운 제스처에 감격했다. 
'아, 이 여자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뭐 워낙에 내 주위 많은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착하고 조용한 여자가 나라는 사람을 벌써 알아봤다니!' 

 린은 청의 참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에 관해 더 알고 싶어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와 마주치지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청이 퇴근할 즈음, 문 앞에 나가 동네 여자들과 수다를 떨며 청을 기다렸다. 청이 멀리서 오는 것을 주시하다가 린이 문을 열어주며 반가워서 장황하게 수다를 늘어놓으려는 순간, 청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층계를 바삐 올라갔다. '아, 왜 그러지 내가 너무 떠들어서 실망했나? 그래 맞아 애들에게, 이웃에게 소리를 질러 되니. 조심해야지.' 린은 평상시처럼 소리를 지르려다가도 아차 하며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멀리서부터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다가오고 그러다가는 어느 날은 갑자기 모른 척 스쳐 가는 청을 보고 린은 헷갈렸다. 드디어 린은 멀리서 오는 청을 보면 그녀의 기분을 빨리 파악해서 인사할까? 말까? 를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황당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떨어져 쌓인 붉은 잎 위에 첫눈이 풀풀 날리던 어느 날, 말이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여자의 쉰 소리다. 청의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다. 린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조와 청이 싸우다 청이 두들겨 맞으면 경찰을 부르려고 전화기를 들고 아파트 문을 조금 열고 귀 기울였다. 조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소리 지른 흔적이 없었던 것 마냥 건물 안이 고요했다. 린은 '조용한 청이 그럴 리가 없다.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아파트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소리 지르면 그때는 조도 떠날지 모른다. 상담도 열심히 받고 약도 거르지 말고 먹어야 한다.’ 청은 자신에게 주문하듯 중얼거린다. 청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 소리지르다 참다못한 이웃이 신고해서 경찰이 왔고 병원 신세를 졌다. 그리고 조는 아파트에서 쫓겨나 이 아파트를 간신히 구해 놓고 청이 병원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 전전 아파트에서도 같은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병원을 들락거렸고 딸아이는 키울 수 없다는 조치에 따라 조의 부모 집에 맡겨졌다. 

 청이 소리를 지른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어느 날, 울부짖는 소리가 또 났다. 린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굳은 몸짓으로 귀 기울였다. 내용을 들으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울부짖음이 건물을 울렸다. 소리가 멈추었나 하면 다시 질러대고 계속 지르려나 하면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한 달이 가고 빠르면 보름 만에 다시 청은 울부짖었다. 소리가 멈추면 건물 안은 오래된 히팅 파이프가 가르랑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건물 안 사람들은 청이 지르기 시작하면 쥐 죽은 듯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가끔은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하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행동을 취하는 사람은 없다. ‘때가 왔구나. 또 시작이구나’ 건물 안의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왜 요즈음 이렇게 괴롭고 힘들까? 청은 이삿짐 깊숙이 넣어놓은 예전에 다른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청색 소음 방지용 패드를 꺼냈다. 힘없이 문밖 틈새에 놓았다. ‘왜 내가 소리를 질렀단 말인가!’ 청은 얼굴이 달아올라 가슴이 옥죄었다. 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어 괴로웠다. 고개를 들고 건물을 드나들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먼저 살았던 건물에서도 소리 지르다가 테넌트들이 불평해서 쫓겨났던가. 이 건물에서는 오랫동안 살고 싶다. 한동안 참았는데 울화가 치밀어 그만… 또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왜 이렇게 태어났단 말인가. 중얼거리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큰 눈을 가진 청의 아버지는 인상이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좋아했다.아버지는 새싹이 움트는 봄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식사를 걸러도 에너지가 넘치고 넘쳐 자신감에 부푼 다리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느라 옷을 마구 사들였다. 하물며 옛 여자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일을 벌이며 떠들고 돌아다니느라 몸이 축났다. 물론 크레딧 카드빚도 늘었다. 그러나 잎이 떨어지는 가을과 눈이 풀풀 날리는 겨울에는 말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하며 밖에 나가지 않았다. 마치 겨울잠 자는 곰처럼 몸이 불었다. 아버지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벚꽃이 화창한 어느 날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키 크고 잘생긴 아버지가 죽기 살기로 따라다니자 만난 지 5개월 만에 청을 임신한 몸으로 결혼했다. 청이 태어나자 아버지의 증세는 더욱 악화했다. 근근이 다니던 직장도 잃었다. 꿈 많던 소녀였던 엄마 또한 아버지의 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우울증세를 보였다. 견디다 못한 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이 상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린은 거침없이 떠들며 즐겁다가도 아파트 문을 닫고 내려와 청의 아파트를 지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까치발로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린의 시선은 바닥 문틈에 길게 누워있는 청색 소음 방지용 패드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뱀이 똬리를 풀고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마치 청이 소리를 지르고 난 후 건물 안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찌그러져 숨죽이고 있는 것 같다. 패드를 볼 때마다 청의 음울한 모습이 떠올라 청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청이 층계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면 창문을 열고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나가곤 했다. 

 청의 가늘던 몸이 점점 불었다. 불어난 몸 위에 예전보다 더 많은 옷을 껴입어 청의 모습은 마치 성난 곰 같다. 털모자를 푹 눌러 쓰고 중얼거리며 땅만 보고 걸었다. 노란 털모자 위에 검은 갭 모자를 눌러쓰고 등에 백팩을 맸다. 하루가 달라지게 옷도 더 껴입고 등에 진 백팩이 더욱 부풀어졌다. 어쩌다 청 옆을 스치면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증세가 심상치 않다. 만나면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청의 남편과도 눈 마주치기가 불편했다. 

 청은 조용히 문을 닫고 잽싸게 새벽길을 나섰다. 어제 또 소리를 질러서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 또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잡고 있던 풍선 줄을 놓아버린 양 말을 잃고 벽만 바라봤다. 그냥 먼곳으로 가서 죽고싶다. 오늘은 왜 이리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울까? 한 블록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회사 앞에 이르렀다. 회사에 너무 일찍 왔다. 한 블록을 다시 돌아 회사 문 앞에 또 왔다. “아직 이르다. 죽고 싶다.” 청이 중얼거리며 깊은 고뇌에 빠져 땅을 보고 또다시 블록을 돌려고 발을 떼려는 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청은 공중으로 가볍게 떴다가 무겁게 떨어졌다. 그리고 소음 방지용 패드처럼 널브러져 조용했다. 

 청이 일하는 쉬핑 캄페니 트럭에 치여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린은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이제 저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소식을 전해 들은 건물 안 사람들은 청이 소리를 지르다가 멈췄다고 생각하는지 조용하다. 아니면 그녀가 다시 소리 지르기를 기다리는 듯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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