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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4, 2021

이름 없는 여자


"곡예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채찍질하듯, 마지못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와 대충 세수하고 백을 둘러맸다. 무거운 스튜디오 문을 조용히 여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봉제공장으로 출근하는 차이니즈 아줌마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요란한 외침을 쏟아내며 올라왔다. 그 소음은 그녀가 사는 층을 지나 7층에 다다를 때쯤이면 물속에 잠기듯 잦아들었다. 아줌마들을 공장으로 밀어내고 내려온 텅 빈 엘리베이터. 그 안에는 엘리베이터 운영자가 졸린 눈을 뜨기 싫다는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아줌마들이 흘리고 간 도시락 냄새가 역겨웠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참느라 헐떡였다. 보릿자루처럼 웅크리고 있던 운영자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오물을 내쫓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덤불을 헤치듯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아줌마들 틈을 비집고 나와 그랜드 스트리트의 아침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옷깃을 여미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놀라 바라보니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였다. 그녀 뒤를 바짝 따르는 줄무늬 티셔츠 차림의 여자에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맞부딪치는 두 여자의 고함이 아침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람들은 흔한 풍경이라는 듯 힐끗거리고는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려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빛을 밟으며 걷다 캐널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 코너의 지하철역으로 스며들었다. 브루클린 방향 R 트레인에 몸을 실은 그녀는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같은 자세로 창가에 기댔다. 어두운 창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오래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초라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옷가게로 향했다. 멀리서 여직원 두 명과 워치맨(Watchman)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자, 그가 셔터를 올리고는 잘해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금전 등록기를 정리하고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창밖을 무심코 내다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후줄근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배달된 박스를 풀어 물건을 점검하고 직원에게 정리를 시킨 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사내는 불안한 듯 가게 앞을 서성이더니, 아까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마 후 다시 내다본 사내의 모습은 기괴했다. 덥수룩한 머리 위에 돌돌 말린 여자 스타킹을 얹고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녀는 코웃음을 쳤지만, 자꾸만 그 낯선 풍경에 눈길이 갔다.

가게가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밖을 보니 그가 사라졌다. 그 순간, 스타킹을 뒤집어써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바보 같은 그 모습이 하도 기가 차서 그녀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흠칫 물러나더니 등 뒤에 감췄던 갈색 봉투를 들이밀었다. “돈 내놔!” “미친놈, 웃기고 있네.” 그녀가 봉투를 낚아채려 손을 뻗자, 오히려 강도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돈 안 내놓으면 죽일 거야! 다들 엎드려!”

그는 전혀 프로 강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봉투 안에 총이 들었으리라 믿기지도 않았다. 스타킹 속 지그재그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녀는 이 상황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체념이 그녀를 겁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 돈도 아닌데 줄 수 없다는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스쳐 간 번민들이 공포를 압도했다.

기세에 눌린 강도는 결국 그녀를 밀치고 금전 등록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로 걷어차 억지로 문을 연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그녀가 뒤쫓으려 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직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그랬어요! 지난주에도 윗동네 피자가게 주인이 총 맞고 죽었단 말이에요!” 그제야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이 떨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결 같았다.

경찰과 가게 주인이 도착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그냥 줄 것이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요? 현금이 얼마나 있었죠?” “250불 정도요.” 주인이 낮게 속삭였다. “보험사에는 750불이라고 말해요. 그래야 250불이라도 겨우 받으니까.”

조금 일찍 퇴근한 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퇴근하는 아줌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엘리베이터는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을 길바닥으로 토해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뚝뚝한 운영자가 올려다준 층에서 내려 무거운 문을 열었다. 백수 남편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룸메이트는 구석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빈손으로 일찍 들어온 그녀를 두 남자는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라면 부엌으로 달려가 장 봐온 것들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겠지만, 그녀는 곧장 위층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친정엄마가 해주신 모시 이불을 덮고 쪼그려 누웠다. 이불에 수놓인 잔잔한 꽃무늬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희망 없는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복통이 시작되었다. 꿈인 줄 알았으나 통증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뱃속을 손톱으로 잡아 뜯는 듯한 고통에 배를 쥐고 뒤틀다 이불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간 달거리가 없었다.

