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4, 2021

이름 없는 여자


"곡예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채찍질하듯 마지못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층계를 내려와 대충 세수 했다. 백을 둘러매고 무거운 스튜디오 문을 조용히 여닫고 나섰다. 

 봉제공장으로 출근하는 플렛 엘리베이터에 탄 차이니스 아줌마들의 외침이 위층으로 올라올수록 커지다가 그녀가 사는 층을 지나 7층에 다다르면 물에 잠기듯 잦아들었다. 아줌마들을 봉제 공장으로 밀어내고 내려온 텅 빈 엘리베이터에 그녀가 타면 웅크리고 앉은 엘리베이터 운영자는 졸린 눈을 뜨기 싫다는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중국 아줌마들의 흘리고 간 도시락통에서 스며 나온 반찬 냄새가 역겨워 그녀는 손으로 코를 감싸고 숨을 쉬지 헐떡였다. 보릿자루 처럼 융크리고 있던 엘리베이터 운영자는 일 층에서 그녀를 부리나케 밖으로 내쫒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녀의 몸은 덤불 속을 헤집듯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중국 아줌마들 틈을 비집고 나와 그랜드 스트릿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숨을 내셨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고 늘어진 발걸음을 끌듯이 내디뎠다. 길 건너 쪽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놀라서 건너다봤다.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다. 그녀 뒤를 바짝 따라오는 녹색과 핫핑크 줄무늬 티셔스 밑에 보라색 바지를 입은 여자에게 외치는 소리다. 대로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의 맞받아치는 커다란 외침이 그랜드 스트릿의 아침 공기를 갈기갈기 찢는다. 길 가는 사람들은 흔한 아침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듯 힐끗 쳐다보고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어두운 공간에 익숙한 그녀는 눈이 시려 고개를 숙이고 빛을 밟고 걷다가 캐널 스트릿과 브로드웨이 코너에 있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브루클린 방향으로 가는 R 트레인에 몸을 싣고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같은 모습으로 창가에 기대어 어두운 창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마주섰다. 삶이 지겹고 버겁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려 옷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겨 옷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직원 두 명과 왓치 맨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왓치 맨에게 줬다. 그가 샷다를 올리고 열쇠를 돌려주며 오늘도 잘해보자며 기운 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금전 등록기 주변을 정리하고 장사할 준비를 마쳤다. 베이글로 배를 채운 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무심코 내다봤다. 가게 앞 왼쪽에 자그마한 체구의 후줄근한 젊은이가 서 있다. 그녀 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길가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배달된 박스에 담긴 신상품을 풀어 물건 상태를 점검하고 직원에게 정리하라고 시켰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창밖을 내다봤다. 초라하고 왜소한 그 남자는 불안한 듯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하더니 아까 섰던 장소로 돌아가서 말뚝에 묶인 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옷 정리를 하다가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그 낯선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 위에 돌돌 말은 여자 스타킹을 올려놓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가게 앞 색다른 풍경이 신경 쓰여 창밖으로 눈이 자주 갔다. 

 손님들이 들락날락하고 금전 등록기 문이 여닫히며 바빠졌다. 이상한 남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나 밖을 내다보니 없다. 순간, 그 남자가 스타킹을 뒤집어쓴 얼굴 속의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 앞에 서서 바보처럼 쳐다봤다. 스타킹 안에 일그러진 얼굴이 어찌나 이상하고 웃기던지 자세히 보려고 그녀는 몸을 그에게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흠칫 몸을 뒤로 빼더니 갑자기 몸 뒤에서 부라운 봉투를 꺼내어 그녀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돈 내놔.” 
소리쳤다. 
“미친놈. 웃기고 있네.” 
그녀는 부라운 백을 낚아채려고 손을 뻗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일 거야. 모두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돌려 직원들과 손님들에게 소리 질렀다. 

 그녀는 그가 전혀 프로페셔널한 강도로 보이지 않았다. 부라운 봉투 안에 든 것이 총이라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스타킹 안에 지그재그 일그러진 얼굴이 '영화에서도 이런 모습이었던가?' 상상하며 강도와 맞닥치는 일이 실제로 그녀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니, 더는 희망 없는 고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 듯도 하다. 그리고 그녀의 돈이 아니기에 내 줄 수 없다는 생각도 스쳤다. 위협적인 짧은 순간에 이런저런 스치는 번민으로 놀랄 틈이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현실이었다. 

