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그랜드 스트릿.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그랜드 스트릿. Show all posts

Tuesday, June 30, 2026

전업 작가의 긴 여정


세상이 잠든 새벽이면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창밖 이스트 강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누군가의 깨어 있는 삶을 증명하듯, 환하게 불을 밝힌 아파트 창들이 밤의 적막을 비집고 나온다. 좁은 길가 맞은편, 검은 티셔츠를 입은 동양 남자가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여닫고 오븐 앞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꽃무늬 잠옷을 입은 퉁퉁한 동양 여자가 등장한다. 둘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싱크대 앞에 나란히 한동안 붙어 서 있다. 불이 꺼진다. 무대의 막이 내리듯 풍경도 사라진다. 나는 습관처럼 그 창을 흘금거리다 오래전 우리 부부의 시간을 떠올린다. 

오래전, 나는 맨해튼 차이나타운 근처 그랜드 스트리트에 있는 7층 건물 중 2층에 살았다. 아침이면 바느질 공장으로 출근하는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저녁이면 그들의 수다가 다시 건물을 채웠고, 나도 차이나타운으로 저녁거리를 사러 나섰다.

이 건물로 들어오기 전,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결혼 선서만 하고 떨어져 살았었다. 변변한 수입이 없어 함께 살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남편은 그의 룸메이트와 나는 나의 룸메이트와 각각 지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 때, 남편의 룸메이트가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작업실의 한쪽은 룸메이트가, 다른 한쪽은 우리 부부가 썼다. 건물 주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았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내러 가면 그는 커다란 장화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 나와 돈을 받고는, 인심 쓰듯 콩나물 서너 움큼을 싸주었다. 집세를 내고 나면 수중엔 땡전 한 푼 남지 않았다. 주인이 건네준 콩나물로 국을 끓이고, 무치고, 밥을 지어 먹으면서도 우리는 작업을 고집하며 버텼다. 그러다 결국 매년 올라가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맨해튼을 떠나야 했다.

우리 부부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저렴한 거처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맨해튼 애비뉴의 맨 끝자락 물가 바로 옆에 위치한 빈 공장 건물을 발견했다. 건물주는 분필로 나무 바닥에 선을 그어 여러 세입자가 나눠 쓰도록 해놓았다. 우리는 임시 벽을 세우고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래도 우리는 저렴한 임대료와 창밖으로 펼쳐진 맨해튼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건물주가 난방 시설이 없다고 미리 일러주었지만, 한여름에 이사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겨울이 찾아왔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지금도 그 겨울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 혹독한 시간을 견뎌냈고, 아이 둘도 낳았다.

그 무렵,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은 기억이 하나 있다. “아줌마, 내가 여기까지 다시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못 오는 줄 알았어요.” 친구의 어린 자식이 내뱉은 말에, 마치 나는 쇠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 친구가 직장 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 갓난아이를 한국으로 보냈었다가, 몇 년 후 형편이 좀 나아지자 다시 데려온 참이었다. 그 아이가 우리 아이들과 공원에서 놀다가 내 옆에 슬그머니 앉아 한숨을 내쉬며 들려준 이야기였다. 나는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그 한마디는 내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남편은 식당 주방 보조부터 목수 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후배가 운영하는 램프 가게의 채색 작업이었다. 처음에 남편은 일주일에 닷새를 일했다. 그러다 사흘, 나흘로 지독한 중독자가 약을 조금씩 끊어가듯 하루하루 일을 줄여나갔다. 결국 일주일에 단 하루만 일하다가 마침내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후배 가게에서 일을 조금씩 줄일 때마다, 나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데 밥줄 같은 일손을 놓아버리니 어찌 살란 말인가 싶어, 직장을 구하려고 신문의 구인란을 뒤적였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 일하지 말고, 작업하며 버텨내야 해. 그래야 우리 둘 다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어.”

다행히도 남편이 일손을 놓은 시간만큼 작업에 전념한 덕에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둘 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풀타임 화가’다. 꿈만 같던 일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혹시나 가난의 그림자가 다시 우리를 덮쳐오진 않을까 덜컥 불안해지다가도,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에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전율이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그 새벽, 나는 친구 아이의 그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넜다. 언젠가 나도 이 세상에 같은 말을 당당히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Thursday, June 24, 2021