흰 모시 이불 위에 튤립이 피더니 장미가 되고, 이내 검붉은 맨드라미 꽃잎을 쏟아부은 듯 피가 번져 나갔다. 칼로 후벼 파는 통증을 견디며 이불을 두른 채 엉금엉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본 두 남자가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고꾸라졌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작성해주신 글은 90년대 전후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Chinatown/Grand St/Canal St)의 황량하고 고단한 삶의 풍경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감각해진 주인공이 강도 사건과 유산을 겪으며 겪는 심리적·신체적 고통이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글의 정서와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문장의 연결을 부드럽게 다듬고, 불필요한 조사를 정리하며, 묘사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교정해 보았습니다.


[교정 및 다듬기]

"곡예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채찍질하듯, 마지못해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와 대충 세수하고 백을 둘러맸다. 무거운 스튜디오 문을 조용히 여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봉제공장으로 출근하는 차이니즈 아줌마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요란한 외침을 쏟아내며 올라왔다. 그 소음은 그녀가 사는 층을 지나 7층에 다다를 때쯤이면 물속에 잠기듯 잦아들었다. 아줌마들을 공장으로 밀어내고 내려온 텅 빈 엘리베이터. 그 안에는 엘리베이터 운영자가 졸린 눈을 뜨기 싫다는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아줌마들이 흘리고 간 도시락 냄새가 역겨웠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참느라 헐떡였다. 보릿자루처럼 웅크리고 있던 운영자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오물을 내쫓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덤불을 헤치듯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아줌마들 틈을 비집고 나와 그랜드 스트리트의 아침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옷깃을 여미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놀라 바라보니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였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줄무늬 티셔츠 차림의 여자에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맞부딪치는 두 여자의 고함이 아침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람들은 흔한 풍경이라는 듯 힐끗거리고는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려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빛을 밟으며 걷다 캐널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 코너의 지하철역으로 스며들었다. 브루클린 방향 R 트레인에 몸을 실은 그녀는 엘리베이터 운영자와 같은 자세로 창가에 기댔다. 어두운 창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오래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초라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옷가게로 향했다. 멀리서 여직원 두 명과 워치맨(Watchman)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자, 그가 셔터를 올리고는 잘해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금전 등록기를 정리하고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창밖을 무심코 내다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후줄근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배달된 박스를 풀어 물건을 점검하고 직원에게 정리를 시킨 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사내는 불안한 듯 가게 앞을 서성이더니, 아까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마 후 다시 내다본 사내의 모습은 기괴했다. 덥수룩한 머리 위에 돌돌 말린 여자 스타킹을 얹고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녀는 코웃음을 쳤지만, 자꾸만 그 낯선 풍경에 눈길이 갔다.

가게가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밖을 보니 그가 사라졌다. 그 순간, 스타킹을 뒤집어써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바보 같은 그 모습이 하도 기가 차서 그녀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흠칫 물러나더니 등 뒤에 감췄던 갈색 봉투를 들이밀었다. “돈 내놔!” “미친놈, 웃기고 있네.” 그녀가 봉투를 낚아채려 손을 뻗자, 오히려 강도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돈 안 내놓으면 죽일 거야! 다들 엎드려!”

그는 전혀 프로 강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봉투 안에 총이 들었으리라 믿기지도 않았다. 스타킹 속 지그재그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녀는 이 상황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체념이 그녀를 겁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 돈도 아닌데 줄 수 없다는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스쳐 간 번민들이 공포를 압도했다.

기세에 눌린 강도는 결국 그녀를 밀치고 금전 등록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로 걷어차 억지로 문을 연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그녀가 뒤쫓으려 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직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그랬어요! 지난주에도 윗동네 피자가게 주인이 총 맞고 죽었단 말이에요!” 그제야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이 떨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결 같았다.

경찰과 가게 주인이 도착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그냥 줄 것이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요? 현금이 얼마나 있었죠?” “250불 정도요.” 주인이 낮게 속삭였다. “보험사에는 750불이라고 말해요. 그래야 250불이라도 겨우 받으니까.”