 돈을 절대로 내 줄 것 같지 않은 그녀의 기세에 눌린 강도는 그녀를 밀치고 금전 등록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두 발로 차며 난리 치자 금전 등록기 문이 열렸다. 돈을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강도는 가게 문밖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그를 뒤쫓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 중 한 직원에게 그녀의 발목이 잡혔다. 여직원은 그녀의 다리를 붙들고 울면서 매달렸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그랬어요. 정신 차려요. 지난주에도 한 블록 위 피자가게에 강도가 들어 총에 맞아 죽었데요.” 
순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 상황임을 실감했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몸이 떨렸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강도와의 싸움이 꿈속에서 일어난 듯 정신이 몽롱했다. 

 경찰이 오고 가게 주인이 왔다. 
“강도가 돈을 달라면 줄 것이지 왜 주지 않고 어리석게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어요. 금전 등록기에는 돈이 얼마나 있었나요?’ 
“250불 정도요.” 
"보험회사가 오면 750불이라고 말해요. 그래봐야 250불 정도뿐이 받지 못해요.” 

 그녀는 조금 일찍 퇴근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바느질 공장에서 퇴근하는 중국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내려올수록 엘리베이터를 부풀려 터지게라도 할 듯 우렁찼다. 엘리베이터는 울긋불긋한 꽃무늬에 쌓인 아줌마들을 그랜드 스트릿으로 토해내듯 쏟아냈다. 거리는 그녀들의 수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남자가 눌러주는 층을 향해 올라가 무거운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녀의 백수 남편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양 힘들었다는 듯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그들 부부의 침실 반대편 공간에 기거하는 룸메이트는 뭔가에 집중하는지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가 차려줄 밥상을 기다리며 되지도 않은 개똥철학을 주고받는 두 남자는 장을 보지 않은 빈손으로 평소보다 일찍 들어온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평상시 집에 오자마자 침실 밑의 작은 부엌으로 들어가 차이나타운에서 사 온 장을 풀고 저녁을 짓느라 부지런 떨던 그녀는 곧장 위층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엄마가 결혼할 때 해준 모시 이불을 덮고 쪼그리고 누었다. 모시이불 위에 수 놓은 잔잔한 작은 꽃무늬를 보자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몸은 와들와들 떨렸다. 희망이 없는 삶을 더는 살 수 없다는 되뇜만 머릿속을 휘돌 뿐 입은 점점 더 꽉 조여졌다. 얼굴을 베개에 묻고 숨죽여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그녀는 배가 아팠다. 꿈속에서 아픈 배인 줄 알았는데 점점 현실에서도 아팠다. 누군가가 배 안을 꼬집어 뜯는 듯했다. 그러다가 손톱으로 잡아 뜯듯이 쑤셨다. 배를 쥐고 뒤틀다 이불에 묻은 피를 봤다. 그러고 보니 두서너 달 월경이 없었다. 배를 꼬챙이로 찌르듯 한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모시 이불에 튤립이 피다가 붉은 장미가 피고 드디어는 검붉은 맨드라미 꽃잎을 쏟아부어 놓은 듯 붉은 피가 번졌다. 그녀는 칼로 뱃속의 살점을 자르는듯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을 몸에 두르고 엉금엉금 기어 층계를 내려왔다. 그녀를 본 두 남자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일어난 자리에 쓰러졌다. 일어났다. 앉았다. 누었다. 소리를 지르며 바둥거렸다. 두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황망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몸을 감싸려고 그녀의 남편이 가져온 삼베 이불도 피로 물들었다. 붉은 피로 얼룩진 이불을 끌고 바닥을 구르다 벽을 짚고 엉금엉금 기며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남편은 드러난 아내의 몸을 가리려고 이불이란 이불은 모두 가져와 덮어주며 따라다녔다. 

 병원비 계산을 하는지 두 남자는 한동안 구석에서 뭔가를 주고받을 뿐 어떤 조치도 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바둥거리다가 두 눈을 부릅드고 주위를 둘러봤다. 
‘더러운 썩은 동굴 안에서 죽는구나! 이곳에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듯한 빈사 상태에서 소리쳤다.
“앰블런스를 불러줘. 제발, 앰블런스를 불러줘.” 

 병원 하얀 시트 위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소독약 냄새가 난다. 몸이 붕 뜬 듯 구름을 타고 가는 듯하다. 몸으로부터 아픔이 분리되어 고통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편하다.  현실임을 실감하려소 시트를 살살 만졌봤다. 사각사각 프레쉬한 시트가 엄마 침대에 누운 듯 편안하다. ‘아! 영원히 이렇게 깨끗하고 포근한 곳에 누워 있었으면.’ 그녀는 물속에 잠기 듯 잠에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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