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6, 2021

다이아몬드의 허상


수미는 뉴욕으로 유학 와서 학위를 받았다. 미국 체류 비자가 곧 만료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야한다. 유학자금 뒷바라지 한 부모 곁으로 돌아가 노처녀로 부모에게 얹혀 살며 부모속을 애태우느니 차라리 멀리 떨어져 독립하는 것이 부모를 위하는 것이 아닐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비자가 만료되는 날짜를 손꼽아 세며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수미가 사는 아파트 건물 지하실 세탁장에서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미술책을 보고 있었다. 가까이 앉아 있던 동양 남자가 말을 붙였다. 
“한국 사람이세요? 미술 전공했나요? 어느 대학 나왔어요?” 
질문 공세 결과, 남자가 자신을 대학 선배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먼 이국땅에서 후배를 만나다니 반가워요! 이번 토요일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몇 벌 없는 옷을 침대 위에 죄다 꺼내 놓고 마른 몸에 이 옷 저 옷을 걸쳐 봤다. 그나마 풍성해 보이는 초록색과 노란색 격자무늬 원피스를 입고 선배 아파트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용기 내 벨을 누르고 아파트를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커다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어 너는 어쩐 일로?” 
대학 동기 동창인 두일이다. 

 노처녀 노총각을 맺어주려는 선배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마뜩잖게 여기는 둘 사이는 진전이 없었다. 수미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두일에게 입을 간신히 열었다. 
“나 며칠 후면 비자가 끝나서 서울로 가야 해. 영주권 좀 해줄래?”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가고 유학 가고 하는 데 결혼도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용기 내서 말했다. 두일의 얼굴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말이 없이 허공만 쳐다봤다. 
“해 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말고. 빨리 대답해.” 
“너 요즈음 영주권 해주는데 돈 많이 줘야 해.” 
“얼마 주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두일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신이 난 듯 실실 웃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영주권뿐이 없는 주제에 뻐기기는 아니꼽지만, 수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좋아. 집 한 채 사줄게.” 

 차이나타운에서 수미는 자신의 반지는 30불, 두일이의 반지는 50불을 주고 샀다. 옐로 택시를 타고 135 Grand St 2층에 사는 두일이를 끌고 내려와 태우고 증인 두 명을 픽업해 시청으로 달렸다. 주례가 1분 45초 동안 뭐라 뭐라 지껄였다. 
“다시, 다시 한번만 더” 
주례에게 외치다가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비자가 끝나기 하루 전날 혼인 서약을 했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 실락기에서 친구들과 칭다오 맥주를 들이켜며 점심을 먹었다. 수미는 자신이 해 달라고 한 결혼이기에 반지도 택시비도 술값과 밥값도 기꺼이 지불했다. 그리고 지하철 입구에서 둘은 마주 섰다. 
“이제 됐니?” 
두일이가 물었다.“ 
“그래 됐다.” 
수미는 차갑게 대답하고 홱 돌아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권을 신청해 놓고 각자 거처에서 사는 그들에게 LA에 사는 두일이 아버지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해주겠다며 LA로 오라고 했다. 수미는 번거로운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일이 아버지는 꼭 만나보고 싶다며 비행기표를 보내 주셨다. 무뚝뚝한 함경도 출신의 두일이 식구들과는 달리 상냥한 서울 여자 수미를 보자 두일이 아버지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난 서울 아가씨가 좋아요. 주변머리 없는 우리 아들을 다독거려 잘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결혼식도 해주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해 주겠어요.” 
“저 죄송한데요. 저는 다이아몬드 반지는 필요 없고요. 반지 대신 돈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 
수미의 엉뚱한 요구에 두일이 아버지 표정은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왜 그러는데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수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 반짝이는 돌을 좋아하지 않아요, 돈으로 주시면 생활 기반을 잡는 데 쓰겠습니다.” 

두일 아버지가 결혼한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수미의 태도를 걱정하는 서울에 계신 수미의 부모님을 LA로 초대했다. 물론, 수미는 그녀의 부모에게도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돈으로 달라고 설득했다. 양쪽 부모에게 뭉칫돈을 받아들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둘은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 후, 수미는 돈을 더 긁어모아 집을 샀다. 
“이제 됐니? 약속대로 집 한 채 사준 거야.” 
“그래 됐다.” 
두일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우리 결혼전 엄마가 궁합을 봤더니 점쟁이가 이렇게 좋은 궁합은 자기 생전에 처음본다며 놀랬다는 이야기 들었지. 나도 내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무일푼이었던 내가 이렇게 잘 살게 될줄이야. 다 수미 당신 덕분이지." 
"그러게 내가 결혼 하잘 때 왜 뒤틀었어. 솔직히 말해봐. 집 사준다니까 결혼한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결혼할 형편이 아니었잖아."

수미와 두일이는 결혼 37년째다. 
“메주콩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사 줄까?” 
늙은 수미의 손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며 두일이가 말했다. 
"반짝이는 돌멩이 대신 밥 하기 싫은 날 K타운에서 음식이나 테이크아웃 해 다 줘.” 
옛날 옛적, 사냥 나간 남자가 포획물을 안고 허기져 기다리는 식구를 위해 돌아오듯 두일이는 장 꾸러미를 꽝하고 내려놓았다. 수미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것을 번쩍 들어 식탁에 올려놓고 풀었다. 설렁탕, 빈대떡, 청국장, 고등어구이다. 두일이가 대충 씻는 동안 미지근해진 빈대떡과 고등어구이를 따끈하게 데웠다. 
“자주 배달해 줄게. 많이 먹어. 집에서는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으니까, 가끔은 MSG도 먹어줘야 잠이 잘 와.” 두일이는 히죽대면서 노릇노릇 잘 구워진 커다란 고등어 살점을 떼어서 수미 밥그릇에 놔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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