조금 일찍 퇴근한 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퇴근하는 아줌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엘리베이터는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을 길바닥으로 토해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뚝뚝한 운영자가 올려다준 층에서 내려 무거운 문을 열었다. 백수 남편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룸메이트는 구석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빈손으로 일찍 들어온 그녀를 두 남자는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라면 부엌으로 달려가 장 봐온 것들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겠지만, 그녀는 곧장 위층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친정엄마가 해주신 모시 이불을 덮고 쪼그려 누웠다. 이불에 수놓인 잔잔한 꽃무늬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희망 없는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복통이 시작되었다. 꿈인 줄 알았으나 통증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뱃속을 손톱으로 잡아 뜯는 듯한 고통에 배를 쥐고 뒤틀다 이불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간 달거리가 없었다.

흰 모시 이불 위에 튤립이 피더니 장미가 되고, 이내 검붉은 맨드라미 꽃잎을 쏟아부은 듯 피가 번져 나갔다. 칼로 후벼 파는 통증을 견디며 이불을 두른 채 엉금엉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본 두 남자가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고꾸라졌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남편이 가져온 삼베 이불마저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몸부림치며 기어 다녔고, 남편은 드러난 아내의 몸을 가리려 이불을 계속 덮어주며 따라다닐 뿐이었다. 구석에서 두 남자는 병원비라도 걱정하는 듯 낮은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빈사 상태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 더러운 썩은 동굴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앰뷸런스 불러! 제발, 앰뷸런스 좀 불러달라고!”

병원 침대의 하얀 시트 위에서 눈을 떴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몸이 붕 뜬 듯 고통이 멀어졌다. 현실임을 확인하려 시트를 살짝 만져보았다. 사각거리는 깨끗한 감촉이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다. '아, 영원히 이 깨끗한 곳에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다시 물속으로 잠기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Thursday, May 6, 2021

다이아몬드의 허상


수미는 뉴욕으로 유학 와서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체류 비자가 곧 만료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유학 자금을 대느라 고생하신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노처녀 딸로 얹혀사는 것보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혼자 사는 게 부모를 위한 길 아닐까 생각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비자 만료 날짜를 손꼽아 세며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수미는 아파트 지하 세탁실에서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미술 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 앉아 있던 동양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 사람이세요? 미술 전공했나요? 어느 대학 나왔어요?” 질문 공세 끝에 남자는 자신을 대학 선배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먼 이국땅에서 후배를 만나다니 반가워요! 이번 토요일에 우리 아파트에 놀러 와요.”

토요일, 수미는 몇 벌 없는 옷을 침대 위에 죄다 꺼내 놓고 마른 몸에 이 옷 저 옷을 걸쳐 보았다. 그나마 체구를 풍성해 보이게 만드는 연두색과 노란색 격자무늬 원피스를 입고 선배의 아파트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렀다. 아파트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낯익고 커다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어, 너는 어쩐 일로?” 대학 동기인 두일이었다. 노처녀 노총각을 맺어주려는 선배의 배려였지만, 서로를 마뜩잖게 여기던 둘 사이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두일이는 이민자여서 영주권이 있었다. 수미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두일이에게 말을 꺼내 볼까 말까 고민했다. 동양인으로서 뉴욕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과거 서부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돌아가 뉴욕에 오기 전처럼 교사를 하기는 싫었다.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치듯 떠나온 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바닥나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고 유학을 왔듯이, 결혼도 노력해서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며칠 후면 비자가 끝나서 서울로 가야 해. 나 영주권 좀 해주라.” 수미의 말에 두일의 얼굴이 곤란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두일은 아무 말 없이 허공만 쳐다보았다. “해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말고. 빨리 대답해.” “너 요새 영주권 해결해 주는 데 돈 많이 줘야 해.” “얼마 주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두일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신이 난 듯 실실 웃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영주권밖에 없는 주제에 뻐기는 모습이 아니꼬왔지만, 수미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좋아. 대신 내가 집 한 채 사줄게.”

그 길로 차이나타운에 가서 수미는 제 반지로 30달러짜리를, 두일이 반지로는 50달러짜리를 샀다. 그러고는 옐로 택시를 잡아타고 랜드 스트리트 135번지 2층에 사는 두일이를 끌고 내려와 태웠다. 증인해줄 친구 두 명까지 픽업해 시청으로 달렸다. 주례가 1분 45초 동안 뭐라 뭐라 지껄였다. “다시, 다시 한번만 더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통에 주례에게 외치기도 하면서,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비자 만료 딱 하루 전날 혼인 서약을 마쳤다.