이름 없는 여자


"곡예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채찍질하듯, 마지못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와 대충 세수하고 백을 둘러맸다. 무거운 스튜디오 문을 조용히 여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봉제공장으로 출근하는 차이니즈 아줌마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요란한 외침을 쏟아내며 올라왔다. 그 소음은 그녀가 사는 층을 지나 7층에 다다를 때쯤이면 물속에 잠기듯 잦아들었다. 아줌마들을 공장으로 밀어내고 내려온 텅 빈 엘리베이터. 그 안에는 엘리베이터 운영자가 졸린 눈을 뜨기 싫다는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아줌마들이 흘리고 간 도시락 냄새가 역겨웠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참느라 헐떡였다. 보릿자루처럼 웅크리고 있던 운영자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오물을 내쫓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덤불을 헤치듯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아줌마들 틈을 비집고 나와 그랜드 스트리트의 아침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옷깃을 여미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놀라 바라보니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였다. 그녀 뒤를 바짝 따르는 줄무늬 티셔츠 차림의 여자에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맞부딪치는 두 여자의 고함이 아침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람들은 흔한 풍경이라는 듯 힐끗거리고는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려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빛을 밟으며 걷다 캐널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 코너의 지하철역으로 스며들었다. 브루클린 방향 R 트레인에 몸을 실은 그녀는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같은 자세로 창가에 기댔다. 어두운 창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오래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초라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옷가게로 향했다. 멀리서 여직원 두 명과 워치맨(Watchman)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자, 그가 셔터를 올리고는 잘해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금전 등록기를 정리하고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창밖을 무심코 내다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후줄근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배달된 박스를 풀어 물건을 점검하고 직원에게 정리를 시킨 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사내는 불안한 듯 가게 앞을 서성이더니, 아까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마 후 다시 내다본 사내의 모습은 기괴했다. 덥수룩한 머리 위에 돌돌 말린 여자 스타킹을 얹고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녀는 코웃음을 쳤지만, 자꾸만 그 낯선 풍경에 눈길이 갔다.

가게가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밖을 보니 그가 사라졌다. 그 순간, 스타킹을 뒤집어써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바보 같은 그 모습이 하도 기가 차서 그녀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흠칫 물러나더니 등 뒤에 감췄던 갈색 봉투를 들이밀었다. “돈 내놔!” “미친놈, 웃기고 있네.” 그녀가 봉투를 낚아채려 손을 뻗자, 오히려 강도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돈 안 내놓으면 죽일 거야! 다들 엎드려!”

그는 전혀 프로 강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봉투 안에 총이 들었으리라 믿기지도 않았다. 스타킹 속 지그재그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녀는 이 상황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체념이 그녀를 겁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 돈도 아닌데 줄 수 없다는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스쳐 간 번민들이 공포를 압도했다.

기세에 눌린 강도는 결국 그녀를 밀치고 금전 등록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로 걷어차 억지로 문을 연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그녀가 뒤쫓으려 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직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그랬어요! 지난주에도 윗동네 피자가게 주인이 총 맞고 죽었단 말이에요!” 그제야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이 떨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결 같았다.

경찰과 가게 주인이 도착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그냥 줄 것이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요? 현금이 얼마나 있었죠?” “250불 정도요.” 주인이 낮게 속삭였다. “보험사에는 750불이라고 말해요. 그래야 250불이라도 겨우 받으니까.”

조금 일찍 퇴근한 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퇴근하는 아줌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엘리베이터는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을 길바닥으로 토해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뚝뚝한 운영자가 올려다준 층에서 내려 무거운 문을 열었다. 백수 남편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룸메이트는 구석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빈손으로 일찍 들어온 그녀를 두 남자는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라면 부엌으로 달려가 장 봐온 것들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겠지만, 그녀는 곧장 위층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친정엄마가 해주신 모시 이불을 덮고 쪼그려 누웠다. 이불에 수놓인 잔잔한 꽃무늬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희망 없는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복통이 시작되었다. 꿈인 줄 알았으나 통증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뱃속을 손톱으로 잡아 뜯는 듯한 고통에 배를 쥐고 뒤틀다 이불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간 달거리가 없었다.

흰 모시 이불 위에 튤립이 피더니 장미가 되고, 이내 검붉은 맨드라미 꽃잎을 쏟아부은 듯 피가 번져 나갔다. 칼로 후벼 파는 통증을 견디며 이불을 두른 채 엉금엉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본 두 남자가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고꾸라졌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작성해주신 글은 90년대 전후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Chinatown/Grand St/Canal St)의 황량하고 고단한 삶의 풍경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감각해진 주인공이 강도 사건과 유산을 겪으며 겪는 심리적·신체적 고통이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글의 정서와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문장의 연결을 부드럽게 다듬고, 불필요한 조사를 정리하며, 묘사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교정해 보았습니다.