결혼식이 끝난 후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 '실락기'에서 친구들과 칭다오 맥주를 들이켜며 점심을 먹었다. 수미는 자신이 자청한 결혼이었기에 반지 값도, 택시비도, 술값과 밥값도 기꺼이 지불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 입구에서 둘은 마주 섰다. “이제 됐니?” 두일이가 물었다. “됐다. 이제 약속 지킨 거다.” 수미는 차갑게 대답하고는 홱 돌아서 지하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미가 앞장서서 영주권을 신청했다. 비록 서류상 부부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 예전에 살던 대로 룸메이트들과 따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LA에 사는 두일이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줄 테니 LA로 오라는 것이었다. 수미는 번거로운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두일이 아버지는 꼭 만나보고 싶다며 비행기 표를 보내주셨다.

무뚝뚝한 함경도 출신인 두일이 식구들과 달리, 상냥한 서울 여자 수미를 보자 아버지는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난 서울 아가씨가 좋아요. 주변머리 없는 우리 아들을 잘 다독거려서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결혼식도 올려주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해 주겠소.” “저, 죄송한데요. 저는 다이아몬드 반지는 필요 없고요. 반지 대신 돈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 수미의 엉뚱한 요구에 두일 아버지는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 거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 반짝이는 돌멩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돈으로 주시면 뉴욕에서 생활 기반을 잡는 데 쓰겠습니다.”

두일 아버지는 결혼을 한 것인지 만 것인지 불분명한 두 사람의 태도를 걱정하여, 서울에 계신 수미의 부모님까지 LA로 초대했다. 물론 수미는 친정부모님에게도 다른 예물 대신 돈으로 달라고 미리 설득해 둔 상태였다. 결국 양가 부모님에게서 뭉칫돈을 받아 챙긴 두 사람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 후, 수미는 알뜰히 돈을 더 긁어모아 마침내 집을 샀다. “이제 됐지? 약속대로 집 한 채 사준 거야.” “그래, 됐다.” 두일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우리 결혼하기 전에 엄마가 궁합을 봤는데, 점쟁이가 자기 평생 이렇게 좋은 궁합은 처음 본다며 놀라 자빠졌다는 얘기 들었지? 나도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 무일푼이었던 내가 이렇게 잘 살게 될 줄이야. 이게 다 수미 당신 덕분이지.” “그러게 내가 결혼하자고 할 때 왜 그리 뒤틀었어? 솔직히 말해봐. 내가 집 사준다고 하니까 결혼한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내가 결혼할 형편이 아니었잖아.”

어느덧 수미와 두일이는 결혼 37년 차 부부가 되었다. “이제 메주콩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사 줄까?” 늙어버린 수미의 손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며 두일이가 말했다. “반짝이는 돌멩이 대신, 밥하기 싫은 날 K타운에서 음식이나 테이크아웃 해다 줘.”

잠시 후, 먼 옛날 사냥꾼이 먹을거리를 안고 돌아오듯 두일이가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꽝 내려놓았다. 수미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것을 번쩍 들어 식탁 위에 풀어놓았다. 설렁탕, 빈대떡, 청국장, 그리고 고등어구이였다. 두일이가 욕실에서 대충 씻는 동안, 수미는 그새 미지근해진 빈대떡과 고등어구이를 팬에 따끈하게 데웠다.

“자주 배달해 줄게. 많이 먹어. 집에서는 조미료를 전혀 안 쓰니까, 가끔은 이런 MSG도 먹어줘야 잠이 잘 오는 법이야.” 두일이는 히죽대며 노릇노릇 잘 구워진 커다란 고등어 살점을 떼어 수미의 밥그릇 위에 살포시 올려주었다. 

뉴욕의 유랑자

세상이 잠든 새벽엔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문뜩 어떤 생각이 잠에서 깨게 했다. 떠오른 것을 잊기 전에 적어 놓으려고 일어났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 나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한다. 8층 창밖, 저 멀리 허드슨강이 어둠 속에 침잠해 있다. 흐름마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