[교정 및 다듬기]

"곡예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채찍질하듯, 마지못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와 대충 세수하고 백을 둘러맸다. 무거운 스튜디오 문을 조용히 여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봉제공장으로 출근하는 차이니즈 아줌마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요란한 외침을 쏟아내며 올라왔다. 그 소음은 그녀가 사는 층을 지나 7층에 다다를 때쯤이면 물속에 잠기듯 잦아들었다. 아줌마들을 공장으로 밀어내고 내려온 텅 빈 엘리베이터. 그 안에는 엘리베이터 운영자가 졸린 눈을 뜨기 싫다는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아줌마들이 흘리고 간 도시락 냄새가 역겨웠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참느라 헐떡였다. 보릿자루처럼 웅크리고 있던 운영자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오물을 내쫓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덤불을 헤치듯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아줌마들 틈을 비집고 나와 그랜드 스트리트의 아침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옷깃을 여미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놀라 바라보니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였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줄무늬 티셔츠 차림의 여자에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맞부딪치는 두 여자의 고함이 아침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람들은 흔한 풍경이라는 듯 힐끗거리고는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려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빛을 밟으며 걷다 캐널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 코너의 지하철역으로 스며들었다. 브루클린 방향 R 트레인에 몸을 실은 그녀는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같은 자세로 창가에 기댔다. 어두운 창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오래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초라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옷가게로 향했다. 멀리서 여직원 두 명과 워치맨(Watchman)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자, 그가 셔터를 올리고는 잘해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금전 등록기를 정리하고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창밖을 무심코 내다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후줄근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배달된 박스를 풀어 물건을 점검하고 직원에게 정리를 시킨 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사내는 불안한 듯 가게 앞을 서성이더니, 아까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마 후 다시 내다본 사내의 모습은 기괴했다. 덥수룩한 머리 위에 돌돌 말린 여자 스타킹을 얹고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녀는 코웃음을 쳤지만, 자꾸만 그 낯선 풍경에 눈길이 갔다.

가게가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밖을 보니 그가 사라졌다. 그 순간, 스타킹을 뒤집어써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바보 같은 그 모습이 하도 기가 차서 그녀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흠칫 물러나더니 등 뒤에 감췄던 갈색 봉투를 들이밀었다. “돈 내놔!” “미친놈, 웃기고 있네.” 그녀가 봉투를 낚아채려 손을 뻗자, 오히려 강도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돈 안 내놓으면 죽일 거야! 다들 엎드려!”

그는 전혀 프로 강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봉투 안에 총이 들었으리라 믿기지도 않았다. 스타킹 속 지그재그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녀는 이 상황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체념이 그녀를 겁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 돈도 아닌데 줄 수 없다는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스쳐 간 번민들이 공포를 압도했다.

기세에 눌린 강도는 결국 그녀를 밀치고 금전 등록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로 걷어차 억지로 문을 연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그녀가 뒤쫓으려 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직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그랬어요! 지난주에도 윗동네 피자가게 주인이 총 맞고 죽었단 말이에요!” 그제야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이 떨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결 같았다.

경찰과 가게 주인이 도착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그냥 줄 것이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요? 현금이 얼마나 있었죠?” “250불 정도요.” 주인이 낮게 속삭였다. “보험사에는 750불이라고 말해요. 그래야 250불이라도 겨우 받으니까.”

조금 일찍 퇴근한 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퇴근하는 아줌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엘리베이터는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을 길바닥으로 토해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뚝뚝한 운영자가 올려다준 층에서 내려 무거운 문을 열었다. 백수 남편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룸메이트는 구석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빈손으로 일찍 들어온 그녀를 두 남자는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라면 부엌으로 달려가 장 봐온 것들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겠지만, 그녀는 곧장 위층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친정엄마가 해주신 모시 이불을 덮고 쪼그려 누웠다. 이불에 수놓인 잔잔한 꽃무늬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희망 없는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복통이 시작되었다. 꿈인 줄 알았으나 통증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뱃속을 손톱으로 잡아 뜯는 듯한 고통에 배를 쥐고 뒤틀다 이불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간 달거리가 없었다.

흰 모시 이불 위에 튤립이 피더니 장미가 되고, 이내 검붉은 맨드라미 꽃잎을 쏟아부은 듯 피가 번져 나갔다. 칼로 후벼 파는 통증을 견디며 이불을 두른 채 엉금엉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본 두 남자가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고꾸라졌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남편이 가져온 삼베 이불마저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몸부림치며 기어 다녔고, 남편은 드러난 아내의 몸을 가리려 이불을 계속 덮어주며 따라다닐 뿐이었다. 구석에서 두 남자는 병원비라도 걱정하는 듯 낮은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빈사 상태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 더러운 썩은 동굴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앰뷸런스 불러! 제발, 앰뷸런스 좀 불러달라고!”

병원 침대의 하얀 시트 위에서 눈을 떴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몸이 붕 뜬 듯 고통이 멀어졌다. 현실임을 확인하려 시트를 살짝 만져보았다. 사각거리는 깨끗한 감촉이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다. '아, 영원히 이 깨끗한 곳에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다시 물속으로 잠기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로 다른 선로 위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습관처럼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공원을 걷고 있었다. 친구가 뉴욕의 제철 음식이라며 게장을 맛있게 먹는 인스타그램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게장 안 좋아해? 요즘 나는 게가 당기는데.” 친구의 게장 타령을 듣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